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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분홍색이 하늘을 뒤덮는 벛꽃이 만발한 4월 말의 일본, 훗카이도.


그곳의 어느 산자락에 자리한 이름없는 온천여관은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가며 얼마 남지 않은 눈과 추위로 겨우겨우 한두개의 방을 채운채 영업하고 있었다.
목재를 이용해 전통방식대로 만들어진 건물은 온도차이 때문에 4월 말이 되어서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흩날리는 것과 어우러져 운치있는 경관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흩날리는 벛꽃나무들의 사이에 만들어진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올리고 약간 작아서 몸의 굴곡이 두드러진 여성용 유카타의 옷깃을 최대한 여미고 있는 소녀로, 얼굴은 서양인 특유의 큰 눈과 동양인 특유의 엷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엷은 선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녀였다.
그 옆에 함께 앉아있는 사람은 옷이 커서 여기저기 주름이 잡힌 남성용 유카타를 상의만 걸치고 안에 반바지와 면티를 입고있는 소년이었다.
유카타가 헝클어진 정도로 봐선 꽤 마른체형에 속하는 그 소년은, 검은 더벅머리를 빗질도 하지 않고 대충 바람에 말리고 있어서 물기로 젖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있었다.


사방에 흩날리는 벛꽃 때문에 두 사람의 주변은 화사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분홍빛의 물감을 장난스레 찍어내려가는 화폭같은 장면이지만, 정작 두 사람의 분위기는 밝지 못했다.
화사한 분홍이 그 분위기에 침식되어 빛이 바래버리는 것 같은 암흑.
그리고 조용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소녀쪽이었다.

 

"이건 이미 결정난 일이야. 이렇게 너와 밖에 나와있는 시간도 오늘로 마지막. 본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어."

 

그 말을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린 소녀는 찡그려지는 표정을 애써 밝게 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 괴로워보이기만 했다.
소년은 소녀가 정적을 깨자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었고, 힘겹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을 보아버리자 소녀에게 답했다.

 

"괴로우면 나랑 도망가지 않을래?"

 

소년의 말에 소녀는 깜짝 놀란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놀라움과 감격과 환희, 그리고 절망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었다.
마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억누르는 것 같은 모습.
뒤이어 소녀가 답변한 내용은 소년의 가슴을 잡아뜯어버렸다.

 

"불가능해. 도망같은건... 나는 그 집안에서 필요한걸 지닌 힘없는 소녀일 뿐인걸."

 

모든것을 포기한 듯 한 목소리로 선언한 소녀의 말.
소년은 전신이 뜨거워지는 듯 하다가, 그 모든 열이 머리로 몰려오자 참지 못하고 소녀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짓는거야! 둘이서 노력하다보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다니..."

 

말을 하면서도 그 끝을 흐리는 소년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 없는 소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은 답답했다.


뻗쳐오른 열은 소리를 쳤음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주먹이 불끈 쥐어보지만 휘두를 순 없다.
눈 앞이 검게 페이드아웃이 되어간다.
흩날리는 벛꽃잎의 소리가 멀어져가기만 한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소녀의 옅은 숨소리마저 곁에 있지만,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진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때 소년의 몸은 기울고 있었다.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하려고 하자 머리에서 따끔거리는 아픔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퍼져나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이 말 밖에는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싫고 밉기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소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확고히 선언했다.


그 선언에 소년은 이마를 덮고있던 손을 내려서 눈을 가렸다.
두통이 가라앉으며, 전신이 식어간다.
마치 감추고싶은 슬픔의 증거가 머리에 몰린 열을 자신이 나올때 함께 들고 나오는 것 처럼 서서히 식어간다.
그리고 작게 흐느끼는 소년을 뒤로하고 일어선 소녀는 막 여관문을 열고 들어온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의 안내를 받으며 여관을 나섰다.


뒤따라서 커다란 짐을 챙겨나가는 남성이 한명, 소년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중년 남성의 호통에 허겁지겁 여관 정문 앞에 세워진 벤츠의 트렁크에 짐을 싣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눈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두 눈에 명백한 살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막 엑셀을 밟고 출발한 차량안의 사람들은 어느 한명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스스로의 증오를 분노로 뜨겁게 달궜으며
슬픔으로 망치질 한 뒤 이성으로 식혔다.
그 일련의 제련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무기로 다듬었다.


