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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가 완전히 지나기도 전인 다음날 아침. 에이페리아는 짜증스런 얼굴을 지은 채 어젯밤 자신의 생각이 안일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아니. 아침 해가 산 너머로 고개를 막 내밀려하는 이른 시간. 레임의 문을 나서 쌀쌀한 새벽의 찬 공기와 곳곳에 깔린 낮고 짙은 새벽안개와 대면하기 전까지, 아니. 라 게세르의 광장과 곳곳의 숙소들 앞에서 부지런히 짐들을 꾸리고 있는 여러 상인 무리를 지나. 라 게세르의 문을 넘어 마을 밖으로 나서는 순간까지도. 에이페리아는 라쿠스와 동행하는 것을 최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밖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아 고귀한 에류시아 여신이시여, 저의 경솔함을 꾸짖고자 굳이 이런 가혹한 현실을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에이페리아는 깨달음을 주려는 에류시아 여신의 자비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어젯밤. 라쿠스를 만나기 전. 그녀를 희롱했던 불한당 같은 사내와 그 일행들이 길목을 막아선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여어 아가씨. 아침부터 부지런히 어딜 가시려고 그러나?”

 

  에이페리아는 자신에게 어제 말을 건넸던,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대체 누가 누구보고 부지런하다는 건지.”

 

  부지런하다는 말은 오히려 그녀가 그들에게 쓰고 싶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비교적 이른 아침부터 앞서서 길목을 막고 있는 그들이 더 부지런해 보였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벌어진 최악의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사정을 모른 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라쿠스가 나지막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여기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인가?”

…….”

 

  에이페리아는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여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라쿠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라쿠스는 턱을 긁적거리며 관찰과 추리를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냈다.

 

친구는 아닌가 보군.”

 

  라쿠스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에이페리아는 로이에르를 불렀다.

 

로이에르. 어제처럼 참지 않아도 좋으니까 본때를 보여줘.”

.”

 

  그녀의 말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 로이에르는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로이에르는 한손에 검을 쥔 채 몸을 풀 듯 손목, , 어깨 등을 두어 번 돌리며 걸어 나갔다. 자신 있게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을 보며 일행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기가 찬 웃음소리를 내었다.

 

! 오늘은 기세가 좋군! 어디 실력도 좋을지 한번 보자고.”

 

  사내는 로이에르의 등 뒤에 서있는 에이페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낯선 남자 하나가 그녀 옆에 있었으나, 심드렁한 표정의 그 남자에게선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어젯밤 실내의 흔들리는 촛불에 비쳤을 때보다, 오늘 아침 해를 받아 더 빛나는 에이페리아의 외모와 그녀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사내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못 보던 얼굴이 하나 있다만, 어제처럼 도와줄 샤나크들은 없으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사내는 진부한 으름장을 놓으며 로이에르를 따라 자신의 검을 집어 들고 마주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검을 휘두르려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 속에서 라쿠스는 긴장감이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에이페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애송이한테 맡겨도 괜찮겠어? 질 떨어져 보이긴 해도 용병들이라 검은 좀 다룰 텐데?”

어제도 말했지만, 그는 로하나스 제국 기사단 출신이에요. 저런 불량배들한테 당할 일은 없어요!”

 

  에이페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의 호위를 맡은 로이에르가 자꾸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나빴다. 그런 그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라쿠스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녀가 로이에르가 싸우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고 저런 확신을 가지는 것일까? 라쿠스가 보기에는 왠지 에이페리아가 로하나스 제국 기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가 의문점을 가지고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두 사내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챙-! 아침의 찬 공기 사이로 퍼져나가며 정적을 깨트리는 날카로운 금속음. 깨진 정적 뒤로 두 사내의 검이 만들어내는 금속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로이에르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다부진 체격의 사내는 자신의 체중을 실어 상대방을 찍어 누르듯 연신 힘주어 검을 휘둘렀고, 로이에르는 그런 상대의 검을 피하거나, 흘리듯 능숙하게 받아 치며 넘겼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검의 교환을 바라보며 라쿠스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 생각보다 기본기는 갖춰져 있군.”

