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GE : 프롤로그 -5-
프롤로그의 끝이며 다음부터 본편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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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E : 프롤로그 -5-
방 안은 넓고 복층으로 되어 도서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책장이 펼쳐져 있었고, 어디서 자라 나온 것인지 모를 책장 위 사이사이의 나뭇가지들이 데코레이션처럼 뻗쳐있었는데, 마치 방안에 자연풍경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환상같은 이 경관들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입도 다물지 못하고 주변을 구경하는데 한참동안 혼이 쏙 빠져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것들을 믿어야 하는 걸까, 점점 더 알 수가 없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에 나뭇가지들이 내려와서 방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도 바닥에는 나뭇잎 한 점 떨어진 것 없이 말끔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나를 끝까지 지켜보며 문이 스르륵 닫히는 순간까지 에이리아는 멈춰서 있었다.
“순수한 네츄럴 게이지...”
에이리아가 짧게 뭔가를 읖조렸지만 나와는 거리가 꽤나 있어서 들리진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에이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성숙한 비서같은 이미지를 가진 에이리아를 보면서 뭔가 가슴 뛰는 느낌도 더러 들었다. 솔직히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장 위로 복층의 난간에 기대어 있는 마스터 엘로드가 나를 맞이했다.
“많이 신기한가?”
엘로드의 무겁고 부드러운 어조는 정신팔려있는 나를 정신차리게 만들어 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향해 멋쩍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올라오렴.”
우측으로 보이는 아이보리 대리석 계단이 멋들어지게 나 있어서 올라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조심히 계단을 딪고 올라섰고, 윗층에선 들어왔던 양문의 문양과 비슷한 나뭇가지 모양의 프렉탈 형태의 패턴들이 멋들어지게 장식되어있는 탁자와 의자들 앞에 엘로드가 서있었다.
“자 여기에 앉으렴.”
“네..”
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엘로드가 안내하는 의자에 앉아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엘로드와 여기저기를 번갈아보았다. 그런데 엘로드는 아무말없이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엘로드의 시선에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좀 있다가 엘로드가 침묵을 깼다.
“지금 기분이 어떻니.”
“네?”
엘로드의 질문에 그의 눈동자로 시선이 향했다. 올곧고 청렴할 것만 같은 흔들림 없는 엘로드의 눈동자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것들이.. 이상해요...”
“그렇구나. 그런데 네가 경험한 것들은 진짜이거나 진짜가 아니야.”
“네?”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말이었다. 진짜이거나 진짜가 아니라니? 그리고 엘로드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어린 네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렵겠지만. 네가 본 것들은 모두 진짜가 맞아.”
나는 대답없이 엘로드의 말에 경청했다. 그 태도에 엘로드는 내가 이어서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지 한듯했다.
“그런데 진짜가 아니라는 말은. 우리같은 존재들이 말하는, 공간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단다.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도 현실이고, 공간을 벗어나게 되면 현실이 아니게 되는 거지.”
그리고 엘로드는 나의 어깨를 가리켰다.
“네가 죽지 않는 한은 공간에서 벗어나면. 네가 당했던 그 모든 것들은 가짜가 되어버려. 그래서 네 어깨에 상처가 없는 이유가 그렇단다.”
대부분은 대략 어떤 의미로 말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공간이라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이 있다라는 식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내 생각을 짐작한 듯 엘로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게이지 능력자라는 존재들이란다. 네가 귀신을 믿건, 믿지 않건 그런 하나의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란다. 그리고 너를 습격한 그 나쁜 사람이 초능력이라던가 불가사의한 능력을 발휘했을 거야. 바로 그런 능력자들이 능력을 유일하게 발휘할 수 있는 곳이 공간(空間)이라는 곳이야.”
문득 내가 습격을 당할 때의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벽으로 인해 더 나아갈 수도 없었고,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던 곳. 그곳이 공간이라면 능력자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지만 않고 나온다면. 너의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아.. 그렇단 말은...”
“그래. 거기에서 너를 꺼내온 건 바로 나란다.”
그렇다면 잠들기 전에 만났던 그 남자는 바로 엘로드였구나. 내가 잠들게 한 다음 나를 그 공간에서 꺼내줬구나...
