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조회 수 425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스크롤  주의.

엄청나게  깁니다.

-----------------------------------------

 

소녀와 소년은 만났다.

 

저주스러운 그 섬에서.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변할 것 없는 아침.

 

하지만 무언가가 소년의 안에서 변했다.

 

소녀와 만났다는건 그런 것이었다.

 

도망쳐온 과거가 그를 따라왔다.

 

그것도, 자신의 모든것을 버렸을때에.

 

가문도, 돈도, 명예도, 가족도 없다.

 

그런 때에 나타난 과거는... 단순히 잊고 싶은 짐일 뿐이다.

 

"후우, 일단 학교부터 가자."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새벽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날자는 3월 1일.
개학식 날이다.
방금 전까지 좁디 좁은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그는 냉장고를 뒤적거려서 후레이크와 우유를 꺼냈다.
80L 냉장고라 냉장력이 떨어질까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신 제품이라 그런지 기분좋은 서늘함이 손에서 느껴진다.
선반을 뒤져 적당한 크기의 그릇을 꺼내어 후레이크와 우유를 붓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격렬하게 뒤섞이는 후레이크와 우유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이내 한숟갈을 푹 퍼선 입 한가득 후레이크를 문다.

 

우적 우적...

 

조용한 방에 후레이크가 부숴지는 소리로 가득하다.
견디기 힘든 적막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
당장 컴퓨터도 하다못해 라디오나 MP3조차 없는 그였기에, 이 조용함을 달랠 물건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저 이 조용한 공간에서 삭막하게 후레이크 소리만 울리고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새벽 5시.
원래 아침 10시 까지 가면 되니 상당히 느긋하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도 관성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가면 다른 층에 전부 한번씩 멈춘다고 해도 약 30분 전후.


최 하층이라 참 좋은것이 처음 엘리베이터에 타게되는 거라 평상시 잡긴 힘들어도 학교 갈때 조금 일찍 나와서 버튼을 눌러두면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참에 기숙사의 엘리베이터에 잠시 예기해보겠다.
엘리베이터는 각 기숙사-초, 중, 고, 대학교 기숙사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엘리베이터는 원기둥처럼 생긴 중앙 로비에서 양 옆으로 난 로비 입구를 제외하고 원을 둘러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로비의 크기가 조금 크기 때문에 각 반원당 엘리베이터 대수는 24대.
도합 48대가 운영되고 있다.

 

화장실에서 식기를 세척한 선현은 교복을 차려입는다.
학교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학생 선도에 편의를 두고자 각 건물 별, 구역별로 교복이 다르다.
그러니까, 초 중 고의 제복이 다른건 물론이고 이과, 문과, 예능과별로 교복이 다르다.
이과에 다니고 있는 선현은 늘씬한 정장바지에 블레이져형 셔츠와 조끼, 마이로 구성된 교복이다.
색 배치는 흰색과 검은색 뿐으로 꽤나 딱딱하지만, 이것 나름대로 이과생 같은 분위기다.
아니, 이과생을 위한 옷이다.
이대로 연구소에 들어가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음,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는 선현.
일단 잠시 그의 신체스팩 일부를 말해주겠다.
키 173cm에 몸무게 55kg.
다이어트에 신경을 써야 할 여성이라면 적개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다.
거기다 교복이 신세대를 위해 묘하게 라인을 넣어서 몸의 굴곡이 잡히는데...
좋게 말해서 마른 남자처럼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자같이 생긴 여자애가 남자교복 입은 분위기다.
아니... 정말 나쁘게 말하면 OL같기도 하다.

 

"아... 한치수 높게 살걸 그랬나?"

 

이건 오답이다.
이렇게 라인이 들어간 옷이 치수가 높으면 봐주기 힘든 꼴이 된다.
차라리 여자처럼 보이는게 나을 정도로.
책상과 침대 사이의 공간에 지상의 가구샾에서 사온 무미건조한 장식의 거울에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본다.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은 더벅머리와 원래부터 좀 선이 얇고 부드러운 얼굴, 비쩍마르고 호리호리한 몸. 애매하게 드러난 굴곡이 합쳐지자...
그냥 '여자'다.

 

"아아... 살이라도 찌워야 하나?"

 

솔직히 선현의 몸은 찌울래야 더 찌울 수 없었다.
마른 몸의 곳곳에 필요 이상으로 개발된 작은 근육들이 필요 이상의 지방이 축척되기 전에 혈관 내 당분을 전부 소모시키기 때문에 지방으로 바뀔 당분이 없었다.
거기다 꾸준한 검술 수련이 그 다음 이유라고 하겠다.
마르긴 했지만, 극도로 군살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몸에 대한 불평사항은 여기까지.
오늘 학교에 나가기 위해선 결심을 다져야만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아침이다.
자신의 옷이 여자처럼 보인다는 것으로 고민할 틈이 없다.

어차피 개학식이니 가방은 장식 이상의 물건이 아니다.
모든 교과서는 우편물로 배송되니까, 아마 고지물을 챙겨올 용도 정도만 될 것이다.
혼자서 궁상 떠는건 여기까지.
밖으로 나가자.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옆으로 열리는 자동문이라면 참 SF적이고 재밌을테지만 안타깝게도 락이 전자식이라는 것만 빼면 평범한 기숙사 문이기에 문고리를 잡고 돌려서 민다.
복도는 삭막 그 자체, 비록 문은 수동이지만 복도만큼은 조금 넓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SF만화나 소설에서 나올법한 우주 전함의 복도 같은 풍경이다.
복도 좌 우 상단의 홈을 따라 직선으로 배치된 LED등이 내는 밝은 빛에 잠시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이 LED등의 묘미는 바깥 날씨에 맞춰 밝기가 바뀐다는 점 정도다.
기숙사 최하층 로비로 향하기 위해, 이 삭막한 복도를 멍하니 걷기 시작하는 선현.
이 최하층은 방이 비어도 학교에 가기 힘들어 잘 들어오지 않는 구역이라 아무리 새벽이라곤 해도 인기척이 드물다.


있다곤 해도..

 

"쉿,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고? 타냐의 에로에로한 목소리..."
"아잉! 몰라..."

 

같은 밖에서 대놓고 할 수 없는 일을 하기위해 구석진 곳에서 몰래 일을 처리하거나 어디선가 키를 주어와선 주인없는 방에서 일처리를 하려는, 그다지 좋지 못한 목적의 모임이 많다.
아무래도 일단은, 최 심부니까 말이다.
하지만 말이지.

 

"다 들리니까 좀 자제 하라고."

