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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22:22

10. 01. 19. 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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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푸르스름한 저녁과 밤의 사이. 달력은 1월의 끝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지만, 오늘 바람은 그다지 차갑지 않다. 마치 한 가을날의 공기처럼. 선선하게 눈과 코의 뒤쪽을 지나쳐서는 텅 빈 내부를 꽉 채운다. 가볍게 풀리는 긴장. 다시 하얗게 산화해 흩어지는, 바람. 문득 고개를 들었다. 7,8층 정도의 높이쯤으로 보이는, 하얀색 창고. 지붕 위를 몰래 슬쩍 넘어가려는 초승달. 넘실거리는 하늘보다 더 진하게 푸른 구름. 크게 숨을 뱉어내려다 소리만 되삼키고는 공기만 후우ㅡ하고 조심스럽게 내보냈다. 깨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고요함, 같은 것을 느꼈다. 고개를 내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또 다른 건물은 무심한 듯 가로등만 껌벅거렸다.

 창고 뒤쪽 벽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벽이 거의 끝날 때쯤 되어서야,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밟는 부분을 따라 눈을 먼저 올려 보냈다. 사다리는 점점 철길처럼 작아지더니 한 점으로 사라졌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든 모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사다리의 양 기둥을 붙잡고 발을 올려놓았다. 오늘따라 미지근한 공기조차, 굳건한 사다리의 절개-금속의 자존심 같은 것일까-를 굽힐 수는 없었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아서 손이 사다리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오른손과 왼손은 사다리의 냉랭함에 질색해서는 서로를 재촉했다. 손과 발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그저 다음 잡을 곳 디딜 곳과 하얀 컨테이너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이런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봤다간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것도 ‘양손을 번쩍 들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잠자코 벽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주변은 더 빠르게 푸르스름해지고 있었다. 빛들은 오르는 만큼 가라앉고 있었지만 소실점은 그대로 멀었다. 몸은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다. 중력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다. 지금 중력이 앞쪽으로 90도 기울어진다면 어떨까. 아마 기어가는 상태가 되겠지. 그럼 편할까.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영원히 평행하게 되니까. 올라가는 것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니까. 게다가, 멀쩡히 두 다리를 두고 엎드린 채로 사다리 철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도 웃기지 않나? 혼자 태평하게 망상 속에서 크크 거리던 의식을 현실로 붙들어온 건 손들이었다. 소실점이 잡혔다. 그와 맞닿은 부분이 있기에, 그곳을 짚고 올라섰다.

 뭔가를 짚긴 짚었는데, 그게 뭔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빛들이 가라앉는 통에 하나 건져오지 못한 것도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온통 파랬다. 하늘은 꽤 어두워졌지만 아직도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고, 지금 밟고 서 있는 곳도 죄다 하늘을 빼다 박은 색이었다.

 ㅡ아니, 아마 하늘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방향을 잃고 말았다. 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넓디넓은 공간 한 가운데에서 미아가 된 셈이었다. 나름대로의 길을 잃었을 때의 수칙.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구조대를 기다려라. 하지만 아무리 죽치고 기다려봐야 헬기는 고사하고 별빛조차 시치미 뗀다. 하늘바닥은 차가워서 그냥 주저앉기는 뭐하고, 급한 대로 구름을 한 장 걷어 깔고는 그 위에 앉았다. 후우ㅡ. 다리에 힘이 빠지자 긴장이 풀어지면서 뜨거운 공기가 토해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심장은 헉헉대고 있었다. 이제야 발견하고는 조금씩 진정시켰다. 아마 손발이 많이 움직인 탓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낯선 공간에 들어왔을 때 들이닥치는 정보는 무지막지하다. 타일러줘도 진정되는 데는 좀 걸리겠지. 위를 올려다보았다. 달은 여전히 멀었다. 아니, 멀어진 게 아니라 단지 간격을 맞추고 있는 것뿐이다. 아마 당장 코앞에 있다면 움켜쥘 지도 몰라. 근데 뜨거운지도 차가운지도 모르고 그랬다간 손을 데어 버렸든가 동상에 걸렸든가 그랬겠지. 그게 아니라면 초승달은 날카로우니까, 그 끝에 찔리면 아플 거야. 자칫하면 결코 나아지지 않을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지. 달이니까. 달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멀찌감치 물러나서 둥둥 떠다니고만 있는 걸 거다. 하지만ㅡ온통 푸르게 변해버렸음에도, 왜 익숙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걸까. 분명히 어디에선가 가본 적이 있는-아니면 ‘잠겨 본 적’ 있는-공간일 것이다.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너뿐이고, 여기 이렇게 한 가운데 빠져서 조금씩 앉은 채로 희미해져 가는데, 완전히 흩어져 버리기 전에, 그 전에 잠깐만이라도 가까이 와줄 수는 없을까. 데어버리든 얼어붙어버리든 찔려버리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의 사다리를 더 기어서, 하늘을 더 올라서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게 될까. 아니, 가까워질 수 있을까. 헛되이 공기만 휘젓는 손가락은 이미 너를 붙잡았는데, 데지도 않았고 얼어붙지도 않았고 찔리지도 않았다. 근데 왜 일어설 수 없는 걸까. 나는 앉아있고, 너는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이 나인지 아닌지는, 어느 쪽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바라보고 있고, 네가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ㅡ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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