어떤 시련에도 지지 못하도록.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날 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소녀와는 영원히 함께 걸을 수 없는 평행선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스스로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맨 발로 가시덤불 위를 걷기 시작했다.
소녀가 그 길로 오지 못하도록, 그 길로 올 필요가 없도록, 영원히 옛날과 같이 함께 할 수 없더라도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필요 악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깊은곳에 고독을 감춘채 청년은 쓸쓸히 가시덤불 위를 혼자서 걷고 있다.

 

----------------------------------------------------

 

 

노을이 지고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어둠에 휩싸이며 어두컴컴해진 밤.


모든것을 식혀버릴 듯한 싸늘한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항구에서 로엔시 중심부로 향하는 34번 고속도로의 항구 톨게이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아스팔트가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바닥은 새빨갛게, 마치 분식집에서 순대를 떡볶이소스랑 섞어서 매콤하게 만든것이 바닥에 쏟아진 듯이 사방에 붉은 살점과 피가 뿌려져 식어가는 가운데 열을 일으키는 열원이 두개.
허무하기 그지없는 시체의 단편을 짖이기며 격돌하고 있다.


흩날리는 것은 두 사람이 부딪힐 때마다 가열되는 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기.
그 중에서도 직도를 들고있는 청년의 검에선 이상하리만치 열기가 세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청년의 검은 말 그대로 미친듯이 휘둘러지고 있었다.
속도는 거의 광속에 준하여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간신히 보일듯 말듯한 경지다.
저만한 속도의 검은 정면에서 대하면 사각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왜 죽는지도 모를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 검을 검으로 상쇄시키는 갑주를 입은 여기사의 실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치 인세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검의 연무.


한없이 이어질 것 만 같은 격돌은 위화감 없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어이 빌어먹을 젓가락. 네녀석의 그 말라 비틀어진 몸 어디에서 이딴 개떡같은 경우를 만들 정력이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슬슬 지겹거든? 뒈져줘야 겠어."

 

여기사는 은빛 풀 플레이트로 전신을 뒤덮고 있는 스스로의 성스러움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말버릇으로 선언해왔다.
그것을, 담담히 침묵으로 받아넘긴 청년은 그저 쥐고있던 검의 기수식을 바꿨다.


여태까지의 검격의 결과, 서로간의 장단점이 교차하고 있고 그것이 서로의 장점을 상쇄시킬만큼의 동등한 전력에 의해 결판이 나지 않았다.


여기사는 어떤 원리인지 몰라도 무지막지한 힘을 갖고 있었다.
마법적인건지 어떤건진 몰라도 검을 맞부딪힐 때 마다 청년이 속력으로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력을 이용한 강타나 속임수를 사용해 동등한 상태를 이어왔던 것이다.

 

"후-우... 스...흡!"

 

짧고 깊게 숨을 들이킨 청년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진다.


마치 숨을 쉰 것을 스위치로 하는 듯이 바뀐 그 속력은 이 세상의 생물이 낼 수 있는 정상적인 운동 에너지량을 초월하고 있었다.
몸의 윤곽은 마치 반투명한 막을 씌운듯 흐릿흐릿해졌고, 검은 말 그대로 도깨비 감투를 쓰기라도 한 듯이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움직임에 순식간에 거리가 사라진 두 사람이 격돌한다.


굉음.


정상적인 검과 검이 맞부딪힌 소리가 아니라, 폭탄이라도 터진듯한 소리가 주변을 뒤흔든다.
이어서 불어닥치는 돌풍은 주변의 자잘한 파편들을 휩쓸고 도로 저편으로 날려버릴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소음을 방지하고 삼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양 옆의 차단벽에 의해 공기의 대류는 빠르게 상하선으로 퍼져나갔다.


격돌의 중심부, 그곳에는 당황한 표정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여기사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청년은 낭패한 표정으로 허공에 검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끼기기긱, 날리가 없는 마찰음이 허공중에서 들려온다.


뒤이어서 상황을 파악한 여기사가 검을 추스리고 휘두르려고 들자 청년은 다시금 보이지도 않는 속력으로 검을 휘둘러 알 수 없는 장애물을 무시하고 뻗어나오는 검을 막아내며 그녀쪽으로 밀어붙힌다.