 

굳이 들리게 말할 필요도 못느껴서 혼자서 씹어뱉듯이 중얼거리곤 서둘러 로비로 향하는 선현.
로비에 도착하자 아직 학교로 가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두세대 정도다.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고 치고, 지하 20층에서 지상까지 약 30초.
관성 엘리베이터라 한번 탄력이 붙으면 꽤나 빨라진다.
엑스포의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침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중 한대가 최하층에 있기에 버튼을 누르고 탑승한다.
뭐랄까...
정상적인 엘리베이터 였다면 참 좋겠지만, 안에는 정원수에 딱 맞는 약 3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선현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선현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생긴 틈으로 누군가가 구타를 당하고 있는 한참이란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은 티가 너무 나니까 때리지 않았는지, 적당히 반반하지만 그렇다고 '잘 생겼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남학생 하나가 몸을 웅크린체 엘리베이터 바닥에 누워있었다.

 

"음, 나는 신경 끌테니까 알아서들 하쇼."

 

선현이 할 말은 딱 그것 뿐이었다.
어차피 당하는 것도 보통 알고보면 이유가 있다.
물론 이런식으로 괴롭히는건 좋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후사정도 모르고 끼어들었다가는 피보는 수가 있기에 선현은 일단 조용히 엘리베이터에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학생들은 스스로 떠나주는 사신을 붙잡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아놔 이런 X... 개학식 날 부터 뒷작업이 걸리다니. 야, 보초 어디갔어! 이자식 다음에 걸리면 죽는다."
"야, 저거 쫄아서 간대잖아 내비 둬."
"하! 쫄아서 간다고 끝이냐? 앞에서만 저러고 선생한테 꼬불친 녀석 때문에 한녀석이 지원금 한차례 끊겨서 부모한테 걸리는 바람에 지금도 병신같이 지내는거 못봤어?"
"어휴,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기집애', 여자니까 살살 대해줄게."
"야, 저게 어디가 여자냐? 딱 보니 남자네."
"음? 그런가 하하하! 비실비실하니 때릴데도 없어보여서 여자앤줄 알았는데 남자애면 좀 때려도 버티겠지?"

 

자기네들끼리 잘도 논다.
누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이라도 누르고 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도 않았고, 선현은 거의 '저것들 병신 아니야?'같은 눈으로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근데 저자식 아까부터 야리는데?"
"어쭈? 죽을려고 저게...!"

 

가장 엘리베이터 문과 가깝던 녀석 하나가 선현에게 뻗은 순간, 그들의 운명은 결정났다.
아니, 안그래도 '기집애'발언으로 조금 혈압이 올라가 있던 그였기에 운명이 결정난건 조금 전이었다.
단지 손을 뻗은 남학생이 기폭제가 되었을 뿐.
어차피 대충 훑어본 결과 무예의 소양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들 뿐이라 선현은 적수공권으로 손을 뻗어오는 듬직한 체구의 남학생에게 쇄도한다.
뻗어진 손을 살짝 몸을 낮추는 것 만으로 회피해낸 선현은 오른쪽 어깨를 마치 죽여주십시요 하고 떡하니 내놓은 팔의 손목에 걸치고 왼손으로 고정시킨 뒤, 오른손으로 팔꿈치를 올려쳐버린다.

 

"으... 으아아악?!"

 

우두둑 하는 시원 섬칫한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녀석의 팔이 조금 위로 접어졌다.
무예의 소양이 없으니 상당히 많이 봐 준 것이다.
선현은 분별할 줄 아는 착한 악마니까 말이다.

 

"병신, 저런 비실비실한 것도 제대로 처리를...... 컵?!"

 

아까 전부터 비실비실하고 예기를 꺼내던 남자놈의 턱을 올려쳐버린 선현.
녀석의 입이 닫히자 좀 살것 같은 기분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녀석의 명치를 후려친다.

 

"우게엑...?!"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제대로 힘이 가감된 일격이 명치에 꽃히자 녀석은 간신히 비명만을 지르고 바닥에 엎어져선 아침을 안먹었는지 위액을 게워낸다.
그 둘을 시작으로, 1 vs 29(27)명의 전투가 본격화되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엘리베이터가 시끄럽게 쿵광거리는 것 때문에 제보받은 지도교사가 달려왔을땐, 29명의 중상자들이 엘리베이터 바닥과 입구를 매우고 있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지상통로를 통해 가기로 결정한 선현은 중앙통로로 향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길은 참 다양해서, 마치 복층으로 된 지하주차장 처럼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보통 근력이 좋지 않고서는 자전거로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경사이기 때문에, 오토바이나 도보로 느긋하게 등교하는 학생들이 애용한다.
아, 참고로 고등학교 부터는 '교통 학생회'주관의 인성시험과 필기시험을 통과하면 학생용 50cc급의 전기엔진 2륜 자격증을 얻을 수 있다.
도보로 올라가기 위해 경사길에 발걸음을 딛는 선현은 자꾸 뒤에서 들러붙는 남학생 때문에 골치였다.


이름은 '조 현찬'이라고 했고,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 1학년, 즉 신입생이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로엔섬의 토박이라 초등학교부터 중 고등학교를 모두 로엔섬에서 지냈다는게 달랐다.

 

"누워 있었다면 지도 교사들이 수거했을텐데 굳이 움직이는 이유는 뭐지?"
"......"

 

엄청나게 구타당해서 전신이 땡길 텐데도 묵묵하게 들러붙는게 짜증나서 확 때리려고 할 때마다 아픔을 불사하고 번개같이 거리를 벌리기를 몇번, 이제는 포기해버린 선현은 한마디 툭 던져보았

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서 씁쓸하다.
선현은 결국 자신의 생각도 정리하기 힘들게 되어버리자 짜증이 솟구치려는걸 억누르고, 삭막하기만 한 통로를 서둘러서 걸어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조금 빠른 보폭으로 걸어서 약 7분을 투자한 결과 지상 1층에 도착한 선현은 어느세 현찬이 보이지 않자 편한 마음으로 '휴대폰'처럼 생긴 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쿼드 프로세서로 돌아가는 빵빵한 최신폰이 아닌 싱글 프로세서인 구시대의 물건이지만, 과거를 정리하면서 친구도 전무하게 된 터라 크기가 작은 것 하나때문에 쓰고있는 그것.
밤 하늘이 수놓아진 액정에 흰색으로 8시 47분이 떠있다.
교문 개방까진 23분, 개학식 까지 1시간 23분에서 1시간 43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지하 쉘터를 겸용하는 지하 기숙사의 특성상 출구는 마치 옛 지하철 입구처럼 삭막하기만 했기 때문에 일단 도보 입구에서 벗어난 선현은 학교로 향하는 김에 조금 돌아가는 길로 걸어가자고 생각

했다.