이제 알겠죠? 로이에르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저 그런 애송이가 아니에요!”

 

  라쿠스의 말에 에이페리아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어깨에 힘까지 한껏 들어간 그녀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라쿠스의 반응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단 좀 나을 뿐, 애송이인건 매한가지야.”

 

  에이페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남의 말에 동의하면 죽는 저주에 걸린 게 틀림없어!’ 그녀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쿠스는 두 눈을 로이에르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로이에르의 검 쓰는 모양새를 관찰하던 라쿠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보기에 로이에르는 상당히 여유가 있어보였다. 생각보다 기본기가 갖춰진 로이에르는 착실하게 상대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고, 거칠고 힘만 있는 사내의 검은 그런 로이에르를 제압하기엔 부족해보였다. 그러나 결판은 쉽게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검은 생각보다 종종 빈틈이 드러나 보고 있는 라쿠스의 손끝이 움찔할 정도였지만 로이에르는 그 틈을 파고들지 않았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금속음 속에서 길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던 라쿠스는 턱 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검을 쓰는 법이 너무 물러.”

 

  라쿠스의 생각대로 사실 로이에르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상대방의 큰 덩치에서 발생하는 힘 있는 검은 생각보다 위력적이긴 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로이에르는 피하거나 흘리면서 상대방의 검을 능숙하게 받아내고 있었고, 받아내는 중간 중간에는 찔러볼 만한 자그마한 틈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자그마한 틈을 노리지 않고 착실하게 상대방의 검을 하나씩 받아내며 더 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제법 검을 쓸 줄은 아는구만!”

 

  계속되는 로이에르의 착실한 방어에 초조해진 사내가 투덜거렸다. 검을 높게 들어 올린 사내는 어디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라는 심정으로 검을 강하게 휘두르기 위해 큰 동작을 취했다. 그 순간, 로이에르는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상대의 틈을 노리며 공세로 전환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

 

크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사내는 불안정한 자세로 검을 막으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신음소리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 되었다. 상대방의 균형을 한번 무너뜨린 로이에르는 사내가 다시는 편한 자세로 검을 받아내지 못하게 하려는 듯 철저하게 몰아붙였다. 왼쪽, 오른쪽, 아래 그리고 다시 왼쪽. 방향을 다채롭게 바꿔가며 쉴 틈 없이 검을 휘두르는 로이에르와 그를 쫓듯 정신없이 검을 따라 휘두르는 사내. 두 자루의 검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연달아 울린다.

 

젠장!”

 

  사내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어찌어찌 로이에르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곤 있었으나, 아까 전 로이에르가 사내의 검을 막아내던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안정적인 자세로 상대의 힘을 흘리듯 막아내던 로이에르와 달리, 이미 자세가 무너진 상태로 공격을 받기 시작한 사내는 계속 불안정한 자세로 상대의 검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그 증거로 계속되는 공세에 사내의 발걸음이 점점 뒤로 향하기 시작했고, 허리 역시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방어만 하던 사내의 검이 한 손에 불안하게 잡힌 상태로 늘어진 순간. 로이에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검신을 위에서 아래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

 

  다소 길게 울리는 강한 금속음. 이어지는 사내의 신음소리. 사내의 검은 그의 손을 벗어나 발밑으로 떨어졌고, 사내의 무릎 한쪽은 힘없이 무너지며 땅에 닿았다. 사내가 검을 놓치고 무너지기가 무섭게 에이페리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라쿠스를 향해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렸다.

 

거봐요. 내가 말했죠? 저런 불량배들한텐 당할 일 없다고요.”

 

  에이페리아는 어디 이번에도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잔뜩 벼르며 라쿠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작 라쿠스는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로이에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로이에르는 상대가 검을 놓치고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한 듯 자세를 풀고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라쿠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지.”

