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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5,6은 아직 퇴고가 안되었어요.

이상한 문장 또는 오타 제보 부탁드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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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e_index.jpg


6. 멜리나와 아가시아(6)

 

롤랑의 시선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벤치로 향했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그곳엔 인영만 가까스로 보일 뿐이었다. 롤랑은 눈물이 범벅인 얼굴을 소매로 슥닦고 이를 앙다물었는데 뿌득뿌득하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 올 정도로 분노가 가득해보였다. 벤치에 앉아있던 남자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롤랑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는 거야? 약해빠졌네

굉장히 무덤덤해 보이는 남자의 안광엔 붉은 빛만 흘러나왔다. 이내 롤랑이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억누르는 모습이 보였는데도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아,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게이지 능력자라서 맛있을 줄 알았더니, 그렇게 맛있진 않더라고. 단지 나의 힘을 조금 보충한 정도랄까

남자가 비웃는 듯이 조소를 흘렸다. 그 모습에 롤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튀어나가며 플레뢰를 찌를 기세를 보였다. 그런데 남자는 여유롭게 주저앉아 땅바닥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먹이가 알아서 들어오네

분노에 가득 찬 롤랑이 남자를 꿰뚫어버릴 기세로 플레뢰를 쏘아 보냈다. 특별한 공격 자세가 없는 남자를 보며 롤랑은 승리를 예감했다.

잡았다!!’

그런데 남자가 땅바닥을 잡아뜯어내듯이 흙을 통째로 들어 올려 플레뢰를 막아냈다. 땅에서 떨어져 나온 흙덩이가 꾸물꾸물거리며 찰흙이 뭉쳐지듯이 동그란 형태가 되더니 플레뢰와 같이 굳어버렸다. 롤랑은 안간힘을 써서 빼내려 했지만, 박혀버린 플레뢰는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롤랑이 난처한 틈에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손에 든 흙덩이를 가볍게 밀어냈다. 깃털같이 날아드는 흙덩이를 보며 롤랑은 가벼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땅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흙덩이는 가벼울 수가 없었고, 막아내기는 커녕, 묵직한 흙의 무게를 버틸 재간이 없던 롤랑이 흙덩이의 충격에 튕겨져 나가며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나마 다행인건 흙덩이가 롤랑을 깔고 지나가지 않았기에 살 수 있었지만, 기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남자가 슬금 일어나며 다가오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기에, 힘들어도 억지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어두운 다리 밑을 지나 달빛이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칼과 다듬지 않은 수염들이 지저분해 보였고, 늘어진 뱃살이 뚱뚱하게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굉장히 지루해 보였다.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로부터 도망치라는 신호가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문득 짓이겨진 아이들의 시체가 이해가 됐다. 저런 돌덩이를 내려친다면 짓이겨지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의 죽음 앞에 분노가 차올랐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남자를 상대할 수 없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게이지의 세계에서 능력차이로 인한 갭은 웬만하면 좁히기 어려웠다. 롤랑은 그런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야했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마자 남자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산책로 옆에 서있는 벽에 다가갔다. 손을 대고 벽을 잡아당겼는데, 벽이 손에 달라붙어 찰흙처럼 뜯겨져 나가며 가뿐하게 들어 올리더니, 남자의 몸집만한 돌덩이로 완성됐다. 저런 돌덩이에 맞았다간 온몸이 으스러져 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롤랑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가 싶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 뭐야. 도망치는 거야? 재미없네...”

롤랑은 달려가면서 슬쩍 돌아보았다. 남자가 어깨를 당기며 냅다 돌덩이를 던졌는데, 마치 셔틀콕이 날아가듯이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해왔다. 롤랑은 돌덩이를 피해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돌덩이가 땅에 닿자마자 폭탄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후폭풍이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충격이 일어났는데 귀가 멍해질 정도였다. 롤랑은 그런 고통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냅다 달려 나갔다.

아이씨, 쥐새끼처럼 너무 잘피하네

남자는 다시 허리를 숙여 바닥에 깔린 충격방지용 고무패드를 잡아뜯어내기 시작했다. 고무패드는 물결처럼 요동치며 롤랑에게 달려들었지만, 다행히 발에 닿기도 전에 바닥패드는 잘려져 나갔다. 예측을 불허하는 남자의 능력에 롤랑은 이따금씩 그를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손에 잡힌 고무패드를 패대기치며 튀어 오르게 만든 다음 손안으로 깊숙이 당겼는데, 고무패드가 말아들며 공처럼 변했다. 거인이 있다면 이런 크기의 농구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크기였다. 남자는 곧바로 롤랑을 향해 볼링 하듯이 공을 굴렸다. 탄력을 받은 거대한 공이 금새 그의 뒤로 접근했지만, 즉시 방향을 틀어 공을 피해냈다. 아니 피해낸 줄 알았다. 롤랑이 방향을 틀 것을 예측한 남자가 축구공만한 돌덩이를 미리 던져 거대한 공의 측면을 맞췄는데, 공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며 롤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공의 측면에 맞고 튕겨져 나갔는데, 5m는 족히 날아갔지만, 죽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수준이었다. 남자가 다시 돌덩이를 만들어내려 벽에 다가섰는데, 그사이 롤랑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산책로의 튀어나온 벽을 끼고 트랙을 돌았다. 숨을 만한 곳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개천가 주변에 뻗어있는 갈대밭에 얼른 몸을 숨겼다. 롤랑을 잡았다고 생각한 남자가 거대한 돌덩이를 든 채로 여유롭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롤랑이 보이지 않자 남자는 롤랑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고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갈대밭 근처에서 서성거렸는데 롤랑의 심장이 터질뻔 했다. 남자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간 사이 롤랑은 재빨리 신발 한짝을 주택가 언덕 쪽으로 집어던졌다. 어두웠던 데다가 마침 맞은편에 계단이 있었기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남자의 시선이 돌아갔다.

