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조회 수 62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iIEy6co.jpg


나는 영주의 고아병으로 자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라이칼 영지는 아르고니아 대부분의 영지들이 그렇듯, 척박하고 추웠다. 따뜻한 보금자리가 드물었고, 하루에 세끼 이상 먹는 것을 호사라 여길 정도로 식량이 귀했다. 그래서 평민들은 끼니를 해결하기위해 항상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르고니아 영주 대부분이 위민정신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르고니아의 건국왕 알타1세는 건국초기 백성이 살아야 지도층이 살 수 있다는 위민정신을 제창했고, 이 뿌리 깊게 박힌 정신은 후대까지 깊게 내려와 대부분의 귀족들은 검소하게 지내며 겨울을 날 때마다 식량을 풀어 빈민들을 구제하곤 했다.
그것은 산으로 둘러쌓인 이 척박한 나라에 백만의 인구가 천만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동쪽에 있는 페니아를 이용한 중개무역과 식량수입이었다. 아르고니아산맥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가진 페니아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라 농업과 어업이 발달해 있었고 타국과의 무역만 잘하면 마르지 않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친 않았다. 북해는 얼어붙어 있었고 동해는 해적들의 소굴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뚫려 있는 남쪽항로 또한 풍랑이 심해 번성하진 못했다. 결국 남은 건 서쪽의 아르고니아 산맥을 통해 육로를 확보하는 방법뿐이었다.
협상은 두 나라의 건국초기부터 이루어졌었다. 국가의 기틀이 잡혀지기 전까진 배고픈 아르고니아인이 부유한 페니아의 농지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었다. 하지만 국가의 틀이 잡혀가고 두 왕이 손을 잡자 두 나라는 긍정적인 시너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아르고니아는 페니아를 위해 산맥동쪽의 초입부터 서쪽의 끝자락까지 이어지는 긴 보급로를 확보해 주었고, 페니아는 그 보급로를 이용하는 대가로 일정량의 곡식 및 생필품 등을 제공해주었다. 아르고니아 또한 페니아 상인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광물자원을 대륙에 팔 수 있게 되었다.
이웃나라끼리는 친해질 수 없다는 상식과는 반대로 두나라는 서로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이와 잇몸과 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버린 것이다.
물론 간신히 굶어죽지만 않을 뿐이지 빈민이 굶주리고 얼어죽어가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고심하던 아르고니아의 영주들은 국왕에게 청원을 통해 한 가지 제도를 마련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아병제도였다.

아르고니아는 태생부터 투쟁의 연속이었다. 산맥 안의 둥그런 분지에서부터 시작해, 몬스터들과 치열하게 싸워, 몰아내면서 국가를 만든 나라였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신체건강한 성인이면 군에 입대, 3년의 군복무를 마쳐야 된다는 의무가 따른다. 여기에는 신분고하가 없으며 심지어는 왕세자를 제외한 왕족마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현하기 위해 지휘관 복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고아들과 영지의 후계자에 관한 문제였다. 부모가 사망하면서 남은 아이들은 이 동토에선 성장하기도 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영지를 뒤를 이어야 하는 후계자가 영지를 3년 동안 비우는 것도 영주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고아병 제도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다 잡기 위해 생겨났다. 우선 영지에서 자체적으로 고아원을 운영, 교육시키며 성인까지 키운 뒤, 신체적인 조건과 자질에 따라 영주의 사병이나 집사, 시녀 등 구성원으로 영구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애초에 고아라 군복무를 비켜가는 대신 자신을 키워준 영주와 가문에 영구적인 충성을 바쳐야만 된다.
병사로 키우는 이들 중에선 가장 자질이 뛰어난 한명을 가문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를 대신해 군에 입대시키는 것이다.
양자라고는 하나 귀족가문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성을 하사받는다.
사실상 귀족으로 조기신분상승을 하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그 시험의 시기가 오면 해당조건의 상위권 고아들은 피가 터지게 경쟁했다. 그 시험이란 것도 후계자 또래여야만 한다는 운빨도 있었기 때문에 아르고니아에서 고아가 영주가문의 양자가 되는 것은 선택받은 출세였다.