 

선선한 바람이 일품인 아침이었다.
막 뜨기 시작한 해가 높게 솟아오른 기숙사 건물 틈세로 보이는 거대한 고등학교 교사 위에서 빼꼼히 윗부분만을 로엔섬에 드러내고 있기에 어쩐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뭔가 벅차오른다는 느낌의

맑은 아침.
꿀꿀한 기분은 털어내자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린 선현은 학교 주변, 그리고 도시 전체로 연결되어있을 도보 밎 자전거 도로를 따라 주욱 걸었다.
도로의 정비는 꽤나 잘 되어 있다.
어디하나 깨지지 않은 깔끔한 적갈색 아스팔트로 된 8차선 자전거 도로와 도로의 양 옆으로 우레탄으로 된 도보용 도로, 그리고 그 옆으로 환경적인 미화를 위해 나무나 화단이 있는 도로라서, 여학생

들은 일부러 걸어서 등하교 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학생 전용의 오토바이들은 전부 전기 오토바이라 죽어가는 식물은 보이지 않아, 현대의 도로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 일 것이다.

 

저 멀리 위용있게 서 있는 이과동이 눈에 들어온다.
학교의 구성은 총 세개의 건물로 이루어져있다.
도시섬과의 가교가 놓아진 게스트 하우스, 그것은 학구 최 서북단에 있다.
게스트하우스는 거의 축구장 다섯개는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학구용 국내선 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 높이는 74층에 달하며,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되어있다.


남단의 문과동, 이것은 북쪽을 기준으로 한 지도를 보면 가로로 긴 건물이다.
해변이 환히 보이는 넓직한 건물에선 학구열이 솟아날대로 솟아나는 그런 건물이다 섬 남쪽 부분을 대부분 차지하는 그것은 어떻게보면 해안의 거대 리조트같기도 하다.


그리고, 북동쪽.
섬을 관통한 열대 우림과 강이 보이는 천혜의 자연이 가까이에 있는 이과동.
지상 부분은 초,중,고등 교육을 위한 건물로 도합 60층에 이르는 높이에 지상 면적은 축구장 다섯개로도 채우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
이 거대한 건물은 건물 내심을 따라 순환하는 모노레일과 관성 엘리베이터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내부는 '전기 이동수단'도 허가하고 있으며, 각 층별로 순환하는 버스가 존재한다.
이 거대한 구조 때문에, 학급의 수업은 각 학급단위별로 나뉘게 되어있다.
약 20개의 반과 실험동, 실습동 등으로 하나의 학급단위가 나오며, 보통 층계별로 등교시간이라던가 하교시간이 다르다.


또한 학교라는 곳은 초,중,고,대 가릴 것 없이 학점제로 운영된다.
알아서 학점만 따면 졸업과 진급이 보장되어있다.
그리고 학점제로 하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들 같은 어린 아이들의 장학금을 위한 제도로, 얼마든지 대학교 이상 랭크의 장학금을 탈 수도 있고 그렇게 타서 생활하는 부자 아이들도 있다.

 

어찌됐건,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게스트 하우스의 입구에 걸려있는 거대한 분반표 홀로그렘 앞에 선 선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 홀로그렘 프로젝터에 끼어든 모종의 동영상 때문이었다.


싸우고있는 누군가.
1:29(27)로 전투를 펼치면서도 기계적으로 자신의 신체 벨런스를 무너뜨리지 않고 싸우는 료우츠키식 무술의 응용판.
그것이 펼쳐지고 있는 동영상이 무려 분반표 홀로그렘을 해킹해서 보여지고 있다.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 동영상이 뜨기 전 까지만 해도 서로 같은반인지 가까운지에 대해 즐겁게 예기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싹 굳는다.
마치 모세의 기적이 이런 것이었을까?
선현을 기준으로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갈라선다.


그 인파를 못마땅하게 보던 그는 잠시 뒤 영상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히 분반표를 확인한다.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은 최 상층부[약 40층 부터 60층까지의 부분]의 A-19Fa.
최상층부 첫층인 40층에서 19번 구역의 학급단위 F의 a반이라는 복잡미묘한 글이다.
이렇게 나뉘는 이유는 층당 10만여명에 달하는 인구 때문에 그렇다.


각 학년당 1천명,

이 말도 안되고 웃기는 학원의 설립자 로엔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그 대사를 곱씹어보며 로엔도 함께 잘근잘근 씹어본 선현은 일단 마침 눈 앞에 보이는 만원 직전의 관성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앞에 학생들이 있는데도 갑자기 문이 닫혀버린 관성 엘리베이터가 상승을 시작했다.
아마도 타이밍을 못 잡은 것이라 생각한 그는 다른 관성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순식간에 문이 닫혀버리는 그 엘리베이터들을 보던 그는 결국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모노레일은 건물 순환선 같은 경우 특정층에 정지하지 않고 직행하는 직행 모노레일과, 전 층을 순환하는 순환 모노레일로 구분된다.
마침 최상층 모노레일이 플렛폼에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선현은 걸음을 옮겼다.
모노레일은 매끈한 유선형 스타일로 메뚜기같은 엷은 곤충의 몸을 거꾸로 뒤집은 것 같았다.
물론 징그럽게 벌레의 모습을 닮았다거나 하진 않았다.(그랬다간 특정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할것이다.)
직행열차의 경우 이용자가 편중되기 때문에 3량이 전부이며, 1량당 횡렬 종대로 한줄당 10좌석씩 도합 20여줄이 들어있다.
이 모노레일은 정차하지 않는 구간은 시속 230km/h, 정지하는 구간이 있을시 최대시속 130km/h를 내는 무시무시한 철덩이다.
레일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하면, 건물이 워낙 크다보니 건물 안쪽과 바깥쪽을 도는 두가지 종류로, 보통 바깥쪽의 순환선 같은 경우 고소공포증 환자는 잘 이용하지 못한다.