하지만, 다시금 허공중에 검이 멈춘다.


그것에 청년은 마치 성난 황소가 타격치를 높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 처럼 검이 튕겨나오는 반탄력에 더해서 한번에 뒤로 멀찍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본 여기사가 공중으로 올라가지만 않았어도, 뭔가 시도를 해도 했을 것이다.

 

"썩을, 뭐 이딴 경우가 다 있어? 이제 손 쓸순 없겠지. 죽어버려!"

 

여기사의 몸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듯이 미끄러져내려왔다.
그것을 뒤로 몇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부드럽게 피해낸 청년의 정면으로, 좀 전의 낙하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직선으로 움직이는 여기사의 모습이 보인다.
말도 안돼는 방향전환을 자연스럽게 해낸 여기사가 팔을 휘둘렀다.
그것을, 역시 말도 안돼는 반사신경으로 받아낸 청년은 몸이 붕 떠올라버렸다.


낙하하던 속도에서 가속하여 이동한 여기사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이다.
거기다 원래 갖고있던 여기사의 괴물같은 힘을 더하면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 흘릴 수 있는 에너지량이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곤 해도 거의 인외지경에 가까운 타격제어로 청년의 몸은 극히 일순간 떠올랐다가 지면을 딛는다.
그것을 몇차례고,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소녀가 낙하하면 청년은 피하다가 말도 안돼는 궤도에서 날아들어오는 여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며 조금씩 빈틈을 보인다.
하지만, 그 빈틈이라는 것이 여차하면 상대방을 꽤어내어 목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미비한 것이라, 여기사의 공격 패턴은 크게 변하는 것 없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몇합을 겨루던 여기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다.

 

"이리저리 피하다가 방어만 하고, 달릴거 달린 녀석이면 뒈지더라도 정면에서 오란 말이다!"

 

여태까지 날렵한 새와도 같이 날아들던 여기사의 움직임이 돌변한다.
그것은 하나의 빛줄기.
중력 가속도에 자신의 가속을 더하여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혜성이었다.

 

"우왓, 위-험!"

 

여태까지 슬쩍슬쩍 피하던 것과는 다르게 최대한 멀리 이동하는 청년.


하지만, 그의 행동 반경은 정해져있었다.
이리저리 날리는 콘크리트와 시멘트 파편이 중상을 입은 소녀에게 닿지 않도록 그 앞에서서 날아드는 흉기들을 모조리 배제한다.
나폴나폴 날아오르는 먼지와 가속에 따른 대기 마찰의 증가, 및 충돌당시 지면에 전달된 에너지가 전부 열로 바뀌면서 주변은 아스팔트가 녹는 냄세와 매캐한 연기가 한가득이었다.


그 안에, 마치 물에 흠뻑 젂셔진 땔깜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벌겋게 달아오른 은갑주의 여기사가 있었다.

 

"거기라면 더이상 피하지 않겠군? 뒤의 창녀를 지키려면 각오하는게 좋을거다 쥐새끼! 발할라 모드 기동!!"

 

여기사의 갑주의 등뒤에서 날카로운 철의 날개가 솟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모루에서 다듬어지는 달궈진 쇠 처럼 붉게 달아올랐던 은갑주는 마치 백금처럼 백열하는, 똑바로 응시하지도 못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뒤로 뿜어지는 거센 황소의 날숨과도 같은 배기연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생기는 듯 하더니 신기루가 맻힌다.
자신의 모든것을 쏟는걸 보여주는 듯한 그 모습에, 청년의 기도 역시 날카롭게 다듬는다.
검극은 아래로, 위에서부터 베어내리려고 하다간 밀려드는 압력과 힘의 차이에 의해 자신이 베어진다.


노리는 것은 틈.


여기사의 일격을 위한 상단세의 틈은 하단에 있다.
아니, 상단세가 아니다.
전개가 끝난듯 백열하는 와중에 보이는 움직임은 찌르기였다.


마치 렌스를 장비한 것 처럼 검을 허리춤에 댄 여기사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고 판단한 순간, 청년은 주저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찔러 들어온다면 전방위에 압력이 퍼진다.
어디가 되었건 즉석해서 생기는 틈을 노릴 수 밖에 없다.