“가.. 감사합니다..”
“고마울 건 없어. 우린 우리가 할 일을 한 것이란다.”
“네?”
엘로드는 몸에 힘을 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말을 이어갔다.
“공간을 만들어서 그렇게 사람들을 습격하는 능력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조직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막는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런 나쁜 악당들이 사람들을 해치고 나서야 도착하는 게... 사실 더 많아.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녀석들을 끊임없이 막아내야 하지.”
엘로드는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았고, 다시 정자세로 몸을 일으키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무서웠던 순간 때문에, 게이지 능력자로 각성했단다.”
“네?”
내가 능력자로 각성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반문에 엘로드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결정해야 한단다. 게이지 능력자가 되어 앞으로 나쁜 사람들을 막는 삶을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네가 경험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현실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
“저기... 제가 능력... 자...라는게... 그, 그런게... 잘...”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결정하게 된다면 나에게 알려다오. 그리고 이건 미리 경고하는 거지만.”
경고라는 말에 나는 바짝 긴장하며 엘로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공간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여기에 있던 일들을 누구에게든 얘기한다면, 정말 네가 위험해질 수 있을꺼야. 약속해 줄 수 있지?”
지금 내가 겪었던 일들을 발설하면, 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강한 경고였다. 그리고 엘로드의 말에서도 진중함이 묻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네가 능력자가 된다고 선택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궁금한 사항들을 알 수 있게 될거야.”
“네..”
엘로드가 산뜻하게 양쪽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벌떡 일어나며 경쾌하게 얘기했다.
“자, 늦었으니 너도 이제 집에 가야겠지?”
엘로드가 집까지 배웅해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에 에이리아와 마찬가지로 엘로드 역시 묵묵하게 있을 뿐이었다. 얼마되지 않아 1층에 도착해서 내가 있던 병실 옆으로 정문이 보였다. 건물 중앙의 계단을 뒤로 한 채 쭐래쭐래 엘로드의 뒤를 따라가며 정문 현관으로 향했고, 정문 주변 인테리어가 전부 강화유리로 되어있었는데도 밖의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유리 안쪽으로 따스하게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와중에도 이곳은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로웠다. 그리고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채 이마 위의 머리칼을 헤어밴드로 묶고 있는 여자가 슬리퍼를 신고 짝다리를 하며 게슴츠레 엘로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여자를 향해 엘로드는 인사를 했다.
“여어 바이스”
“여어는 무슨 여어냐, 잠꾸러기 아저씨.”
가까이 가보니 바이스라고 불린 이 여자는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꽤나 어정쩡한 자세로 엘로드를 맞이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건가?”
“얜 뭐야? 겁나 꼬맹이 같은데 설마 능력 각성자인가”
바이스는 마이페이스를 가진 여자인 듯 했다. 엘로드가 묻는 말이라던가 제대로 대답하는게 하나도 없었다.
“아, 이 아이는 나중에 알려줌세.”
“아아, 아직 결정을 안했나보지?”
심드렁하게 자기할말을 다하는 바이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엘로드가 오히려 화가 날법해 보였지만, 엘로드는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인자하게 바이스를 대했다.
“음.. 그렇다네. 그리고 지금은 배웅을 해야하니, 필요한 게 있다면 나중에 말해주게나”
“뭐 길게 얘기할 건 아니고, 길드 자공간 안에 맥도날드를 넣어볼까 하는데...”
엘로드가 멈춰서서 바이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허가를 받아야 하니까 윗선에 잠꾸러기 아저씨가 좀 받아줘. 잠꾸러기 아저씨 유명하잖아?”
바이스가 자꾸 엘로드를 잠꾸러기 아저씨라고 부른다. 이 아저씨 진짜 잠꾸러기 인가? 엘로드는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일단 서류 작성해서 에이리아에게 넘기게. 그리고 검토해보고 협회에 올려줄 터이니.”
“옛써”
바이스는 엘로드에게 어색한 경례 제스쳐를 장난스럽게 취했고, 엘로드는 개의치 않고 내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던 바이스가 나지막히 읖조렸다.
“내 공간에 들어온 이상한 느낌을 가진 녀석이 바로 저 녀석이었나...”