, 주택가로 올라간 건가

남자는 소리가 난 쪽으로 냅다 돌덩이부터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간 돌덩이는 바닥을 때려부술 정도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즉시 계단에 올라섰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롤랑은 조심스레 갈대밭 안에서 움직였다. 자칫 길가로 나갔다간 남자에게 들킬 수 있었기 때문에 숨어서 이동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롤랑은 공간의 입구에 겨우 다다랐다. 입구 주변에 많은 생존자들이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롤랑은 절뚝거리며 생존자들의 사이를 지나 공간의 벽에 다가섰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모습으로 공간의 벽을 마구 두드렸는데, 플라스틱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참동안 두드리자 벽 건너편으로 리키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키나! 리키나!”

리키나가 벽 앞으로 다가서자 상처투성이가 된 롤랑을 보곤 깜짝 놀라 서둘러 공간의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공간의 벽이 물결치며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제서야 롤랑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키나! ,큰일났어! A-10반이 전멸 당했어!”

?! 전멸이라고?!”

롤랑이 힘들어 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끝내 주저 않아 고개를 떨궜다.

크으... 예상 밖의 능력자야... 지원이 없으면 절대 이길 수 없어... 빨리... 빨리, 지원이 필요해

, , ! 알았어! 맥콜라스 선생님께 가서 지원을 요청할게!”

리키나가 서둘러서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에, 벽 건너편에서 롤랑의 말이 들려왔다.

빨리... 오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도 전멸할지 몰라... 서둘러...”

롤랑의 고개가 축 처지기 시작했고, 리키나가 손을 뗀 벽의 물결이 조금씩 사그라들며 그의 말이 점차 흐려져 갔다. 공간 안에서 기절하듯이 쓰러진 롤랑을 뒤로하고 리키나는 서둘러 맥콜라스에게 향했다.

 


근처 건물 옥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맥콜라스가 갸웃거렸다. 인근 건물에 가로 막혀서 보이지 않던 롤랑이 지친기색으로 공간의 입구에 다가서서 리키나와 이야기하다가 주저앉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리키나도 무언가 다급한 듯이 달려오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정보가 잘못 들어온 건가... 분명히 하급 클래스의 능력자들이 다수라고 했 것만...”

맥콜라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엇나가길 바라며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후 허겁지겁 달려온 리키나가 숨도 거르지 않고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선생님...! , 큰일났어요! 으아앙

무슨 일인가! 리키나!”

“A-10반이...! A-10반이...!”

아니, 대체 무슨 일인가, 빨리 설명해봐!”

전멸당했데요!!”

맥콜라스의 불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전멸이라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휘청거렸지만, 이럴 새가 없었다.

알겠다. 내가 엘로드에게 연락해서 능력자들을 섭외할테니 너희는 잠시 기다리고, 리키나는 잠시 아이들하고 있거라

, 알겠어요..!”

맥콜라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건물을 내려갔다. 리키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는데 근처에 있던 카이티가 부랴부랴 다가왔다.

괜찮아 리키나?”

크흑... 10... 모라나스... 우야엘... ...”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자 아이들이 불안에 빠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A-10반의 아이들의 일부가 주저앉으며 통곡을 시작했고, 연이어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슬픔에 동화되어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근처에서 앉아 있던 멜리나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꽤나 강한 아이들로 구성되어있었던 A-10반이 전멸 당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하는 멜리나의 머릿속에 문득 아가시아가 떠올랐다.

아가시아...!”

아가시아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에 멜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간 안에서 아가시아가 적에게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녀가 황급히 옥상을 내려가려 했지만 아르휀이 대뜸 팔을 잡아당겼다.

어디가 언니

아르휀을 바라보던 멜리나가 조심스레 아르휀의 손을 놓았다.

아가시아가 안에 있어

그래서 어쩌려고 언니. 능력을 안 쓴지도 오래 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 , 난 아가시아에게 상처만 줬어. 이번엔... 꼭 지켜줘야 해...”

멜리나는 불안함과 비장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휀은 그녀의 표정을 보곤 다시 손을 잡았다.

