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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02:58

Blizzard Guard(11)ep2. 작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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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Ey6co.jpg소초에 온지도 사흘이 지났다. 온 산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가을은 온데간데 없고, 낙엽은 하나 둘씩 떨어지며 겨울의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
"자자, 어서 집합해라. 빨리 빨리끝내고 쉬어야지?"
손을 흔드는 소초장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분대의 제일 후미에 붙은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전까지 입던 전투복이 아니라 거칠면서 낡은 소재의 옷이었다. 심지어 내 몸에 맞지도 않아 약간 펑퍼짐했다.
"이 옷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작업복이야. 그전 전역자들이 반납해 놓은 비전투복을 보관해 놓았다가, 오늘처럼 작업할 때 입는 거지."
대답해 준 이는 베일 일등병이었다.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위엄있어보이던 고참들이 어디 음식구걸하는 앵벌이 됬다는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하늘같은 고참들에게...!"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인데?"
재밌다는 듯 나를 계속 관찰하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베일 일등병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나는 표정관리가 잘 안된다는 게 문제였다.
"장난이야 임마. 온 몸에 흙먼지 묻히는 일 할때도 전투복 입을 순 없잖냐. 그리고 저기 저분처럼 신나하는 여자사람고참도 계시고 말이지."
"얏호. 오랜만에 입네, 이 `타이거 브이` 옷은."
앞에서 샨티 일등병이 방방 뛰어 신나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고개가 저절로 기울여졌다.
"왜 맞지도 않아서 줄줄 흘러 내리는 옷을 배바지로  입고 저리 좋아하신답니까?"
듣고 있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주먹을 입에 댄 채 큭큭거리고 있었다.
핏을 떠나서 주황색 바탕에다 가슴 정중앙에 브이자가 떡하니 박힌 디자인이란, 손에 쥐어진다면 불쏘시개로 써버리고 싶을 정도로 촌스러웠다.
"막내 너는 아직 이해 못하겠지만, 군인에게 `짬의 상징`이란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란다."
말하는 본인도 웃긴지 연신 입술을 씰룩거리던 베일 일등병은 미소를 지은 채 혼잣말 하듯 말했다.
"특히나 저건 좋아하던 고참이 입던 물건이니깐..."
"그렇습니까..."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이해가 되냐고 물어본다면, 글쎄올시다였다.
"자, 삽 한자루씩 들었으면 어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황금마차를 위하여!"
장난기 어린 구호와 함께 우린 소초를 내려와 후방보급로를 향해 내려갔다. 소초장은 함께 온 1분대를 오른쪽으로 보낸 뒤, 우리분대와 함께 왼쪽길을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선두에서 걸음을 멈춘 소초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맡은 구역이다. 옆소초는 벌써 다 끝냈나보네. 나중에 상급간부가 지적하면 다시 해야되니깐 꼼꼼히 해야된다."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마치는 소초장에게 고개를 끄덕인 칼라 병사장이 지시를 내렸다.
"프레카가 일이등병들 데리고 외곽에서 흙좀 퍼와서 파인데다가 뿌리고 내려가. 난 소초장님이랑 넷이서 마무리 지으면서 따라 내려갈 테니까."
"네."
"애들 양조절 잘 시켜야 돼. 적당히 조금 남을 정도로. 알지?"
"물론이죠. 이래뵈도 제가 한 측량 하잖아요?"
프레카 상등병이 두손가락을 올린채 꼬물거렸다. 피식 웃은 칼라 병사장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댔다.
"까불기는. 어여 하기나 하셔."
"그러죠. 얘들아, 가자."
삽을 빙빙 돌리며 손을 흔드는 프레카 상등병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은근히 유쾌한 매력이 있는 고참이었다.
"다들 너무 많이 퍼오지 말고 적당히만 퍼와."
"알겠습니다."
나는 프레카 상등병의 말에 따라 적당량의 흙을 삽에 실어 꺼진 땅에다 가볍게 뿌리고 돌아섰다. 같은 '병'이여서일까. 고아병일 때 하던 일의 연장이라 무척 익숙했다. 거기선 영지에서 먹고 입고 잔 대가를 위해 어릴 적부터 노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살짝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라만 이등병은 어제의 충고때문이었을까? 과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야 라만. 너무 많잖아."
너무 과해서 문제였긴 하지만.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그는 다시 삽질을 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깡 마른 몸에 자라목 마냥 앞으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무척 볼품없어 보였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군대에 와서 저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소초장을 비롯한 상위고참들이 뿌려진 흙을 파인 땅에 집어넣으며 보급로를 평탄화 시키고 있었다.
"막내야. 뭐하니."
고개를 돌렸다. 베일 일등병이었다. 목소리가 살짝 냉랭한게 나도 모르게 닭살이 돋았다.
"이등병 아르펜! 그, 그게 잠시 주변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런 거 볼 게 뭐냐 있냐, 니 직고 열심히 삽질하고 있는 거 안보이냐?" 
"죄, 죄송합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다시 묵묵히 삽질을 시작했다. 없던 긴장감이 생겨났다. 요 며칠간 너무 잘 대해줘서 자각을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군대라는 사실을.
"자자, 10분간 휴식."