엘로드의 손을 잡고 정문을 통과하며 하얀 빛 무리가 내 눈을 찔렀다. 나도 모르게 손을 치켜들어 눈을 가렸고, 그 사이 이상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오르페우스’
“응?”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귀에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던 찰나에 문 밖으로 나왔는데, 여기서도 나는 까무러칠 뻔 했다.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웬 처음 보는 골목이었는데 그런 거대한 건물이 있기엔 너무 협소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려보았는데, 여기서 더 까무러칠 뻔 했다. 그저 회색 담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에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 이건 뭐야!”
엘로드는 멈춰서서 내게 시선을 향했고, 뒤늦게 나는 천천히 엘로드에게 시선이 향했다.
“아, 아니... 방금.. 그... 이건...”
“하하 건물말이지? 그건 네가 만약 게이지 능력자가 된다면 알려주마. 지금은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
“아... 네...”
게이지 능력자가 되어야 이것저것 알려줄 수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분명한 건 내가 게이지 능력자라는 것이고, 만약 능력자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간의 신비한 일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선택을 나는 해야만 한다는 골똘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엘로드는 나를 이끌고 골목을 꺽자마자 나오는 건물의 주차장의 지하로 들어섰다. 그 건물은 6층 대의 병원건물이었다. 왜 이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가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그저 엘로드가 이끄는 대로 갈뿐이었다. 지하주차장 중앙을 거쳐서 구석에 검은색 세단이 세워져 있었는데, 엘로드는 그 차의 조수석으로 간뒤 손잡이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삑삑하는 소리와 함께 차문과 백미러가 열렸다.
“이리와”
엘로드가 부르는 말에 나는 아무말없이 엘로드의 앞으로 쭐래쭐래 갔고, 내가 오자마자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며 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나는 나지막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엘로드가 운전해서 가는 동안, 엘로드의 성격답게 굉장히 스무스하고 안정적으로 운전했다. 출발하는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골목에서 얼마 나오지 않아서 큰 대로변이 나왔고, 주변 풍경을 보니 집에서 5~6정거장 되는 곳인 듯 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적막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는데, 4거리 신호등에서 붉은 신호등을 받고 차량이 멈춰 서자마자 엘로드가 입을 뗐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해해 줄꺼지?”
“...네”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나지막히 대답했고, 엘로드는 나를 한번 바라본 뒤 운전을 위해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있던 일들은 부디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물론 어렵겠지만 말이야.”
나는 아무말없이 엘로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처했던 위험들은 그저 꿈이라고 생각해도 돼.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먹어.”
“... 노력해... 볼게요.”
나의 대답에 엘로드는 나를 슬적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가고 나서야 집 앞에 도착했고, 엘로드는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다시 나지막히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가 넘겨있는 것을 보고 부모님께 혼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그리고 아파트 3층의 끝자락까지 가는 동안 엘로드는 나를 지켜보았고, 내가 문을 열자마자 부모님이 뛰쳐나오며 어딜 갔다왔냐며 야단치는 와중에도 그 자리에 엘로드가 있을까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난간너머로 엘로드가 있던 곳을 살폈다. 그리고 시선이 닿는 곳엔 엘로드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느낌이 왠지 너무나도 좋게 느껴졌다. 덕분에 오늘 부모님께 혼나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나저나 부모님께는 뭐라고 핑계대지?
부모님께 한참이나 거짓말로 둘러대고 나서야 자유로워 졌다. 내방에 들어가 냉큼 옷부터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 물을 맞으며 낯선 남자로부터 어깨를 찔리던 느낌이 불현 듯 살아났지만, 아무리 어깨를 다시 봐도 칼에 찔린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물을 맞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도 한참동안 오늘 있던 일들을 생각했다. 낯선 남자가 나를 죽이려 했던 일, 그리고 이상한 물에 휩쓸리고 피바다가 덮치는 꿈을 꾼 것.. 거대하고 신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나와 보니 그런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이게 현실인지 조차 감이 오질 않았다. 오히려 내가 현실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능력자가 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해야하는 고민 속에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 찰나에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오르페우스’
속삭이는 말소리에 깜짝놀란 나는 눈을 떴는데, 이미 해가 밝게 떠서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곧바로 알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일어나~ 일어나~]
귀찮은 듯 뚜벅뚜벅 일어나서 자명종의 버튼을 눌러 알람을 끈 다음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골똘히 어제 있던 일들을 다시 상기했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게이지... 능력자...”
