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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17:56

Blizzard Guard(13)ep2. 작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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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치우고 돌아가자. 이 차림으로 눈맞으면 금방 감기 걸린데이."
"네, 안젤리카 일등병님."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여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짬통을 든 나와 안젤리카 일등병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우리 둘은 금세 가쁜 숨소리를 내며 아까의 두배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했고, 금방 지정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짬 버리는 곳이야. 당장은 힘들겠지만 천천히 외워."
"알겠습니다."
우리는 양옆으로 서서, 각각 바닥과 끝을 쥔채 짬통을 서서히 눕혔다. 곧 안에 있던 음식물쓰레기들이 낭떠러지로 우수수 떨어졌다.
"꽉 잡고 있어."
말을 마친 안젤리카 일등병은 챙겨왔던 가죽장갑을 끼고선 바닥에 들러붙어 안떨어지고 있던 잔여물도 손으로 박박 긁어내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우리 둘의 인상은 한없이 험해져 있었다.
"됬다. 휴우~ 이제 끔찍한 시간이 끝났네...."
안젤리카 일등병은 음식물이 잔뜩 묻은 가죽장갑을 바닥에다 앞뒤로 두세번 정도 슥슥 닦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심스럽게 장갑에서 손을 꺼내어 엄지와 검지 끝으로 쥐 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펜. 미안한데 이거 좀 들어줄래? 비위가 약해서 진짜 들고 못가겠다."
"아닙니다. 당연히 들어야죠."
나는 낚아채듯 냉큼 장갑을 받아쥐었다. 정말 비위가 약한게 맞는지, 안젤리카 일등병의 안색이 한겨울처럼 창백해져 있었으니까.
"빨리 소초로 가자. 지금 가면 딱 한시간 쉴 거라."
"네."
그녀에게 대답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짬통손잡이를 쥐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환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표정관리가 안되는 편이긴 했지만, 그녀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재밌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어서였을까, 안젤리카 일등병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니 지금 내 표정 보고 웃었재."
"아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늘같은 고참의 표정이 재밌어서 웃겠습니까." 
"얼굴에 다 써있다 임마. 표정관리 안되는 건 꼭 날 닮았네."
"..."
뜻하지 않게 공통점을 찾았다. 눈발이 매섭게 떨어져 더 추울텐데도 이상하게도 얼굴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쑥맥이라 그런걸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뭐, 군대에선 많이 웃는 게 좋은 거지. 앞으로 힘든 일 많을 테니까."
갑작스런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위해서였을까? 자유로운 오른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말했다. 나는 억지로 머리를 굴려대며 할말을 찾았다.
"네. 아 참, 그런데 안젤리카 일등병님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내? 어디일 거 같은데?"
오히려 되물으며 씨익 웃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나는 잠시 어디를 말할지 혀 안에서 장난기를 굴리다, 뱉었다.
"음 글쎄요. 일단 남부인건 확실하시고... 사투리의 걸쭉함으로 봐선 남부의 최하단 정도? 그러면서도 밥은 무지 잘 드시니까 뭐, 딱 나왔네요. 린델로프 영지시지 않습니까?"
린델로프 영지는 대식가들로 유명한 영지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옆 나라인 마고르에서 이름난 푸드파이터들의 대부분이 우리 아르고니아의 린델로프 출신이었다. 거기다 사투리가 워낙 심해 같은 남부출신이 아니면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들었다.
"린델로프으~? 이씨, 그걸 말이라고. 니 지금 내 놀리나."
예상대로였다. 갑자기 짬통을 놓은 안젤리카 일등병이 어느새 바닥에 쌓인 눈덩이를 모아 나한테 던졌다.
"아야야. 아픕니다."
"뭐가 아프노 문디야. 갓 내린 솜눈인데!"
"그나저나 안젤리카 일등병님, 흥분하시니 사투리가 더 찐해지셨습니다."
"다 니 때문이다."
나는 눈덩이를 두세방 더 얻어맞고 나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물론 덕분에 볼을 잔뜩 부풀린 안젤리카 일등병을 볼 수 있었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헤헷.