그리고 나는 이 선택받은 출세의 주인공이었다.
"꿈은 아닌 것 같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목걸이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라이칼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 헤임달 가문을 상징하는 은빛 늑대가 양각된 목걸이가 손 안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여어, 아르펜 헤임달."
은발의 미남자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웃어보였다.
"잘 주무셨습니까, 알타바르 소영주님."
"이제 그렇게 안 불러도 되잖아. 이제 넌 나랑 형제인데 말이야. 안 그래 동생?"
"그건 맞는데 어릴 때부터의 호칭을 바꾸는 게 쉽진 않네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눈 앞의 남자. 알타바르 폰 헤임달은 가문의 후계자였다. 영지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이기도 했고. 이 남자는 어릴 때부터 실력향상을 이유로 또래의 고아병들과 무수히 대련해왔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대련한 게 나다.
"축하한다. 난 니가 될 줄 알았어. 설마하니 그 렉토를 쉽게 이겨버릴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야."
렉토는 양자선발 토너먼트에서 결승으로 만난 강자였다. 키가 2m나 될 정도로 컸고 덩치도 예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우람했다.
"쉽게 이기다뇨, 몇번이나 두들겨 맞고 정신이 몇번이나 아찔아찔했었는데요."
"흥분만 안했으면 녀석이 이길 수도 있었는데 긴장했는지 심하게 흥분하더라. 나는 딱 결과가 보이더라구."
알타바르가 미간에 검지를 댄 채 뱅글뱅글 돌리며 말했다. 아마 그 말은 맞을 것이리라. 그는 또래 중에서도 아르고니아 내에서 손꼽히는 천재검객이었다.
"아무튼 외아들로 지내다 동생이 생기니 형은 참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내일이냐?"
"네. 내일이네요."
입대일을 말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일이 군징집 소집일자였다. 아르고니아에선 19세이상이 되면 소집대상자에 해당하며 22세가 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지원을 하지 않으면 강제로 차출당한다. 사실 1년 정도 여유를 두고 내년에 입대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왕 맞을 매는 일찍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바로 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 휴가는 있다냐?"
"네. 해마다 6박7일 정도의 고정휴가가 있다고 하더군요."
"망할. 와서 하루 자면 돌아가야겠네. 어째 동생이 생기자마자 떠나냐?"
아쉽다는 투로 날 바라보는 알타바르였다. 난 머리맡에 놓아둔 연습용 방패를 들며 웃어보였다.
"전역하면 제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래. 넌 방패 다루는 솜씨 하나만큼은 나보다 낫지. 그나저나 뒤에 뭐 붙여야 할 말 없냐? 호칭?"
"아, 네, 혀, 형님."
아무리 바꾸라곤 해도 10년이 넘게 불러오던 호칭을 바꾸는 게 참 쉽지는 않은가보다. 하지만 알타바르는 내 어색한 말에도 활짝 웃었다.
"그래, 그까짓 3년이 대수냐. 전역하면 맨날 하던 사냥이나 하러 다니자고."
"당연하죠."
알타바르나 나나 사냥을 참 좋아했다.



----



다음 날, 나는 훈련소를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망할 녀석. 벌써 가느냐?"
"휴가 때 뵙겠습니다, 영주님."
무장한 채 말에 탄 40대의 중년인이 혀를 찼다. 알타바르가 20년 늙으면 딱 나올법한 얼굴을 가진 남자.
이 분이 바로 헤임달의 영주이시자 내 양부인 카시오 폰 헤임달이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말에서 내려 단검 하나를 건네었다.
"받거라."
"이, 이건...."
검집을 살짝 열어본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단검의 검신에서 거무튀튀한 빛이 났다. 광물로 유명한 아르고니아에서도 귀한 흑철. 영주님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어찌 이 귀한걸 저에게..."
