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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2010.03.02 00:15

10. 03. 02. 無題

조회 수 2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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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전화벨이 울렸고 그 때 마침 싱크대에 잔뜩 쌓여서 무섭게 노려보던 식기더미들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막 마지막 접시를 거품도 제대로 닦아내지 않고 꽂아 넣은 후 방향을 틀어서 달려가 수화기로 손을 뻗은 순간

-뚝

 전기신호 단절. 소리는 혀를 날름 내밀며 조롱하고는 날아갔다.

-......뭐, 답답하면 다시 전화하겠지

 바쁜 쪽은 받는 쪽이 아니라 거는 쪽이라는 철저한 자의적 신념에 따라 상황 무시. 대신 무슨 전화인지 절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은 100배. 등에 업히려고 몸부림치는 불안감을 내동댕이치고 다시 부엌으로. 소화불량이던 싱크대를 해결했으면 이번엔 이쪽의 속을 채울 차례인데,

-......

 녀석의 속은 시커멓다. 이건 뭐 뚜껑을 열어보나 닫아놓으나 똑같이 까맣기만 하니, 네놈은 도대체 쌀을 어디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란 말이냐, 하고 철판 낯짝 같은 말만 늘어놓았다. 이런 말을 퍼부어대면 이 녀석도 열 받아서 슬슬 끓어오르겠지. 하지만 배고픈 나머지 자는지 혼절했는지 아무 반응 없이 여전히 차가움. 쳇. 마지막 수단으로, 일부러 깨우려고 딸깍 소리가 세게 나도록 눌러 닫았지만 결국 무시당하는 건 이쪽. 할 수 없이 오늘도 기름에 튀긴 웨이브머리의 구원을 받아야겠다. 겉만 멋들어진 금빛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넣었다. 레버 찰칵. 찰칵. 찰칵. ?

-오늘 액땜하는 날인가......

 하필 이런 날 또 가스가 다 될 건 뭐냐.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은 하나다.

-콰직.

 가스가 다 된 순간 녀석의 운명도 절명. 벽에 처박혀서 뭉개진 걸 다시 들어 올려서 쥐어뜯었다. 작은 봉지 두 개 중 하나는 쓰레기통 직행. 정상적인 계획대로였다면 죄다 써먹었을 텐데. 남은 봉지를 뜯어서 붉은 가루를 쏟아 넣는다. 생각해보면 이게 인간이 먹을 것이냐. 듣도 보도 못한 온갖 화학재료들이 뒤섞인 혼합 결정체. 오늘 웨이브 녀석 염색 좀 하겠구나. 그럼 염색약을 씹어 먹는 꼴이 되는 건가. 혀가 마비되는 붉고 짭짤한 염색약. 뜯어진 입구를 봉쇄하고 마구 흔들어댔다. 통과의례. 염색약 이름은 아마도 Monosodium Glutamate.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일했던 공장 건너편에 스프 제조 공장이 있었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는 예상하고 있던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 코를 공격당하는 느낌. 소금기가 배인 매캐한 매연. 숨을 참느라고 꽤나 고생했는데, 지금은 그 결과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키려 들다니. 연산바퀴가 데굴데굴 구르다가 사고의 벽에 부딪힌다. 급정지. 충돌여파는 지진파처럼 퍼져나가서 손가락을 흔들어놓는다.

-파악. 

 자비 없이 놓쳐버리는 비닐. 부서진 웨이브들은 시뻘겋게 염색약을 뒤집어쓴 채 바깥으로 튀어나와 널브러졌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직접 팬에다가 구워줄 걸 그랬나. 빌어먹을 과대망상 덕분에 칭얼대는 위장을 달래주긴 글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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