네? 뭐라고요?”

 

  라쿠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이페리아가 물었고, 그녀의 물음에 라쿠스는 시선을 에이페리아에게 돌렸다. 그제야 그녀의 한없이 기뻐 보이는 표정을 본 라쿠스는 웃어야 할지 안쓰럽게 봐야 할지 잠깐 고민하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애송이가 졌어 아가씨.”

그게 무슨 억지-”

 

  라쿠스의 말에 그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한 에이페리아는 인상을 쓴 채 따지려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에이페리아가 따지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주저 앉아있던 사내가 돌연 고함을 내질렀고, 바닥의 흙을 집어 로이에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

 

  로이에르는 갑자기 날아온 흙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뒤로 주춤거렸다. 그 사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검을 양손으로 집어든 사내는 그대로 로이에르의 검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깡! 둔탁하고 강한 금속음과 함께 로이에르의 손을 떠난 검이 정처 없이 허공을 날아갔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가로지르던 검은 에이페리아와 라쿠스가 서있던 곳 근처까지 와서 떨어졌다. 땡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팽개쳐진 로이에르의 검. 떨어진 검과 함께 급변한 상황에 놀란 에이페리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당황한 에이페리아를 두고, 라쿠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향해 걸어갔다. 살짝 허리를 숙이며 로이에르의 검을 집어든 그는 검을 가볍게 두어 번 휘두르며 검을 살폈다. 검을 집어든 라쿠스가 에이페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당황함에 입도 살짝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에 살짝 피식한 라쿠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지?”

  • 반딧불 2018.09.26 22:08

    어젯밤 일을 되짚다니 ㅋㅋㅋ 에이페리아 A형 인정각입니까?ㅋㅋ
    “흠. 여기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인가?”
    그리고 이 대사 왜이렇게 웃긴가요 ㅋㅋㅋ 라쿠스 유머력 스탯 증가입니다 ㅋㅋㅋ
    무심하게 에이페리아의 말을 듣고 있는 와일드한 라쿠스와 이쁘장한 에이페리아가 한컷에 그려지는게되게 재밌네요
    전투씬이라니! 전투씬이라니!
    저는 타이밍이 좋지 못하군요. 깔끔한 전투묘사 아주 좋아요!(저도 이다음 올린게 전투씬이라 비교될게... OTL....)
    라쿠스는 로이에르가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미리 암시했네요
    무엇이 문제일까 라고 포인트를 생각하던 중에 마무리는 역시나인가요?
    독자가 포인트를 잡고 읽을 느낌과 결과의 밀고 당김이 적절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좀 짧으시군요?!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 SKEN 2018.09.28 23:54
    호평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라쿠스는 핀트를 벗어난 엉뚱함을 약간 가지고 있기도 해서
    그걸 분위기 환기용으로 표현해보려 했는데 그게 좀 나오긴 한거 같네요.
    ..하지만 언제나 마무리는 채찍질..
  • PORSCHE 2018.09.26 23:47
    라쿠스의 눈썰미나 간접적으로 나온 경험에 우러나오는 말들이 그가 보통이 아닌 인물이라 생각되네요.
    결투를 벌이는 내내 로이에르가 이번엔 좀 제대로 보여주길 바랬는데, 잘해놓고 마지막에 방심하는 바람에 애송이 확정이네요.
    에이페리아는 확실히 이런 환경과 다른 곳에서 자란 느낌이 드네요. 그렇지만 이후에 고난을 겪게 되면 어떻게 무너질지 걱정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닷! 그리고 좀 짧은데 다음편 언제 나오죠?
  • SKEN 2018.09.28 23:55
    로이에르는 애송이에 호구입니다. 작가피셜입니다.
    추후의 성장유무는...노코멘트..
    호평 감사합니다만 마무리가 어째서 재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