어쨌건 대충 그정도 크기인 레일에 탑승하기 위해 움직이자, 사람들이 주춤주춤 레일에서 물러나더니 이내 한 칸이 전부 비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절반정도가 그 레일에서 떠났다.
나머지 절반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선현을 쳐다보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출발하고, 느긋하게 등 가속도 운동을 시작한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던 그것이 230km/h라는 속도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가속시간은 도합 5분.
느긋하게 관성을 실어가다가 특정 속도를 돌파하면 최고속도로 가속한다.
학생들은 요즘 지아철이 100kn/h에서 정차하기 위해 70km/h로 브레이크를 거는 제동력 정도의 반동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주변 광경은 휙휙 지나가고 있다.
고속 열차용 경사레일을 따라 바닥의 일부를 보며 나선운동을 하며 올라가던 열차가 수평을 되찾으며 속도를 낮춘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38층 즈음에 도달하였을 때였다.
열차의 진행방향 천장에 달려있는 속도계가 231km/h에서 순식간에 120km/h까지 감속한다.


느긋하게 올라가기 때문에 주변 경관이 확연히 보인다.
마치 짓고있던 바벨탑처럼, 하늘에 가깝게 다가가있는 40층의 경관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바다 한 가운데 높게 서 있는 40층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라고 해봤자, 한쪽의 도시섬의 장관과 장엄하게 펼쳐진 바다 뿐.
아, 이것만으로도 마치 어디에서 쉽게 얻을 수 조차 없는 엄청난 장관이지만, 앞으로 질리도록 볼 광경이 장관이라고 하기엔 조금 그렇겠지.
하지만, 선현은 마음 한켠에서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남은 학창생활을 보낸다는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옥같을지도 말이다.
열차가 40층 65구획의 플렛폼에 도착하고 도어가 열리자 누군가가 해킹을 해도 제대로 한건지 이곳에마저 동영상이 떠돌고 있다.


이래서야 악질적인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는 '저거 뜨려고 일부러 돈을 먹인거 아닌가?'하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이렇게 되면 그 빌어먹을 '조 현찬'이라는 녀석을 묻어버려야 할 것이다.
아마, 그녀는 저런 화상으로 날 보는 것 조차 싫어할테니까.

마침, 기분 좋게도 그 '조 현찬'이 자신의 반에 가려는건지 내부 순환형 모노레일을 타고 막 65구획 플렛폼에 들어섰다.
아아, 선현은 여지껏 이렇게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짜증이 난 순간 풀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조용히 녀석의 멱을 잡은 그는 한쪽 구석으로 질질 끌고갔다.
처음에 영문도 모르고 옆에서 튀어나온 손에 의해 끌려가던 녀석은 정신없던 와중에 선현을 알아보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뒤이어 녀석을 높게 치켜세운 선현은 녀석의 숨통이 막히건 안막히건 상관치 않고 심문을 시작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방송을 내보낸거냐?"

 

그 질문에 현찬의 머리는 깨끗하게 한번 비어버렸다.
어째서냐면, 일단 난데없이 멱살을 잡아 올려져 정신이 없는데 거기다 갑자기 방송에 대해 질문받으니 뇌에 산소가 잘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생각하다가 뇌가 빈혈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다.
그 와중에도 그는 쥐어짜듯이 말을 뱉어냈다.

 

"아, 너.. 너무 고마워서 그냥..."
"그게 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말인가?"
"그게.. 무.. 묻고 싶 컼.. 었지만...."

 

더 이상하면 현찬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멱살을 천천히 내리며 그를 내려준 선현은 그의 힘이 다 빠진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손을 놓아버린 선현.
그와 동시에 현찬의 몸이 무너져내린다.

 

"그게.. 묻고 싶어도 무서웠어서.... 그것 뿐이야."
"다신 그러지마. 그리고 당장 방송을 멈춰."
"...미안! 저건 내 작품이 아니야, 분명 부탁한건 나지만..."
"하긴, 네게 저런 대단한 일이 가능했다면 너는 그렇게 괴롭힘 당하지 않았겠군."
"...."

 

아픈곳을 정통으로 찔린 듯 얼굴을 구기는 현찬에게 일말의 동정심은 들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현은 그저 묵묵히 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건, 동기인 리키가 한 일이야. 리키 로! 그 아이에게 부탁했어, 그 뿐이야."
"그렇군. 그럼 그 아이에게 그만두게 연락해."
"무리야! 그녀석 핸드폰 안갖고 다니는걸!"
"그럼, 그만두게 해야지. 앞장서."

 

선현은 날카롭게 날이 선 얼굴로 그를 앞장세워서 걷기 시작했다.

 

-side by 그녀.

 

그녀, 소우레츠 유우코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이 마치 자신의 전부인 것 처럼, 혼백이 빠져나간 것 처럼 올려다보고 있다.
그 끝에 무언가를 보려는 듯이 올려보던 그녀를 방해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흰 테그가 붙혀진 검은 가죽을 모방한 비닐제질의 판.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그녀의 이마를 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현실로 돌아온다.

 

"유우코, 방과후 남아있도록."
"아하하하!"
"큭큭..."
"아....? 아.... 앗?!"

 

내려친 것은 다름아닌 출석부, 그것을 휘두른 사람은 사람 좋게 생긴 그녀의 담임선생님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다시 입학 안내서를 내려다본다.
내려다 보지만 집중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 혹은 필연.
비슷하지만 다른 그 단어들의 조홥과도 같은 일이다.
그건 그녀가 막 문과동의 레일에서 하차하였을 때였다.
홀로그렘들이 일그러지는 가 싶더니 드러나는 남학생들의 모습.
약 30여명의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마른 체격의 남성.


그다.
역시 저번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악몽이 쫒아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불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복잡 미묘한 기분.
잊겠다고 마음 먹었음에도, 어쩐지 그 장면이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보고 있으면서도 책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무려 종례시간이 끝나있었다.

 

'거짓말....!'

 

학우들은 이미 짐을 대충 챙기고 교실을 나가고 있었다.

 

"아, 아앗...?!"

 

허둥지둥 펼쳐져있던 안내서를 덮고 황급하게 그것을 책가방에 쑤셔박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멋들어지게 의자와 책상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발이 걸려 넘어진다.

 

"으... 꺄앗?!"

 

쿠당탕! 거친 파열음이 들리며 소녀가 넘어졌다.

 

"아.. 아파...!"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엉켜 넘어진 책상을 슬쩍 밀어두는데, 시야에 누군가의 다리가 들어온다.
단정한 단화, 늘씬하게 빠진 다리, 허벅지 위로 조금 줄인것이 티가 나는 스커트, 그리고 그 위로 몸에 들러붙게 줄인 타이트한 블레이져 교복, 적당히 볼륨감 있는 가슴, 귀염성 있는 얼굴과 윤기있는

단발.

 

"아하핫, 너 천연이구나?"
"천연...? 잘 모르겠지만 자주 들었어."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뻗어온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붙잡았다.
힘있게 잡아준다기보단, 그저 뻗는다는데 의미를 둔 손이었는지 유우나가 잡은 상대방의 손에는 힘이 크게 들어가있지 않았다.