그리고 문득 잠결에 들었던 속삭이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도통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다시 정리하려 했지만, 학교를 가야할 시간이 되었기에 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학교를 나서기 전까지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꾸중에 할 말이 없어서 네네와 핑계를 반복하다 통학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학교에 가는 와중에도 어제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상기해내고, 고민했다. 솔직히 능력자가 뭘 뜻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능력자라는 것에 대해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뿌리치고 머리를 긁어대며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단 하루 동안이지만 학교라는 고통에 대해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진들의 비아냥을 들으며 괴롭힘을 당했고, 가지고 있던 용돈마져 뺐기며 절망감은 나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용돈을 뺐기고 나서 이상하게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갑자기 반쯤 미친 사람처럼 내 돈을 뺐었던 일진 녀석에게 다가가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내 돈! 내놔..”
“뭐?”
“내 돈 내놓으라고!”
“이 새끼가 미쳤나”
말이 끝나자마자 일진 녀석의 주먹이 내 광대를 향했다. 일진 녀석이 내지른 펀치에 나는 아주 쉽게 꼬꾸라졌고, 일진 녀석들 여럿이 주변에 모여 나를 툭툭 발로 차며 말했다.
“니 돈이냐? 내 돈이야 이 새끼야! 이게 진짜 간땡이가 부웠네?”
척 보기에도 인상이 좋지 않은 일진 녀석이 쪼그려 앉아 나의 뺨을 수차례 때리며 말했다.
“오늘, 끝나고, 보자”
“병신 새끼”
“지렁이가 꿈틀했나? 키득키득”
일진 녀석들은 그렇게 바닥에 꼬꾸라진 나를 발로 툭툭 차고 지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은, 정말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학교 마지막 수업이 마치고 종이 울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일진 녀석들은 내 멱살을 잡은 채 사람의 왕래가 적은 학교 뒷골목으로 끌고가 나를 내팽개치며 여럿이 동시에 욕짓거리를 하며 나를 구타했다. 이렇게 맞을때마다 무섭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만큼은 뭔가 달랐다. 맞으면서도 오히려 악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저항할 힘은 없었기에 저 녀석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내게 수차례 폭력을 가하고 나서야 일진 녀석들은 멈추어서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병신새꺄, 내일까지 이 돈의 두배를 못가져 오면 오늘의 두배로 쳐맞는다 알겠냐? 야, 가자”
일진 녀석들은 가는 끝까지 내게 욕짓거리를 퍼부우며 비웃었고, 나는 그저 골목의 벽에 고개를 기댄채 바닥에 몸을 뉘였다. 이렇게 있으니 어제 있던 죽을 뻔했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묘하게 비슷하다. 그런데 어제는 정말 죽을 것 같았고, 저 쓰레기 같은 일진 녀석들은 그 정도의 배포가 있는 녀석들은 아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은 오히려 악에 받치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누워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굳게 결심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멍투성이가 된 얼굴로 길을 나섰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어제 엘로드와 나왔던 길을 향해 걸어갔다. 차로 갔던 대로변부터 먼저 되돌아가며 지하주차장에서 나왔던 병원을 찾아해맸고, 50분 정도를 걷고 나서야 그 병원을 찾아내었다. 병원 뒤편에 차량이 나오는 길목을 향해서 들어간 뒤, 정면으로 보이는 3거리 골목에서 곧바로 좌측으로 향했다.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와중에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것이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현실에서 오히려 신선함과 나의 길을 찾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영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영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주저없이 골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로드와 나와서 봤던 익숙한 회색 담장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앞을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도통 들어가지질 않았다. 한참동안 그곳을 배회하고 난 뒤 쪼그려 앉아서 생각했다.