"파르티안 영지 출신이다."
"아, 그랬었군요."
나는 곰곰히 고아병일때 들었던 파르티안 영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사정이 좋은 영지는 아니었던걸로 기억난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거야 어디든 다 그런거 아니겠나...아, 이 얘기는 그만하자."
"...알겠습니다."
슬쩍 안젤리카 일등병을 본 나는 아차싶었다. 표정이 어두워보였다. 안좋은 기억이 떠올랐나보다. 괜한걸 물어본걸까?
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려 안젤리카 일등병과 계속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소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휴, 이제 도착했네. 고생했어 아르펜."
"안젤리카 일등병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즐거웠던만큼 아쉬움이 찾아오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우리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며 식당에 짬통을 갖다주고 생활관을 향했다. 고참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잘 갔다왔냐?"
"네 분대장님."
"어때, 짬통의 향기는?"
옆구리를 찌르며 짓궂게 물어오는 베일 일등병에게, 나는 웃픈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최고였습니다."
"그치? 앞으로 짬통은 계속 니가 담당하면 되겠....야야,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울상 짓지는 마 자식아."
병을 주다가 또 금세 약을 주려고 하는 베일 일등병이었다. 그나저나 또 표정관리가 안됬나보다. 알타바르 형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넌 임마 표정관리좀 해라. 그러니까 맨날 지지...'
카드게임을 하면서 들었던 말이었다. 사실 대련할 때도 종종 들었던 말이라 조금 이 버릇이 걱정이 되긴 한다.
"우리 막내는 신병답지 않게 표정이 참 풍부하단 말이야."
지켜보고 있던 프레카 상등병이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과는 별개로 난 이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뭐 어때. 얼음처럼 굳어서 꼭 펜타그래프 골렘처럼 무표정한 것보단 훨씬 나은데."
"아, 아닙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선 무조건 부정하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피식 웃은 칼라 병사장이 내 어깨에 손을 얹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막내야. 우리 분대는 인상 찌푸리고 그런 거만 아니면 그런것 가지고 뭐라 하진 않을 테니까. 병사이기 이전에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진 마."
"아, 알겠습니다."
칼라 병사장은 정말 자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선을 옮겨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50분에 나갈 테니깐 그전까지 푹 쉬어 둬. 그리고 안젤리카랑 막내는 설상복으로 갈아입고."
"네."
그러고보면 나와 안젤리카 일등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하얀 털옷을 입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바탕에 자연스럽게 묻은 듯한 검은 얼룩들이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신병이라서 그런건지 무척 멋져 보였다.
"뭘 그리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보고 있냐? 옷갈아입게 침상 위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커튼이 쳐진 뒤, 난 베일 일등병의 도움을 받아 '설상복'이라 불리는 겨울용 군복을 입게 되었다. 지급받은 설상복은 얼핏보기에도 질이 무척 좋았고 안감도 부드러웠으며 무엇보다도 착 감기듯 내 몸에 딱 맞는 게 마음에 들었다. 목덜미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니 세상 따뜻한 게 느껴졌다.
"우와. 착용감이 정말 좋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해 임마. 페바 애들은 구경도 못하는 최상등품이니까."
외투를 입혀주던 베일 일등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목덜미에 달린 후드를 씌운 뒤 양팔의 옷태를 맞춰주던 그는 두손을 옮겨 앞섶의 옷깃을 빳빳하게 잡아주며 말했다.
"우리 블리저드 가드는 옷매무새가 생명이야. 항상 흐트러짐 없이 입고 다녀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옷감이 주는 부드러움에 대한 찬사가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설상복을 입은 고참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대체적으로 체격이 좋은 상등병 이상의 고참들과 베일 일등병은 흠잡을데 없이 늠름하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그 밑으로는 꽤나 가지각색이었다.
라만 이등병은 왜소한 체구 탓에 옷태가 살지 않았다. 세레나 이등병은 순둥순둥한 외모 탓인지 귀여울뿐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샨티 일등병은...