 

"난, 류 화연. 일단 중국계 한국인이야."
"화연이구나, 나는 소우레츠 유우나. 잘 부탁해 화연."

 

환하게 웃어보이는 그 얼굴에 유우나 역시 밝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두 사람은 일단 사람들이 전부 떠나기 시작하는 학교에서 나와서 게스트하우스를 거쳐 시가지로 향했다.
일단 지하까지 내려가는 산악열차형 구내 열차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일반 산악열차처럼 톱니 이빨 바퀴로 가는것이 아닌, 모노레일형 열차의 고속감을 차창 바깥의 풍경으로 맛보며 즐겁게 담

화를 나눴다.
평소 취미-유우나는 독서나 주식, 화연은 농구와 축구였다-라던가 이상형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고 있자니 모노레일 funicular가 천천히 지하 5층의 모노레일 정류장에 멈춰선다.
이곳은 지하라는 강점을 이용해 초전도 터널을 이용한 마하 4의 전투기 속력으로 내달리는 모노레일의 정류장이다.
거의 '발진'에 가깝기 때문에 모든 시트는 충격흡수 처리가 되어있고 방향이 모두 전방으로 향해있으며, 게스트하우스, 기숙사, 이과동, 문과동을 순환한다.
(마하4-음속의 4배. 365km/h X 4 = 1460km/h)


순간가속 100km/h짜리 이 괴물은 동굴 전체에 설치된 초전도 코일에 의해 가속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플렛폼에 열차가 들어와있는걸 확인한 두 사람이 재빨리 열차 안에 뛰어들어감과 동시에 개폐문의 고정나사가 회전을 시작하더니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하며, 맑은 벨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예쁜 목소리의 안내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본 열차는 지금을 기해 역으로부터 발진합니다, 착석하지 못한 승객께선 좌석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알려드립...]

 

무려 '발진'이라는 대사가 절로 나오는 기차다.
솔직히 이정도로 빠르면 '발진'이 맞을 것이다, 거기다가 발차 시퀸스도 그렇고..

 

[각 차량 폐쇄점검 완료, 케터펄트 및 차량 자기장 올 그린. 발진 시퀸스에 들어갑니다. 10... 9... 8... 7... 6... 5... 4... 3... 2... 1.. 케터펄트 발진.]

 

마치 부드러운 진흙위에 떨어져 위에서부터 무언가가 부드럽게 누르는 느낌이 전신에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안정을 되찾는다.
속도계는 마치 어딘가의 펀치머신의 숫자가 마구 올라가다가 멈추는 숫자들처럼 화려하게 상승한다.

105.. 180... 260... 345... 마하1... 마하 1.7... 마하 2.5 마하 3.2 마하 3.9 마하 4.2.

삽시간에 마하 4의 속력에 진입하더니 30초뒤 천천히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 이유는 전투기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대한민국 상공을 건너는데 전투기가 가속하면 약 5초 정도면 지나간다.
이 열차가 마하 4를 찍는 순간, 이미 감속을 시작하지 않으면 역을 지나치고 벽에 부딪히기밖에 안하기 때문이다.
속력계는 오를때와는 다르게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해서 그 속력계가 40km에 다가갈 때 즈음 열차가 지상으로 나왔다.
일반 전철이 짧은 구간을 달리는 속도라 옆을 지나다니는 전기 오토바이와 사이클들이 비슷하거나 느리게 달리고 있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플렛폼에 시야가 방해받자

아쉬운 미소를 교환한다.
직후 플랫폼에 내려서면 정면에 바로 보이는 플랫폼 반대편에 외부로 나가는 열차가 들어와있는 것을 보고 탑승한다.
그것 역시 방금전에 탄 열차와 큰 차이는 없이 지하로 파고들어가서 초전도 코일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통과한 뒤, 지하의 역에 정차한다.
플렛폼에서 따로 역으로 나가는 것 없이 플렛폼이 역 역활을 하기 때문에 플렛폼 중앙의 관성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체크아웃 후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보통 가득 차 있다.
학생만 7천만에 달하는 학구의 유동인구는 그만큼 장난이 아니다.

 

"화연아 어디로 가고있어?"

 

유우나는 자신의 블레이져 교복 치마가 살랑거리는 것에 신경쓰며 거침없이 걷고있는 화연에게 질문했다.
이제 막 해가 머리 위에서 조금 빗겨나가기 시작하는 정오 무렵, 개학식이 끝나자마자 해산했기 때문에 시간은 많았다.

 

"일단 배부터 채워야 뭔가 할 수 있겠지?"

 

화연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가락의 끝에는 각종 요리집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페밀리 레스토랑'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 유우나는 '설마, 겨우 페밀리 레스토랑 때문에 이만큼이나 걸은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화연은 유우나의 손을 이끌며 페밀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단조롭게 생긴 똑같은 탁자와 의자가 여러개 반복배치된 극도로 심플한 내부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여기가 또, 의외의 명소라서."

 

찡긋 하고 유우나에게 윙크를 보낸 화연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 햄버그 스테이크 두개를 시켜보였다.
곧이어, 그녀가 어째서 이 레스토랑이 명소라고 하는지 알려주려는 듯이 거의 5인분 밥솥 크기의 입에 넣기 좋게 잘린 함버그가 두개, 젓가락과 함께 두 사람의 앞에 각각 놓인다.

 

"화.. 화연아, 이건 너무 커..."

 

울상이 된 유우나를 본척만척 자신의 햄버그에 행복한 얼굴로 젓가락질을 시작하는 화연.
그런 화연을 보던 유나는 반 울상으로 함버그를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겨우겨우 햄버그를 다 먹어 치웠을 즈음에는 시계가 2시 30분이 되었다.
그 직후 화연은 유우나를 이끌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첫 만남의 기념으로 내가 쏠게!"

 

자신만만하게 외친 화연은 뭔가에 홀린듯이 4시간을 신청했다.
깜짝 놀란 유우나였지만,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서 두 사람이 노래방까지 걸어 간 시간이며 잡 시간을 포함해 저녁 7시가 되어 저녁놀이 저물어 갈 즈음.
거의 반 탈진 상태가 된 두 사람은 노래방에서 나와 대로변에서 숨을 돌렸다.

 

"후.. 흐아아 질렀다... 질렀어..."
"하아.. 하아.. 이 정도로 나와 상대한 사람은 오래간만인걸?"

 

화연이 빙긋 웃으며 유우나를 칭찬해준다.