얼마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까. 소초장의 한 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너나 할것없이 구호를 외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라만 이등병만 제외한 채.
"라만, 안들리냐."
"쉬라잖냐."
"이등병 라만."
관등성명은 버벅이지 않는 라만 이등병이었다. 그는 구호를 못 들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죄, 죄송합니다아. 모, 못들었습니이다."
"자식, 얼마나 열심히길래 소리치는 것도 못듣냐?"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네."
주저앉아 지켜보던 나는 불현듯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막내 너도 이런건 본받아. 니네 직고참 얼마나 열심히냐."
"뺀질한 녀석은 어딜 가도 환영 못받아."
"알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손으로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못들었다면 모를까, 어제 얘기를 듣고나서 이런 상황을 겪으니 영 표정관리가 안되는 것 같다. 어렴풋이 이해는 가지만 길들임이란 건 당하는 쪽에서 환영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깐.
"이제 반 정도 왔군. 1분대도 반쯤 했을 테니 금방 끝날 거다."
"그나저나 하늘이 심상찮군요. 오후에 뭐가 와도 올 것 같은데."
평소보다 어두운 하늘을 보며 칼라 병사장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러고보니 평소보다 좀 더 추운 것만 같았다.
"네 말대로다. 비가 오면 최악이고, 차라리 눈이 내리는 게 낫겠다."
"...둘다 최악입니다."
진저리를 치던 칼라 병사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번에 라파가 이번주 짬통 담당 우리라고 얘기했었냐?"
"네 그랬습니다, 분대장님."
"그럼 지금 당장 해결해야겠는데."
턱을 쓰다듬던 칼라 병사장이 우리에게 제안했다.
"작업도 오전 안에 끝내야 하니깐, 일등병이랑 이등병 각각 한명씩만 뽑자. 내가 지금 가서 짬통을 버리겠다, 손들어봐."
분대장인 그의 입장에선 가볍게 제안한 것일 테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짬냄새 생각나서 1초라도 버벅이면 안된다는 사실을.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만 이등병도 들었지만 나보다 약간 늦었다. 그러고보니 번개같이 손을 든건 우리 둘뿐이었다. 세레나 이등병은 약간 고민하면서 손을 올렸고, 일등병 셋은 약속이라도 하듯 비슷하게 손을 올렸다.
"어쭈, 일등병이 빠져가지고."
"샨티 일등병님, 저희 다 같은 두줄입니다."
"자빠져도 같이 자빠져야 안됩니까."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는 베일과 안젤리카, 두 일등병들이었다.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칼라 병사장이 나를 손짓했다.
"이등병은 빨리 손든 막내가 가라. 일등병 너네들은 가위바위보로 승부 봐."
"바라던 바입니다."
마치 이런 레파토리를 미리 예상했다는 듯 팔을 걷는 세 일등병이었다. 품자로 마주 선 채 뱁새눈을 한 그들은 바짝 핀 오른손가락 끝을 왼손으로 살짝 당긴 채 승리를 위한 의식을 벌였다. 그걸 지켜보던 메이아 상등병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헛짓거리 그만 하고 빨리 하기나 해."
"가위바위 보!"
"..."
"와, 살았다."
승부는 단번에 정해졌다. 가위를 낸 베일 일등병과 샨티 일등병이 입이 귀에 걸려 있었고, 보를 낸 안젤리카 일등병이 연신 자신의 손을 저주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걸 지네."
"안젤리카 넌 어째 쓸데없는 건 이기면서 중요한 걸 지냐."
"그러게 말입니다..."
애꿎은 자신의 오른손을 두들기며 한숨을 쉬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칼라 병사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먼저 가서 짬통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막내 잘 챙겨라. 그리고 라파가 점심 준비 해놨으면 먼저 먹고 가. 짬통 버리고 먹으려면 밥맛 다 버리니깐."
"네 분대장님."
척.
대화가 끝나자 안젤리카는 바닥에 찍어 놓은 삽을 집어올려 반원을 그리면서 어깨에 걸쳤다. 그걸 본 나도 얼른 삽을 쥐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안젤리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가자, 막내야. 짬통버리러."
"아, 알겠습니다."
불만을 터뜨리던 방금과 달리 나에겐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어오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나는 살짝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그녀를 따라 소초를 향했다.
안젤리카 일등병과 둘만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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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제가 감정이입되서 좋네요.
걍 장편으로 바꿔야겠네요 근데...

  • SKEN 2018.09.28 23:52
    읽는 독자도 감정이입이 잘되서 좋습니다!
    하 정말 휴먼님은 쫄림과 달달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하시는거 같습니다.
    훈훈하고 단내나는 분위기에 방심하고 있다보면 쫄리는 분위기가 바로 훅 들어오네요.
    아무래도 아르펜이 겪는 갈굼과 길들임이 일어나는 그 분위기는 베일이 쥐고 있는거 같단 느낌이 종종 드네요!
    앞으로도 험난하며 달달하기도할 줄타기 같은 군생활 이야기 기다려집니다.
    우선 당장은 안젤리카와의 둘만의 짬 버리기 타임에..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 불꽃휴먼 2018.09.30 12:29
    저도 쓰다보니 은근히 줄타기 하는 부분 조절에 신경쓰게 되더군요.
    이런 장면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꽤나 많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