"어째 눈싸움 하러 온 이웃집꼬마같습니다?"
"뭐? 그 이웃집꼬마한테 얻어터져볼래?"
...베일 일등병의 말 그대로였다. 내 시선은 어느새 안젤리카 일등병에게로 향했다가 심박수가 빨라짐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빈민으로 살다가 귀족으로 인생역전한 민담의 주인공 여인 이야기처럼 180도 바뀌어져 있었다. 하얀 설상복은 그녀의 탐스러운 은발과 맞물려 마치 설원의 천사가 내려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아르펜도 설상복 입혀놓으니까 디게 괜찮네."
"그, 그렇습니까? 하하. 옷이 날개죠."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괜시레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 시간 다됬다. 나가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를 본 칼라 병사장이 앞장서고,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이야. 장난 아니네."
하얀 세상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앞서 나간 칼라 병사장의 무릎이 다 빠질 정도였다. 우리 분대는 창고에 가서 제설도구를 꺼내어 다시 소초입구로 돌아왔다.
일등병들과 칼라 병사장은 작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싸리비를, 프레카 상등병과 나를 비롯한 이등병들은 눈삽을, 라이오와 메이아 상등병은 일자로 길게 빠진 'T'자의 특이한 제설도구를 각각 쥐고 있었다.
"밀어 봐."
칼라 병사장의 시선이 라이오와 메이아 상등병을 향했다. 두 고참은 그 처음보는 제설도구를 붙여서 바닥에 대더니, 그대로 상체를 숙인 채 밀고 나갔다.
"우와."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있던 소초 앞이 순식간에 사람 두명이 지나갈 정도의 길이 생겨났다.
"넉가래라는 거야. 눈이 많이 오지 않는 지역에선 눈삽만 쓰니까 잘 보기 힘들걸."
친절하게 설명한 프레카 상등병이 일등병들과 함께 눈삽으로 바닥을 밀고 나가니, 바닥에 살짝 깔릴 정도의 눈만이 남았다. 그것을 칼라 병사장이 싸리비로 쓸면서 마무리해 나가자, 바닥은 흙이 보일 정도로 말끔해졌다.
"쓸다보면 알겠지만, 제설은 대충 이런 느낌으로 간다는 거만 알면 돼. 알았지 막내야?"
"알겠습니다."
"그럼 보급로 쓸러 내려가자. 여긴 야간근무한 애들이 알아서 마무리 해주고 내려올 거야."
우리는 칼라 병사장의 뒤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이정도의 눈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은근히 들뜬 채로 열심히 걸었다.
밟으면서 나는 기분 좋은 소리가 그런 마음을 더 보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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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어중간해서 다쓰고 한꺼번에 올리려다 한번 짤라서 올립니다 ㅎ
  • 반딧불 2018.10.08 20:56
    안젤리카 일병과 썸입니까..? 그것도 군대에서요..? 묘하게 심술이나네요! 부럽습니다!
    군대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라니.. 부들부들... 이번화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어욧! 흥!
    항상 아무 부담없이 읽게되네요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심지어 너무 잘읽혀지고 좋아요!
  • 불꽃휴먼 2018.10.08 22:19
    모두가 바라는 군대에서의 판타지 아니려나요? ㅎㅎㅎ
    블리자드 가드의 1부는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두 가지 줄기를 최대한 다 타면서 최대한 재미와 공감대를 뽑아내 보려고 합니다.
    잘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 SKEN 2018.10.09 00:48
    달달하네요. 보는이가 흐뭇해지는 이 달달함 너무 좋습니다.
    짬통의 냄새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우리의 안젤리카 일등병님이 함께 계신데!
    안젤리카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대사에 사투리가 접목되어 그 매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샨티 일등병도 매력적으로 느끼는 터라 그녀와의 에피소드도 기대가 되는군요!
    설상복을 입은 샨티 일등병의 모양새를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제설 작업에 들어가는 부분에서 설명도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너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