"예끼 이놈아! 명색이 영주인 내가 어제 생긴 자식놈을 그냥 보낼 줄 알았더냐? 어디 가서 눈 먼 고블린놈한테 칼빵 맞지 말라고 주는 것이니라."
"영주님..."
괜시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날 물끄러미 보던 영주님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문이 안날 뿐이지 복무 중에 뒈지는 놈도 많다더구나. 꼭 살아와서 저 철 없는 알타바르 놈이나 잘 지켜주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땐 그 놈에 영주님 호칭도 좀 바꾸고."
말을 마친 영주님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다시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난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입소하는 이들이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훈련소로 가는 길은 꽤나 멀고 험난했다. 말과 사람의 휴식을 위해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일정의 반복이었다. 나는 스무여명이 빼곡히 앉아 있는 대용량의 마차밖 경치를 감상하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고,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착한 시기는 아마 출발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자랑스러운 아르고니아군에 입대한 것을 축하한다 제군들."
훈련소장은 백발이 성성한 60대의 노인이었다. 그는 열 맞춰 부동자세로 선 훈련병들에게 장장 10여분에 걸친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연설을 벌였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훈련소에서의 신체검사는 달리기, 시력검사, 팔굽혀펴기 등등 최소한의 전투수행능력을 확인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아르고니아에서 군복무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일이었고, 탈락한다는 건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은 입대하기 전에 어느 정도 신체를 갖추기 마련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극소수의 약골은 소수 있었다. 탈락판정을 받은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는 마차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옥석가리기가 끝나자 본격적인 훈련여정이 시작되었다. 훈련조교들은 우리에게 아르고니아군의 계급체계부터 가르쳐주었다.
병사계급에는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 병사장이 있었다. 기본적인 3년복무기간 동안에는 병사장이 갈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었고, 그 뒤에는 장기적인 군인이 되는 간부가 있었다. 투사계급과 위관계급으로 갈리는데 각각 일선에서의 전투와 부대의 지휘를 담당하는 계급이었다.
아르고니아는 타국과는 달리 보급로의 사수와 산맥경계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50명이 한개의 소대가 되고 10개의 소대가 1개의 대대, 10개의 대대가 1개의 사단, 3개의 사단이 1개의 군이 되는 독특하면서도 디테일한 구조였다. 총 3개군 약 4만7천의 전력이었는데, 보급로 사수와 산맥경계에 투입되는 게 2개 군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타국을 침략할 전쟁수행능력은 없었다.
일정이 빡빡한 탓이었을까. 한달 정도의 훈련병 생활은 금방 지나갔다.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고, 능력평가 및 자대배치를 받는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
'어떤 부대에 가게 될까.'
나는 살짝 들떠 있었다. 근접전, 사격전, 기동성 등등 여러 분야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아마도 제일 정예만 간다고 하는 수도의 1군에 가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내 차례가 왔다.
"아르펜 헤임달."
"넵."
"2군 까마귀 사단."
"..."
마음이 쓰라려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2군은 남쪽 보급로 사수와 그 일대 경계가 주임무였고, 까마귀사단은 그 중에서도 예티가 가장 많이 서식한다는 서부산맥을 담당하는 부대였다.
즉, 지옥행 티켓이다 저건. 모 아니면 도라더니, 그쪽도 최정예 병사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 홍차매니아 2018.08.21 00:16
    술술 읽히고 풍부한 표현력의 문장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엇그제 먹은 호주에서 비싸게 사온 쉬라즈 와인이 생각나는 글이군요.
  • 반딧불 2018.08.21 00:17
    아니... 이게 소설이군요...
    할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럽게 흐르는 문장들이라,
    몰입도 너무 잘되고.. 저는 언제쯤 이런 필력을...
  • PORSCHE 2018.08.21 00:19
    인물들의 대사가 자연스러워 좋았습니다.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전개가 읽기 편해서 한번에 읽었네요.
    훈련소 재입대하는 기분마저 들어서 섬짓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