 

"에이.. 이정도가지고 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우나의 세상이 빙글 돌며 상하가 뒤바뀐다.

 

"으윽..?"
"어머, 왜 그러니?!"

 

화연이 깜짝 놀란듯 다가와 유우나를 부축한다.
하마터면 엎어질 뻔 한 그녀는 화연의 부축에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는다.
아니, 그냥 화연을 붙잡고 간신히 매달려 서 있는 것이다.

 

"아.. 아후... 모.. 모메.. 히... 미...."

 

힘이 빠져버린 혓바닥이 제멋대로 도는것을 느끼며, 유우나의 정신은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 어두워지는 시계속에 누군가의 섬뜩한 미소만이 비춰진다.

 

-side by 그.

 

시간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개학식이 끝난 직후로 간다.

 

"네가 '리키 로'인가?"
"....그렇다면?"

 

어쩐지 경계받는 듯한 목소리에 선현은 조금 움찔했다.
아니, 경계 받는 것이 당연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애가 접근하면 여자애는 자동적으로 방어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선현은 굽히는 것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부탁이야, 교내에 영상을 흘리는 것은 그만 둬 줘."
"....어째서?"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순간 귀찮아졌던 선현이지만, 인내심을 갖는다.
지금 이곳은 문과동 1층 휴게실, 가뜩이나 문과동에서 볼 일이 없는 블레이져 제복 차림의 선현이었기에 더더욱 시선집중이다.
아마도 구경꾼 중 대다수는 나를 이 소녀에게 고백하러 온 어느 머저리로 보이고 있겠지.
마치 거대한 호텔의 야외 휴게실마냥 흰색 테이블과 의자가 줄지어 세워진 이 거대한 휴게실의 총 수용 인원은 250만명.


층계식 복층구조라 위에 있으면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고 천장은 채광이 잘 되는 유리로 되어있다.
그 층계식 복층의 최 상층, 가장 작은 판 위에 있는 사람이라봐야 천 몇명 정도-이것도 많다-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이 학교에 다니거든."
"그래서?"
"......"

 

할 말을 잃어버린 선현.
그 현찬이라는 녀석은 리키의 친구였다고 하지만, 자신은 생판 남.
뭔가를 부탁하거나 부탁받을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지금 부터라도 친..."
"싫어."

거의 살벌하게 모든 부탁을 차단하는 리키의 태도에 선현은 생각이 붕 떠버릴 수 밖에 없었다.


화를 내야할까?
아니, 지금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다.
저 아이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검? 아니, 저 아이는 검과는 관계없다.
검술은 더더욱.
돈? 그건 내가 더 없을 것이다.
저 아이가 입고 있는건 교복이지만, 지금 손가락에서 돌리는 펜은 언젠가 4만 룬에 팔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결국, 그 어떤 대책도 없이 찾아왔던 무대포적인 자신의 실책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녀에게 부탁을 할 방법은 없었다.

 

"댓가로 지불할 만한 것을 찾아서 가도록 할게. 기한은 오늘 저녁 7시까지. 어때?"
"....마음대로."

 

그 말을 끝으로 리키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현찬은 허둥자둥 리키를 따라 나가버렸고, 리키가 떠남으로써 모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선현은 이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고독감을 곱씹어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면서 말이다.
돈도, 자신의 검도, 검술도 안된다면 나머지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 뿐이다.
무엇이라면 자신이 구할 수 있으면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안고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일단 돌아온 그는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무엇이라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것만이 머릿속을 빙빙 돈다.
마치 미궁속에 빠져서 출구를 찾고있는 듯 하다.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선현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미노타우르스가 자신을 잡아먹기위해 성큼성큼 돌아다니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때 시계는 이미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젠장!"

 

학구를 빠져나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선현은 초조하기만 했다.
볼보튼 11번지 3번가 빨간아가씨.
1층의 복잡한 카페는 내버려두고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응? 넌 처음 보는 녀석인데 윗층엔 무슨 볼일이냐?"
"리키 로를 보러 왔습니다."
"그래? 그녀석 남자친구냐?!"

 

갑자기 말을 건 텁수룩한 수염 아저씨의 외침이 얼마나 큰 파장이 되었던지...
카페가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불안해진 선현이 소리쳤다.

 

"그냥 거래 상대입니다!!!"
"쳇, 괜히 기대했잖아!! 이 재미없는 꼬맹아!!"

 

남자가 뭐라고 소리치건 다급하게 5층으로 뛰어올라간 선현은 아래층이 난리가 난 것을 애써 무시하며 501호실의 문을 두들겼다.
501호실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이, 5층에 단 하나있는 방인지라 그냥 5층방 정도면 될 듯 하다.
어쨌건, 얼마뒤 열린 501호실의 철문의 뒤에 서 있던 것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폴라티 만을 뒤집어 쓴 것 처럼 전신을 덮고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어서와."
"....그, 그게."
"....우유부단."

 

리키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막 생각났다는 듯한 투로 입을 열었다.

 

"10분"
"그게 무슨소리야?"

 

알수 없는 불안감이 달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선언에 선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최대한의 공작.
상술의 달인도 이정도일까?
선현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현찬에게 들었던 대로라면 '리키 로'의 해킹실력은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로, 거의 돌파하지 못하는 방벽이 없고 보지 못하는 CCTV영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그녀가 알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 될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답은, 자신에겐 너무나도 잔혹한 말이다.

 

"정말, 그걸 원하는거야?"
"둔탱."

 

리키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대문을 닫아버렸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절대 느린 속도로 닫히는 것이 아닌 대문의 틈세로 선현의 손가락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쿠득! 하는 섬뜩한 소리가 들린다.
검푸르게 부어오른 손가락은 골절 직전이거나 골절상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리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터져버린 약지에서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대범"
"내가 이 정도 배짱이 되는 인물이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터. 그래서 내게 접근 한 거잖아?"
"...."

 

리키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이 아이는...

 

"그래, 네 노예건 보디가드건 무엇이건 되어주겠어. 그러니 내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줘."
"체결."

 

제안에 대하여 허락한 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그곳에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별자리조차 나오지 않았으니 별을 읽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지금 막 국도에서 톨게이트로 이동, 별로 친해보이지는 않는 남자들,. 차량 넘버 A44G56ERTAZ. 검은 벤츠"
"고마워."

 

다음 순간, 선현의 모습은 5층에서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 없던 것 처럼, 사라진다.
그것은 그녀가 동원 가능한 모든 종류의 도시 감시 카메라로도 감지할 수 없었다.
단지, 종착역을 알고 있으니 종착지를 조용히 지켜본다.
그렇다.
그녀는 정보의 여왕.
전자의 백기사를 거느린 여군주다.

