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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6 01:29

Blizzard Guard(14)ep2. 작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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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Ey6co.jpg뽀드득
"풋, 너네 고향은 눈이 많이 안왔나봐?"
"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뒤돌아 나를 보고선 입을 가리며 웃는 세레나 이등병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되게 들떠있잖아. 보통 폭설이 내리는 지역에서 온 신병 애들은 그런 표정 절대 안지어."
말을 마치고선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보통 이런 느낌이지. 아씨 또 눈이야?"
"하하하. 맞아맞아."
"처음 그럴 때가 좋긴 하지. 열심히 쓸어. 나중에 가면 끔찍해지는 건 시간문제니깐."
"아아... 네."
해맑게 웃으며 잔인한 현실을 늘어놓는 고참들의 짓궂은 농담을 들으며,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전에 보수를 위해 갔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추우니까 바로 달려보자."
그렇게 말한 칼라 병사장이 손짓을 했는데, 과연 아까 한 말대로였다. 세로로 늘어선 라이오와 메이아 상등병이 넉가래를 바닥에 맞붙이고선 반대편 끝을 향해 쭈욱 밀고 나갔다. 끝부분에 가서 선회를 하며 180도로 돌더니 다시 눈이 쌓인 다음 부분을 깨끗이 밀고 나갔다. 신기할 정도로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자, 한줄짜리 출동."
"가자 얘들아."
칼라 병사장의 지시에 따라 나를 비롯한 이등병들이 프레카 상등병과 함께 눈삽으로 살포시 쌓여 있는 잔여 눈들을 삭삭 밀며 정리해 나갔다. 우리가 한줄을 다 밀어나갈쯤에서야 칼라 병사장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두줄짜리 출동."
"네."
샥샥샥.
일정한 간격을 잡은 채 일렬로 늘어선 네명이 싸리비로 쓸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뒤엔 똑같은 행위의 반복이었다. 눈긁는 소리와 싸리비 쓰는 소리만 계속적으로 조용히 울려퍼졌다. 나는 묵묵히 제설작업하는 고참들의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눈을 쓸었다.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였지만 계속 몸을 움직이다보니 후끈하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서 우리처럼 눈을 쓸며 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야간근무자들이네. 얼마 안남았으니 빨리 끝내자."
칼라 병사장이 우리를 독려하며 제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사이 건너편에 있던 인영 둘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계급을 보니 분대장들이었다.
"칼라 병사장님."
"조라랑 슈바엔. 너네 일찍 왔다?"
자신보다 짬이 낮은지 두 분대장에게 하대를 한 칼라 병사장이 싸리비를 구석에 던져두고 악수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열심히 쓸고 계실 것 같아 애들 좀 보챘습니다."
"이제 라키아 병사장님 다음이시니 소초 투고 아니십니까, 쉬엄쉬엄 하셔야죠."
두 병사장들은 품에서 파이프 담배와 성냥을 꺼내더니 입구에 불을 붙였다. 칼라 병사장도 따라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쉬엄쉬엄 하기는, 이제 시작인데. 나나 너희나 겨울 다 끝나야 전역이야 임마."
손을 가리며 붙여주는 성냥불을 입구에 대고 흡기한 뒤, 연기를 길게 내뱉은 칼라 병사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뒤로 세 병사장들은 후임들의 제설이 마무리 될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초장님은 안오셨나보네."
"아, 소초에 카이란 중위님 방문하셔서 얘기중이십니다."
"카이란 중위? 이유없이 올 사람이 아니잖아. 조금 불안한데."
"마찬가집니다. 참, 이번에 온 신병 중에 한명이 2분대에 갔지 않습니까?"
"그래. 첫날에 한번 본 거 같은데 너네 분대로 갔나보네."
"네. 저는 아직 한번도 안봤군요."
"막내야, 이리 와봐."
제설이 끝나고 멀뚱히 서 있던 나는 칼라 분대장의 손짓에 이끌려 소초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자리로 가게 되었다. 마침 다른 분대장도 누군가를 손짓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아보니 같이 입대했던 동기인 리오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불과 며칠이지만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은 소초원인데 분대장들 이름은 외워야지? 3분대장 조라와, 4분대장 슈바엔이다."
"단결. 이등병 아르펜입니다."
절도있게 거수경계를 했다. 두 분대장들은 입술을 씰룩이며 나를 관찰했다.
"햐. 우리분대도 저런 신병 받아봤으면 좋겠다."
"그러게. 딱 봐도 육체파 타입인게 느껴지네. 리오. 이쪽은 2분대장 칼라 병사장님이셔. 인사드려라."
"단결. 이등병 리오입니다."
"첫날에 한번 봤지. 적응은 잘되가냐?"
"네. 고참분들이 잘 대해주신 덕분에..."
"이번 신병들은 다 괜찮네. 우리 막내도 적응 잘하고 있거든."
칼라 병사장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는 곁눈질로 리오와 살짝 눈인사를 나누었다. 마음 같아선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우리 소초 명물은 어디있냐?" 
"...저기 촐싹거리면서 오고 있네요."