저 소녀가 신이 아닌 이상 생길 수 밖에 없는 틈.


그 일점을 노리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도 휘두를 수 있도록 검을 앞으로 한다.
백열하는 여기사의 모습은 이제 빛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태양이 지상에 현현한 듯,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불어닥치는 열풍에 의해 이글거리며, 열변형을 시작한다.
청년은 자신의 뒤를 확인한다.
바닥의 열 때문에 가볍게 연기가 나는 소녀의 옷자락이 보인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이번으로, 끝을 낸다.

 

그렇게 청년이 결심한 순간.

 

"네녀석을 지워주마!"

 

여기사의 폭주하는 말소리와 함께 아광속에 준할법한 순속의 공격이 닥쳐든다.


마치 빛덩어리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움직임.
너무나도 빠르기에 빛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녀가 움직이고, 그녀의 모습이 따라오고, 그 뒤를 쫓아 백열하는 빛이 따라온다.


모든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업화.
그녀의 용맹의 상징인 듯이,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와도 같이 불타오르는 그 일격을 청년은 그 얇고 긴 부실한 검으로 대적한다.


일격의 교차.


여기사는 최후의 순간까지 비어있는 청년의 복부에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어느 틈엔가 자신의 눈 앞에서 번뜩이는 그리 넓지 않은 검면에 경악해야만 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발견했을땐 이미 늦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로 움직이려고 하면서 위력이 줄어버린다.
달아오른 갑옷은 어느세 식어버렸고, 위세는 사라졌다.


튀어오르는 붉은 핏방울.


여기사의 전신을 뒤덮은 갑주에 얕은 금이 그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려쳐진 검이 그녀의 쇄골을 가른다.

 

'죽는건가..?!'

 

여기사가 속으로 경악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데, 그녀의 손에 묵직한 감각이 찾아든다.

 

"커헉...."

 

여기사는 순간 물벼락을 맞았다고 착각했다.


마치 누군가가 컵에 담긴 액체를 뿌린듯한 불쾌감이 얼굴에 서리지만, 이것은 그런 시덥잖은 물 같은 것이 아니다.
피.
진득진득하니 엉켜드는 그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이루고 있던 부속이다.


머리 한켠에서, 자신이 이겼다고 되뇌였다.
쇄골을 파고든 검격은 자신이 가한 데미지에 비하면 별 것 없었다.
아마도 갑주가 최고치 이상의 출력으로 전개한 방어벽에 의해 검의 위력이 전부 흡수된 듯, 뼈 하나로 구성된 쇄골의 중간정도를 파고들고서 검이 멈춰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절할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지만...
상대방은 좌복부, 그러니까 배꼽을 중심으로 좌측에 자신의 장검에 의해 깊은 자상을 입었다.


아니, 관통상이었다.


검의 끝부분이 어깨너머로 얼핏 보이는 것이었다.
여기사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의 굴욕적인 얼굴을 기대한다.


죽음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죽지 않으려고 미련스레 발버둥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발키리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자신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그 청년의 비굴한 모습으로, 자신이 입은 상처를 달래자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상식 외의 존재였다.

 

"유우... 나..."

 

조용히 읊조리듯이, 마치 염불을 끝맻는 것 과도 같고 기도를 마치는 것과도 같이 나직이 중얼거린 그 말에 어떤 힘이라도 있는 것 이었을까?
일반인이라면 사지를 사용하지도 못할 것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근육을 움직인다.
집중력은 높지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탓에 한번 쓰러질 듯이 휘청였지만, 쇄골 뼈에 박혀 고정된 검으로 몸을 지탱해낸다.

 

"크읏...."

 

날카로우면서 둔탁하고, 흉폭한 통증이 좌측 쇄골부터 시작해서 목을 타고 올라가 직접적으로 뇌에 전달되는 느낌.
그 끔찍하리만치 소름돋는 고통에 기절하는 것도 용서받지 못한 여기사의 시야에는 스스로 검의 중심으로 걸어들어와, 더더욱 깊은 상처를 내면서도 팔에 힘을 실을 수 있도록 움직이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사신과도 같이, 죽음과 함께하며 죽음을 선사하는 듯한 그 모습에 여기사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치 청년의 살의가 사슬이 되어 그녀의 몸과 정신을 구속하는 듯, 그녀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자리에 서 있었다.