 

24-B 고속도로.
항구에서 시작하여 수도 심부로 통하는 수송 고속도로로 큰 화물차들이 많이 다니는 탓에 승용차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고속도로.
그렇기에 이 도로를 달리는 일반 차량은 눈에 쉽게 띄인다.
덤으로 고속도로 규정 속도마저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고속으로 달리고 있으니 더 했다.

 

"이런 빌어먹을 단속반이라니! 아랫것들 어떻게 쓴거야!"
"죄송합니다 형님!"
"이렇게 된거, 마지막에 화연이 년이 넘긴 이거에게라도 화를 풀어야 겠군. 백미러 올려!"
"네.. 넵!"
"후후... 고년, 살결은 야들야들 하구나."

 

약에 취해 부들거리는 유우나가 그 벤츠의 안에들어있었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형님'이라 불리는 남자는 짐짝처럼 벤츠의 맨 뒷 좌석에 뉘여져있던 그녀를 군침을 삼켜가며 바라보다가 보조석 의자를 젖혀 공간을 만들고 뒤쪽으로 몸을 빼내었다.
뽀얀 살결과 보기드문 백은발 플라티나 블론드.
최상급 미모와 몸매.
이정도면 자신의 마지막을 마무리 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거기다 덤으로 처녀.
이 여자아이가 우는 모습까지 떠올리자 최고의 기분이 된 남자가 소녀의 옷깃을 젖혔다.

 

그 순간..


무언가가 차량의 우측에 있었다.
고층빌딩, 그 위를 질주하는 은빛의 섬광.
새... 라고 보기엔 너무 금속광이 짙다.
도깨비불? 애도 아니고 그런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은색으로 번쩍이는 그것에 운전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하는 찰나, 왼쪽 위에서부터인가 무언가 번뜩인다.
저 멀리 우뚝 솟아오른 빌딩숲의 안쪽 어디에서였을 것이다.
순간적인 번뜩임이지만 때는 밤이라 눈에 쉽게 띄었다.
그 다음순간 차 앞유리에 거미줄같은 금만 가지 않았어도 거기에 더 신경을 썼을 터였다.

 

9mm파라블럼탄으로 기스도 가지 않게끔 코팅해둔 시커먼 벤츠의 앞유리의 한쪽이 산산조각 난다.
더하여 앞창문 전체로 퍼진 균열에 의해 시계는 거의 0.
깜짝 놀란 운전수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던 헨들 덕택에 고속으로 달리던 차량의 균형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요동치는 헨들을 조절하려고 했을땐 이미 늦어, 차량의 한쪽 뒷바퀴가 둥실 들린다.
그에 뒤따라, 차량의 전체적인 벨런스가 무너지며 차가 한쪽으로 쏠려가며 점점 밑면을 위로 향하는가 싶더니... 전복.
그대로 뒤집혀져버린 차량이 고속도로를 마치 롤러카의 롤러처럼 질주한다.

 

어찌나 심하게 구르던지 차량은 구르던 힘의 반동으로 뒤가 높게 떠올랐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차창을 깨고 뭔가가 튕겨져 하늘 높이 올라간다.
처음엔 덩어리로 보이던 그것은 운동에너지가 최저가 되고 위치 에너지가 정점에 달한 순간, 사지를 쫙 펼치며 달빛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산한 은백색 플라티나 블론드, 정신을 잃은 듯 힘없이 닫힌 눈꺼풀, 반쯤 드러난 가녀린 신체.
그 모든것이 뚜렷히 보였을땐, 그 여성의 신체는 다시금 중력에 의해 낙하를 시작한다.
윤곽이 흐려지며 밑으로 점점 가속한다.
그리고, 최후에 그 수려한 플라티나 블론드는 붉게 물들어.
대지에 흩뿌려졌다.

 

"어떤 정신나간 놈이...."

 

욕지기를 뱉어대는 소리와 함께 소녀가 추락함과 동시에 조금 더 멀리 구르다가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긁으며 간신히 정지한 벤츠의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의 반쯤 찌그러져서 힘으로 연 것 같이, 반쯤 열리자 무언가에 걸려선 문이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뭔가를 막 차는 소리가 나더니 '영화처럼은 안되는군...'이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형님으로 불리던 남성이 깨어진 뒷문 창문으로 몸을 빼낸다.
차량의 형상이 옆으로 누은 꼴이라 마치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불쑥 솟아오른 형상이 되었다.
시트에서 구른 덕인지 머리에 가는 혈흔을 제외하면 멀쩡한 듯한 그 남자는 마구 구르던 후유증인지 잠시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차량에서 볼썽사납게 굴러떨어졌다.

 

"으으... 젠장, 년놈은 어디갔어!"

 

버럭 외치면서 사납게 눈을 굴리던 그의 시야에 피범벅이 되어버린 소녀가 보인다.

 

"젠장, 이것도 저것도 내 마음대로 돼질 않는군! 빌어먹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품에서 다 구겨진 담배갑을 찾아내었다.
그것을 열어보니 대부분 허리가 분질러져 있는 담배 개비들 뿐이지만 그나마 반쯤 꺾이고 살아남은 놈을 입에 물었다.
하지만, 중요한 라이터가 박살이 난 채, 안의 가스가 전부 증발해 있었다.

 

"으윽, 아 냄새... 이거 나중에 불붙진 않겠지?"

 

많이 증발했지만 워낙 많은양의 기름이 나오는 바람에 흠뻑 젖었던 양복바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아깝다는 듯이 담배를 뱉어버렸다.
땅바닥을 구르던 담배를 멍하니 보던 그는 앞에서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은빛의 기사.
아니, 달빛의 기사라고 해야할까?
은백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갑주를 입은 소녀가 남자를 노려보고 있다.

 

"이런, X 질기긴 더럽게 질기군."
"하세가와 쿠스케. 날 이렇게 개고생 시킨 댓가로 너는 사형이다."
"하아, 계속 그렇게 나만 봐도 될까? 저기 피범벅이 된 가련한 소녀가 죽어가는건 어떻게 할 거지?"
"...네녀석은 그저 뒷간에 굴러다니는 X같이 더러워서 상대 안해줬었던 것 뿐이다 30초는 견디겠나? 창부!"