내 시선은 어느새 세 병사장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걸음걸이만 봐서는 처음에는 여자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점점 육안이 드러나게 되자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 손을 봤다는 느낌이 드는 짙은 속눈썹과 가늘게 빠진 일자눈썹, 우리분대의 여고참들보다 훨씬 윤기나는 갈색 포니테일이 등까지 내려와 있었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으련만 면도한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거뭇거뭇한 인중과 턱. 그리고 툭 튀어나온 목젖에 내 팔은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턱을 경계선으로 어두운 목색깔과 대비되는, 두 뺨이 분홍색으로 감도는 하얀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눈내리는 겨울임에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새끼 또 화장했네?"
"희안하네요. 분명히 소초 나올때는 멀쩡했는데 언제 저짓거리를..."
두 병사장들이 황당해하건말건, 문제의 고참은 칼라 병사장 앞에 오더니 거수경계를 했다.
"단결~! 일등병, 유리젤입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친애하는 칼라 병사장님."
마치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뒤섞은듯한 괴이한 목소리는 저절로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남고참들은 경직되어 있었고, 여고참들은 고래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동기라던 안젤리카 일등병은 '저 미친년'이라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감싸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하, 너는 여전하구나. 재밌는 녀석이야."
칼라 병사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털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게 가벼운 인사가 끝나는 것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런데 우음... 이쪽은 이번에 온 신병이군요?"
"다, 단결. 이, 이... 이등병 아르펜입니다아..." 
경례를 한 나는 안젤리카 일등병이 왜 그렇게 진지하게 신신당부했는지 가슴 깊이 이해가 되었다.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채 눈을 맞춰오는 유리젤 일등병을 보며 나는 동공을 저절로 아래로 떨구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의 내 표정과도 같았다. 차라리 트롤이나 예티를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머어머... 눠어. 어쩜 이렇게 몸도 좋구 남자답게 잘 생겼니~? 딱 내타입인걸."
"아, 아닙니다."
나는 당신 타입이 절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유리젤, 장난이 좀 지나치잖아. 우리 막내 새파랗게 질렸어."
지켜보고 있던 칼라 분대장이 웃는 낯으로 나와 유리젤 일등병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젤리카 일등병이 뛰어왔다.
"야이 망할 년아. 우리 막내한테서 눈 안 떼나?"
"어머나. 동기년이 더 하다더니... 나 아직 얘한테 손도 까닥 안댔거든?"
'아직'이란 관용어를 무슨 뜻으로 쓰는지 참 궁금해진다. 욕설과 함께 유리젤의 등을 떠미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니는 눈 마주치는 거 자체가 건드는 거야."
"핏. 하나뿐인 동기가 이래서야... 그럼 나중에 또 봐, 아르~!"
어쩔수 없이 소속분대를 향하던 유리젤 일등병이 입술을 맞춘 손을 나에게 흔들었다. 
...여기가 펜타그래프도 아니고 안본 눈으로 바꿀 수도 없으니 빨리 소초로 돌아가서 눈을 씻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그러던 중, 유리젤 일등병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방향을 향했다. 나는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그 끝에는 베일 일등병이 있었다. 유리젤 일등병은 고개를 왼쪽으로 천천히 30도 가량 젖히더니 그 짙은 속눈썹 한쪽을 지그시 깜빡였다.
"...씨발."
마치 끔찍한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현기증이 온듯 몸을 휘청이던 베일 일등병이 안젤리카 일등병에게 눈을 부라렸다.
"동기 관리 안하냐?"
"죄송합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과를 해야만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참, 한명의 존재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압도적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제설을 마친 우리는 열을 맞춰 소초를 향해 올라갔다. 몸은 아직 쌩쌩한데, 정신적으로 피곤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재? 대기분대는 눈만 안오면 내일부터 이틀 쉬니까 그때까지 푹 쉬어라 막내야."
"알겠습니다."
안젤리카 일등병의 따뜻한 한 마디에 위안을 얻으며 나는, 휴일에 대한 안도와 함께 다음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며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드디어 GP의 꽃이라는, 경계근무의 첫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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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인 리오의 배속분대는 5분대->3분대로 수정했습니다.

