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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잉

새하얀 눈보라가 사선으로 떨어지는 산속,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설원은 달빛만이 그 자취를 드러내주고 있었다.
눈이 깊게 쌓인 산은 가파른 능선을 따라 높은 철책선이 늘어세워져 올라가고 있다. 능선의 정점에는 눈을 뒤집어 쓴 망루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하얀 털옷을 입고 검과 활로 무장한 이들이 있었다.
그 둘 중 한명이 나다.
아르펜 헤임달.
방년 20세. 산악국가 아르고니아 제2군 까마귀사단 213부대 소속의 병사이다.
그리고 내 주임무는... 경계다.
"이놈에 눈보라는 그칠 줄을 모르네."
나는 망루 밖으로 빗발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짧게 탄식했다. 12월의 한겨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음울한 분위기의 하얀 설원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늑해질 것만 같다.
시선을 돌려 망루의 반대편 구석을 보았다. 나보다 한참 작은 덩치의 병사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면 얼어죽는다. 일어나 라나."
"우웅...아르펜 일등병님."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털모자를 쓴 머리를 매만지던 라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지만 마음을 다 잡았다. 이제 들어온지 일주일 된 신병이기 때문이다.
이곳 최전방 경계지대에서의 신병은 귀하다. 물론 어느정도의 길들이기는 필요하지만 신병이 적응할 정도의 여유는 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르고니아의 블리저드 가드(Blizzard Guard)는 하는 일이 워낙 고되기 때문에 선후임간에 작은 배려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이 녀석은 관심병사라고 했지.'
신병을 소초에 데려다주는 인솔장교가 한 말을 곱씹으며, 나는 라나를 향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무시간 다 됬어. 슬슬 소초로 돌아가자."
"진짜요? 그럼 가서 푹 잘 수 있겠네요?"
꿈속을 헤메고 있더니 금세 정신이 확 들어 해맑아지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천천히 사다리를 타고 망루를 내려온 뒤, 철책선 뒤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번 말하지만 조심해라. 정신줄 놓고 있다가 넘어져서 다치는 신병 애들 태반이다."
"넵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라나가 내 뒤를 따랐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으레 하는 말일 뿐, 별 걱정은 없었다. 관심병사이긴 했지만 라나는 이번에 온 신병 중에서 운동신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으니깐 말이다.
"눈보라가 아까보다는 잠잠해져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근무시간 다 되도 눈보라가 심해서 초소 안에 몇 시간 동안 갇혀 있는 경우도 많거든."
"진짜요? 그러면 엄청 무섭겠네요. 좁은 초소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처음이야 무섭지 나중에 가면 그냥 지겹고 그래."
"춥고 배고프고 말이죠..."
말이 많은 걸 보니 살짝 겁이 나는가보다. 아마 들은 게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 철책선 바깥은 무법지대니까. 아이스 고블린, 아이스 트롤과 예티족이 먹잇감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동네다. 
물론 신병인 녀석은 운좋게도 아직까지 만난 적은 없다.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신병은 언젠가는 '신고식'을 치뤄야 한다.
"쉿."
그게 오늘인가보다. 나는 계속 말을 붙이던 라나에게 다급히 손을 올려보이며 멈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라나는 눈이 동그래진 채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등에 멘 활을 꺼내들 고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시위에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하늘을 보았다가 미간을 좁히며 전방으로 활시위를 당긴 채 천천히 소리가 난 부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키에에에엑."
가까이 다가가니 어둠속에서 인영의 정체가 드러났다. 1m 살짝 넘을 것 같은 작은 키에 연두빛이 감도는 하얀 몸뚱이. 그리고 찢어진 눈과 들창코가 인상적인 흉측한 얼굴.
"아이스 고블린이네."
면밀히 살펴본 나는 팽팽하던 시위에서 힘을 거둬들였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덜 자란 녀석 같았다. 전사등급도 아니고. 아마 굶주려서 먹이를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철조망에 몸이 들러붙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라나를 응시했다.
"고, 고, 고블린이네요?"
"응."
라나는 말을 더듬으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낸 뒤 거꾸로 쥐어 라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내 울대 밑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를 밑에서 위로 살짝 비스듬하게 찌르면 한방이야. 마침 잘 됬네. 살아있는 과녁이니깐."
"...나, 나중에 하, 하면 안되겠어요...?"
"지금 당장 죽여."
내 말투는 냉랭했고 표정은 험했다.
"블리저드 가드라면 누구나 다 하는 신고식이다. 라나 그레이스 이등병."
길을 터주었다. 주춤주춤 거리던 라나는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 채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길게 심호흡을 하며 고블린 앞으로 다가갔다.
"키엑, 키에에엑!"
의사소통 안되는 고블린이지만 감정은 느낀다. 라나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보고선 난리발광을 떨어댄다. 하지만 철망에 피부전면이 들러붙어 있는 녀석에겐, 애초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긴장한 채 고블린을 바라보던 라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내가 준 단검을 두 손으로 쥔 채 힘껏 찔렀다.
푸욱.
"키아아아아아!!"
"힘 제대로 안주냐? 눈 똑바로 뜨고 네가 죽이려는 상대를 마주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라나는 내가 소리치자 다시 눈을 떴다. 이를 악 문채 왼손바닥으로 자루끝을 밀며 칼날을 더 쑤셔박았다. 고블린의 보라색 피가 뿜어져 사방을 적셨다.
소란이 잠잠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목을 찔려 가래끓는 소리를 내던 고블린은 이내 축 늘어져 최후를 맞이했다. 단검을 뽑아낸 라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라나에게 다가갔다.
"왜 거기서 주저앉아. 니 옷에 피묻어 임마."
"으헝엉... 아르펜 일등병님."
긴장이 풀리자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다. 다가가자마자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살짝 난처했지만, 이내 라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옷에 피묻어 임마..."
귀환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게 뻔히 보이지만, 한동안 녀석을 진정시켜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기는 추웠지만 수놓아진 별은 아름다웠다.
"3년 동안 자주 겪을 일이니까 익숙해져야 돼."
"네..."
난 앞이 깜깜한 이 어린 소녀병사를 토닥여주며 전역날짜가 언제인지를 세아려 보았다.
2년 하고도 6일이 남았다.
"난 또 언제 전역하냐..."
문득 신병으로 처음 입대하던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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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올려보네요 ㄷㄷ
  • PORSCHE 2018.08.19 19:25
    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전개가 너무 좋았습니다. 혹한에 휩싸인 풍경이 정말 춥다고 느껴지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 반딧불 2018.08.19 19:32
    풍경 묘사나 행동에 대한 감정표현이 명확하시네요
    글쓰시는게 예사롭지 않네요..
    어디서 이런 괴수분이...
  • SKEN 2018.08.20 20:43
    첫편으로 자연스럽고 무겁지 않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이후를 기대하게하는 내용과 소재가 너무 좋게 어우러져있네요!
    기타 내용에 대한 감상은 위의 2 댓글과 같은 생각입니다!
    앞으로 오랜만에 보게될 불꽃휴먼님의 소설 기대됩니다!
  • 홍차매니아 2018.08.20 23:51
    가본적없는 겨울철 최전방의 묘사가 ㄷㄷㄷㄷ
    블리저드 가드(Blizzard Guard) 라고 읽고 GOP 라고 읽나요? ㄷㄷㄷ
    레카 유일 출판작가가 될수도 있었던 분의 저력을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