 

검을 추켜세우며 기수식을 취하는 소녀의 모습에 잠시 기가 죽은 쿠스케라 불린 남성이 재빠르게 품에 손을 넣었다가 꺼낸다.
9mm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토카레프였다.
피 때문인지, 부딪힌 뒤 발생한 약한 뇌진탕 탓인지 조준이 흔들려보이지만, 맞추는데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 푹신하기 그지없는 벤츠 내부를 굴렀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두 눈에 흐르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던 쿠스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붉은 무언가가 도로 위로 날아올랐다.
마치 밤중의 다운힐을 누비는 레이싱 카의 백라이트처럼 붉은 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긴 핏빛 길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떨어져내리던 도중, 도로 위 일정 높이가 되자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저건?!"

 

깜짝 놀란 쿠스케가 이글거리는 붉은 불빛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얌마! 정신 차렸으면 갈겨!!!"

 

밑을 내려다보며 발길질을 하는 쿠스케.
그 행동에 발맞춰 앞유리의 기능을 상실한 벤츠 앞창문이 깨어지며 육중한 AK소총을 한 손에 쥔 남성이 몸을 슥 빼내며 난사한다.
날카로운 소총 특유의 소음이 몇번 울린다.
하지만, 그 행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강철을 절단하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온다.
마치 바람소리처럼, 총성에 파뭍혀 희미하게 들려온 그 소음을 캐치한 것은 은빛의 갑주를 차려입은 여성 정도였다.
총이 나가지 않자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는 남자.
앞창문을 기세좋게 젖히고 나왔을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자신의 AK소총이 자신의 손 째로 탄창 뒷부분부터 총열까지 송두리째 사라져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잠시 자신의 손이 어딘가에 가려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자각하자 절단된 손목에서 부터 뿜어지는 피의 모습에 그것이 현실임을 자각한다.

 

"우악?! 우으어... 켘....."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틀던 남자의 상체가 허리부터 무너진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그 몸은 수십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을 구르며 붉은 빛으로 대지를 젂신다.

 

"아... 아우야?!"

 

깜짝 놀란 쿠스케가 자신의 아우를 바라보다가 이성의 한계를 넘은 공포에 반쯤 넋을 놓은 표정을 지었다.

 

"이... 이... 마녀! 대체 어떤... 컥..."

 

쿠스케 역시도 그의 아우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은빛 갑주의 소녀를 노려보며 마녀라 소리치던 그는 갑자기 목구멍을 매우며 솟구친 핏물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정수리부터 정확하게 수직 이등분 되어 차 안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그 충격에 의해 차체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차량 앞부분이 수십갈래로 쪼개어진다.
영문모를 초자연적인 현상에 갑주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즈음, 무너진 차량의 뒤로 붉은 빛이 번뜩이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슬픈 감각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을 추스린 그녀는 당당하게 외쳤다.

 

"어디 한판 붙어보자! 네녀석이 그게 달린 남자놈이라면 피하진 않겠지?!"

 

그 외침에, 붉은 빛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그 모습에 란스터라 자신을 밝힌 여성이 손짓했다.
어디선가 다시금 날아드는 섬광.
벤츠의 앞창문을 박살낸 일격과 같은 것이 날아든다.
하지만, 그 섬광과도 같은 일격은 더더욱 빠른 무언가에 의해 막혔다.
절단당했다.
두갈래로 갈라진 섬광이 도로를 파고들며 소음과 함께 흙먼지를 피워올린다.
그 모습에 란스터는 전신을 긴장시키며 기수식을 취한 상태 그대로 검술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끝낸다.
스캐너에 잡히는 인영은 불확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선택된 전사, 발키리.
북유럽의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전사로, 여성 한정의 엄청난 힘을 가진 전투의 여신과도 같은 전사다.
그런 자신이고, 그에 걸맞은 수련을 겪어왔다.
적이 무엇이 되었건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찰나, 상대방이 시계에서 사라진다.

 

그것을 단순한 감으로 방어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그녀는 저 앞에 굴러다니는 육편들과 같은 말로를 걷고 있었을 것이다.

 

"크아... 앗?!"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한다.
소녀의 육신이 견디라고 주어진 충격량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전신에서 고통을 호소해온다.
마치 걸래 대용으로 쥐어짜여진 느낌.
뒤이은 연격을 막은것도, 순전히 훈련에 의한 반사작용이었다.
되풀이되는 충격에 그녀의 전신에 힘이 쭉 빠진다.

 

"이런 씨X... 비X그라 라도 한 다스 복용한 새X냐!"

 

깜짝 놀란만큼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가 눈 앞에 정지해있다.
그리고, 그 상대를 보던 란스터의 눈은 믿기지 않는 진실앞에 흔들렸다.
상대방을 알고있다거나 그런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더 가벼워보이는 체구.
여성일까? 아니다 저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남자다.
그렇다면 사이보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어딘가 나사가 한두개 나간 과학자들이 개발한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상은....

 

"네녀석! 동영상의...?"

 

깜짝 놀란 대상의 움직임이 일순 둔해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질풍처럼 검격을 찔러들어간다.
1격, 2격.
아려오는 허벅지 탓에 일격의 날카로움이 떨어지긴 했지만, 상대방과의 체격의 우위로 그것을 억누른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엄청나게 뚱뚱해보이지만, 오히려 그녀가 정상체중이었다.
상대방의 경우가 비 상식적으로 마른 것 뿐이다.
그리고,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점.
정체불명의 가속력은 기교와 힘으로 이루어 진 것인지 그녀의 시야에도 잡기 힘든 검격임에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루트탓에 점점 패턴을 파악하기 시작한 란스터가 막지 못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선현은 잠시 거리를 벌린 뒤, 뒤를 살폈다.
피를 꽤 흘린 유나가 점점 식어가는것이 느껴질 정도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
검격을 이끌어가는 손길이 더더욱 빨라졌다..

 

과거에 그는 암흑 속에서, 좌절했다.
남은 것은 검 한자루와 스스로의 만용에 삼켜진 어리석은 육신이 하나.
피칠갑이 된 소녀의 집에서 맺은 작은 맹세.
가족을 잃게 만든 자신의 속죄.
그것만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미 망가져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위해 살 줄 모르게 되었으니까.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망가진 인생의 톱니는 아직 간신히 삐걱거리면서 돌아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부숴져 그 운명을 다해버릴 것 처럼.

  • PORSCHE 2010.05.20 04:15 SECRET

    "비밀글입니다."

  • 홍차매니아 2010.05.20 10:32

    포르쉐님 댓글이 비밀글이네;;;;

  • PORSCHE 2010.06.06 02:34

    역을 지나치고 벽에 부딪히기밖에 안하기 때문이다.  <---- 오타입니다.

     

    마하 4까지 가속하면서 30초나 지나야 다음 역이라면 섬이 아니라 대륙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