참고로 현재 분대별 근무 로테이션은 본편을 기준으로

오전주간(1) - 오후주간(5) - 전반야(4) - 후반야(3) - 대기(2)입니다.

진행을 위해 최대한 전개를 빨리 하려고 하는데 글이 너무 무미건조해지지 않나 살짝 걱정은 드네요 ㅜ

ps. 유리젤도 모티브가 있는 캐릭터입니다...하아...
  • 반딧불 2018.10.08 21:07
    저는 창원 후방에 있어서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그렇게 안내리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쓰는 귀찮음을 잘 알고 있고, 기억하는데요.
    눈쓸때의 고통과 귀차니즘이 살아날정도로 잘쓰셨네요 ㅋㅋㅋ
    마치 군대 갔다오신지 얼마 안되신것 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유리젤... 마치 이건 원피스의 오카마 이반코브가 아닙니까 ㅋㅋㅋ
    심지어 군대에서 오카마라니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상도 못했습니다
    톡톡튀는 케릭터 뭔가 묘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ㅋㅋㅋ
    항상 흥미로운 블리자드 가드 잘읽었습니다!
  • 불꽃휴먼 2018.10.08 22:23
    대구출신이라 입대전엔 눈이랑 인연이 없어서였을까, 이등병때 처음엔 신나게 쓸어댔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쓸다보니 욕이 절로 나왔지만^^; 최대한 그런 부분에 이입해봤네요.
    최전방의 한겨울은 일과가 제설작업이었으니까요(휴가복귀하자마자 눈쓸었던 기억도 나네요...)
    안 만나보신 분들은 다행이지만, 군대엔 G가 은근히(!) 많습니다... 유리젤은 제 후임이었던 녀석이 모티브요 ㅎㅎ;
    항상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SKEN 2018.10.09 00:57
    맙소사. 드디어 유리젤이 나왔군요.
    상상 이상의 모습에 충격이 가시질 않습니다.
    제설 작업은 정말 그 당시가 선명하게 떠오를정도로 명료하게 잘 쓰셨네요!
    유리젤은.. 깊이 언급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하였습니다.
    아무렇지 않아하며 받아주는 칼라 병사장님은 도덕책..그 큰 그릇에 감탄 또 감탄하였습니다.
    펜타그래프라는 단어가 저번 골렘에 이어 또 나왔군요.
    추후에 풀릴지도 모르는 이 펜타그래프는 어떤 곳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네요!
    이제 슬슬 경계근무에 들어가겠군요!
    초소의 본격적인 임무니 만큼 아르펜이 어떤 일을 겪어나가게 될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