 

"잡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중얼거리는 청년.


그와 동시에 그의 살의가 날카롭게 변하는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한발.
여기저기 녹아내리고 파이고 만신창이가 된 황량한 고속도로에 난 매마른 금속음과 동시에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졌다.
여기사는 전신의 갑주와 검이 바스라져버리며 알몸이 되어 고속도로 위에 엎어져버렸고, 청년은 검을 놓치면서 자신의 몸을 지탱해주던 배를 관통한 검이 사라짐과 동시에 구멍을 매우려는 듯이 뿜어진 핏덩이로 전신을 젂시며 바닥에 쓰러졌다.
화약 연기를 뿜어내는 권총을 들고 서 있던 검은 타이즈에 흰 모자를 쓴 취미 나쁜 여성이 '어머어머, 아가씨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군요.'라고 중얼거리면서 도착한 구급차를 맞이한 것은 두 사람이 쓰러진 직후였다.

 

-------------------------side in 선현

 

마치 누군가가 뱃속을 휘젓는 듯한 감각에 극심한 구토감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눈 위로 쏟아지는 붉은 석양이었다.


마치 태양이 불길이 되어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듯 한 그 강렬한 색체에 눈을 뜨자, 같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천장이 보인다.
뒤늦게 누군가가 태양을 가리는지 눈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천장이 하얗게 변한다.
누군가가 가렸다기보단 커텐을 친 듯 하다.


지끈거리는 머리로도 각성하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뜨겁게 달궈진 도로위에 누워있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피를 움직이는 심장에 돌연 힘이 부여된다.
등골을 따라서 녹인 쇳물을 흘리는 듯한 감각이 드는 것 같더니 머리에 무언가가 뿌리를 내리는 듯한 기묘한 통각이 두개골을 뒤덮는다.
흔히 두통이라고 하는 고통.
가벼운 현기증까지 동반하는 통각에 절로 손이 올라가서 이마를 짚는다.

 

"담당 선생님을 어서! 이봐요, 아직 몸을 움직여서는 안돼요."

 

누군가의 손길이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온다.
일어나는 것도 간신히 했던 것이라 그 가벼운 손길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몸을 도로 뉘인 나는 코와 입이 답답한 것을 느끼고 달려있는건지 없는건지 애매한 양 손으로 힘겹게 얼굴 주변을 더듬거렸다.


딱딱하지만 물컹물컹하고 미끄러운 감촉.
플라스틱 재질의 산소호흡기가 코와 입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입을 벌려서 말을 하려고 하니 목 안이 불편하다.
무엇인지 몰라도 딱딱한 것이 목구멍에 자리해서 움직일 때 마다 목안이 따끔거린다.

 

"움직이면, 안... 누가 진정제를 가져와!"
"양은..."
"일단 가져와!!"

 

서너명 쯤 되어보이는 남녀의 말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그대로 한번 정신을 잃었다.
다음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목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감각이 들어서였다.
무언가가 기도를 지나치고, 목젖 언저리를 스치더니 코가 갑갑해진다.
그 뒤에는 마치 코를 휑 풀어버린 듯 일순 상쾌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커흑... 콜록, 콜록..."

 

목부터 코까지 안 따가운 곳이 없어서 자연스레 기침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둘러본다.
달아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무력하게 쓰러져있던 그 소녀를 생각해 낼 때마다 의식이 각성한다.

 

"정신이 들면 이쪽 의 전등을 보도록."

 

누군가가 기분나쁘게 턱을 휙 낚아채선 강제로 눈을 벌리게 한다.
강제로 눈을 뜨게 한 뒤에는 그 위로 메너없이 손전등을 비추기에 힘도 없는 손으로 그 전등을 툭 쳐버렸다.

 

"하하하! 이렇게 앙탈부리는 것을 보면 다 나았군. 난 다음 환자를 보러 가겠네."

 

전등 때문인지 두통이 되살아났다.
정체를 알기 힘든 분노가 전신을 뒤덮었다가 의미없이 사라진다.
마침 카르테를 기입하며 침대 옆에 서 있던 간호사의 옷자락이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기에 어떻게든 팔을 움직인다.