‘어제 봤던 것들은 꿈인가?... 도통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앞에서 또각또각하는 구둣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골목 벽 너머로 누군가의 인영에 집중했는데, 점차 인영이 가까워지더니, 다행스럽게도 어제 봤던 에이리아였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에이리아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너는”
에이리아가 문득 멈춰서서 내게 시선이 향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더니 급히 내게 달려와서 얼굴을 매만졌다.
“너 얼굴이 왜이래”
“아, 별거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자”
에이리아는 즉시 내 소매를 잡아 이끌었고 곧바로 회색담장을 향해 당차게 걸어갔다. 나는 그것을 보며 기겁했지만, 그 걱정이 얼마 가지 못하고 나는 전에 봤던 그 건물 속에 들어와 있었다. 에이리아는 나를 병실로 끌고 간 뒤 누군가와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는 병실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연고같은 것들을 들고와서 내 얼굴에 살살 발라주기 시작했다. 에이리아는 나보다 한참 위의 누나지만 왠지 성숙하고 참한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는 그 부드러운 손길에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이리아는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그 덕분에 나도 모르게 헤벌레 웃고 말았고, 그 표정을 에이리아는 보았는지, 슬쩍 미소를 띄웠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온거니?”
에이리아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결정했거든요.”
에이리아가 손길을 멈추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결정을 하러 온거네.”
“네..”
에이리아는 손수건을 꺼내서 급히 내 옷을 털어주며 말했다.
“꽤나 빨리 결정했네. 그리고 다행이야. 지금 마스터가 계시거든.”
나는 에이리아의 말에 가만히 집중했다. 그리고 에이리아는 나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며 나를 일으켰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너의 선택이고. 그게 중요한거야.”
“네.”
“자, 그럼 결정을 마무리하러 가자.”
“네!”
곧바로 에이리아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도달했고, 전에 보았던 그 양문 앞에 바로 섰다. 그리고 문을 들어가기 전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에이리아는 전과 같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곧게 선채 나를 응시했다. 그런 에이리아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양문을 밀어냈다.
신비로운 나무로 장식된 책장을 지나 엘로드를 만났던 복층을 향했다. 계단 위를 거침없이 올라가 엘로드를 찾았다. 그런데 엘로드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리아의 말대로라면 엘로드는 있어야 했다. ‘책을 찾으러 책장에 갔나...?‘ 라고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층의 안쪽에 있는 의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을 했는가 소년이여?”
엘로드의 질문에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네.”
“그 선택은 돌이킬 수가 없다네. 그런데도 선택을 하겠는가 소년이여?”
이어진 엘로드의 질문에도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네..!”
“자네는 지금 결정한 이 것은 곧바로 이행하게 될 걸세. 그것이 게이지 능력자가 되든. 아니든. 알겠는가 소년이여?”
“네!”
그리고 의자가 빙그르르 돌며 엘로드가 내게 모습을 보였다. 위엄있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엘로드의 자태, 그리고 근엄한 엘로드의 목소리는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소년이여. 게이지 능력자가 되어 평범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삶을 살던 한 소년으로 돌아갈 것인가?!”
엘로드의 목소리에 의자 주변으로 무언가 일렁거린다. 그 일렁거리던 기운은 점차 밝아지며 하얀 불꽃과 같이 더욱더 세차게 일렁거린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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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가 되겠습니다!”
엘로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환영하네! 소년이여! 게이지의 세계에 온 것을.!”
Who's 반딧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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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지극히 아이다운게 현실적이면서 좋았고 4,5편에선 다른 인물들의 묘사나 행동들이 나와 또다른 흥미를 유발하는게 좋음! 캐릭터의 성격이 잘묻어나는듯 1인칭 능력자들이 많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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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가 느껴져서 좋네요.
근데 엘로드의 말투가 무척 꼬장꼬장한 7,80대 할아버지같다는 느낌을 받는건 저뿐인가요? ㅋㅋ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과 엘로드의 심리묘사를 점처리하지말고 표정과 행동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프롤로그 초반과 달리 하나둘 궁금증이나 세계관에 대한 내막이 보이니까 점점 몰입하기 쉬운 것 같다.
인물들도 매력적이고 극의 전개가 알차서 재밌다! 본편 기대한닷!
그리고 맥도날드 뭐야ㅋㅋㅋㅋㅋㅋㅋ 개그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