 

"아, 목이라도 마르신가요?"

 

빙긋 웃으며 빨대를 권하는 간호사에게 더 예기해봤자 수확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두통을 폭풍처럼 불러일으켜주는 덕택에 짜증이 한바가지다.


팔꿈치로 몸을 받쳐올려서 일으켜 세운다.
밀어 누르는 것은 팔꿈치나 팔을 비스듬이 세우는 것으로 버텨내었다.
나무라는 말 같은건 들리지도 않는다.
몸을 어느정도 일으키자 간호사는 아예 포기한 듯 내 몸을 받쳐왔다.

 

"여기에..... 함께... 여학생..."
"아, 같이 실려온 그 애? 그 여학생이라면..."

 

간호사는 조심스레 내 등에서 손을 떼었다.
아마 내가 몸을 지탱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손을 전부 떼고도 몸을 지탱하는걸 잠시간 확인하던 간호사는 시트 옆의 커튼을 걷어주었다.

 

"여기 대령이요~. 어지간히 소중한 사람인가봐?"
"......"

 

소녀의 상태는 꽤나 호전된 것 같다.
그녀라면 돈을 쏟아부어서 나을 수 있을거고 당장 중환자실이나 수술실인 것도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제야 무리해서 몸을 일으키면서 사용했던 배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이 퍼지는 듯 하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side out

 

 

소녀, 유우나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할 힘도 없이, 엄청나게 빠져나간 피로 인한 빈혈기를 억누르는 것이 전부.
정신이 들었을 뿐인데도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나는 극심한 빈혈증세로 몸조차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불안감.


마치 몇년 전에...


지금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광경이 떠오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집.
악마의 손에 이끌러 나왔을때, 펼쳐져 있던 지옥도.
잊지 못할 혈향.


붉은 과거....

 

"거.. 거기, 아무도 없나요?! 누가 아무나... 큿..."

 

어설픈 몸 상태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자 두통까지 동반하며 현기증이 극심해진 유우나는 일어나려던 반동으로 침대 위를 제멋대로 굴렀다.
그 탓인지 링겔의 주사 바늘이 팔 안을 휘젓다가 멋대로 떨어져나갔다.
아마, 얼마 안있어서 반창고를 교체할 예정이었는지 형편없는 고정력 탓이다.


팔이 욱신거리고 쓰라려온다.


아무도 없다.


자신이 흘린 피 때문에 더더욱 자극당한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뿌리째 드러나려고 한다.

 

"아무나... 부탁이니까... 제발..."

 

보기 흉하다는걸 알고 있지만, 혼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껴진 가슴의 고동이 멎지 않는다.


두렵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또 모두가 죽어있을 것 같다.
세상에 혼자만 남아있다고 생각되었던 그 절망.


그 슬픔.


그 고통.


지긋지긋할 정도로 나락안에서 몸부림쳐왔다.
그걸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감각.
평소에 늘 곁에 있던 비서조차 보이지 않는 병실에서, 추하게 발버둥친다.

 

"......"

 

그곳에, 보다 못한 불청객이 발을 들여놓는다.
으득, 하는 불길한 파열음.
깜짝 놀란 유우나가 돌아본 그 곳에는...


'악마'가 서 있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한기가 전신을 타고 흐르다가 등골을 타고 머리까지 단박에 솟구치는 불쾌한 기분.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린날의 트라우마.


끌려가서 보게 되었던 혈우[血雨].
그 위로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육편[肉片]에서 알고 지내던 친척의 얼굴 절반을 발견하였을 때의 공포는, 쉬히 잊혀지는 성질의 기억이 아니다.


나타난 악마는 그저 조용히 유우나를 안아들고,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너스콜[Nurse call. 간호사 호출 버튼을 너스콜이라고도 부른다.(주로 일본)]의 버튼을 누르고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레 들어왔던 창문으로 퇴장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과 한기에 시달리던 그녀는, 악마가 방에서 퇴장함과 동시에 기절해버렸다.


전신을 식은땀으로 범벅을 시키고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처량하기 그지없는 꼴이었을 거라고, 이후에 생각할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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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