그럼 나도 같이 가

멜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갔고, 멀찌감치에서 그녀들을 보고 있던 에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그녀들의 뒤를 쫓았다.

 


맥콜라스의 지시에 따르면 멜리나는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리키나에게 말도 없이 몰래 건물에서 내려왔다. 멜리나는 아가시아가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며 숨이 차올라도 쉬지 않고 공간의 벽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공간의 벽 앞에 도착한 그녀들은 막상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심지어 벽의 건너편에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는 롤랑의 모습이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급한 마음이 든 멜리나가 공간을 마구 두드렸지만, 열릴 리가 없었기에 아르휀은 멜리나를 붙잡아 안정시켰다.

언니 그렇게 두드린다고 열리지 않아요

멜리나가 정신없는 표정으로 아르휀을 보다가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러자 아르휀이 공간의 벽으로 다가섰다.

리키나 언니가 약화 시켜서, 분명히 쉽게 열릴 거야...”

아르휀은 눈을 감고 조심스레 공간의 벽을 더듬었다. 공간 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간의 입구를 해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참동안 공간의 형상에 집중하던 아르휀의 머릿속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초록색 매쉬 모양이 떠올랐다. 공간이란 시전자의 마음을 기초로 맺어진 에너지의 일부이며, 현실과 단절시키는 힘이다. 약점이라는 것은 시전자가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겠다 라는 의도가 담겨있고, 그 공간의 벽의 형상을 유지하는 촘촘한 의지들에 동조하거나, 반대로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아르휀의 머릿속으로부터 섬유같은 복잡한 초록색 공간의 실들이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휀과 맞닿아있는 손으로부터 시전자의 의지가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전자가 원하는 건...’

한참동안 공간의 벽과 감응하던 아르휀의 손으로부터 조금씩 물결이 일렁거리더니,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점차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전자의 의지를 읽어가던 아르휀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건?!’

아르휀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공간의 문이 열린 덕분에 지탱할 곳이 없는 그녀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들어간 바람에 그녀가 앞으로 휘청거리며 자빠질 뻔 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이어서 멜리나가 뛰어 들어왔는데,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대체...”

공간의 밖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모습이 나타났다. 생존자들이 겁에 질린 채 입구 근처 모여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최소 50명은 넘어보였다. 개중에는 다친 사람들도 있었고, 정신이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먼발치에 시체들까지 잔혹하게 쓰러져 있었는데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다면 마치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아르휀은 멍하니 겁에 질린 채로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봐왔던 공간과는 뭔가 질적으로 달라...”

그사이 멜리나는 생존자들을 붙잡아 아가시아의 행방을 물었다.

저기요! 혹시 갈색머리를 땋고 다니는 여자 못 보셨어요?”

, 몰라요!”

공포에 넋이 나간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멜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제정신인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아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답답한 심정이 들었던 멜리나가 손을 허리춤에 걸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멀리서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멜리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 남자에게 다가갔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멀쩡해 보였다.

혹시, 갈색머리로 땋고 다니는 애 못 보셨어요? 가슴 되게 큰 애인데

.. 대충 내가 봤던 사람인거 같긴 한데...”

다급한 마음이 들었던 멜리나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의 옷을 잡아 재촉했다. 누가 보면 멱살이라도 잡는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죠? 어디로 간거죠? 살아는 있는 거죠?”

이건 좀 놓고 물어보면 안되겠니...”

멜리나가 그제야 미안한 표정으로 옷을 슬쩍 놓았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어떤 여자애랑 저쪽으로 가는 것을 봤어

남자가 가리킨 곳으로 멜리나의 시선이 향했는데, 산책로의 좌측으로 올라서있는 주택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멜리나는 남자에게 고맙다고 대충 인사하고 주택가를 향해 원피스를 휘날리며 내달렸다. 멍하니 있던 아르휀은 달려가는 멜리나를 보고 나서야 그녀를 뒤쫓았다.

언니! 어디가요! 언니! 혼자 다니면 안되요! 위험해요! 언니!”

멜리나를 쫓던 아르휀의 시선이 다리 건너편에 멈추며 걸음마져 멈춰세웠다. 그곳엔 테니스장과 풋살장이 있을 정도로 넓은 체육공원이었는데, 살인자의 시체까지 포함해서 최소 30구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참상이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곳은 더 이상 공원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대체... 여긴 뭐야...”

아르휀도 나름 전투 경험이 많다고 자부했다. 심지어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도심에서도 전투를 해보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끔찍한 참상에 공포감을 느낀 아르휀은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지만, 그보다 멜리나에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심지어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지 1년이 넘었기 때문에 능력을 잘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르휀은 끔찍한 모습에 달라붙은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며 멜리나를 따라서 산책로를 지나 주택가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르휀이 계단에 올라서려는 찰나에 좌측으로부터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아르휀의 시선이 획하고 돌아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카오루의 비명소리같았다. 나름 검술실력이 있던 카오루가 비명을 지를 정도라면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아르휀은 어디에 가야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카오루쪽으로 향했다. 당장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에르는 숨어서 그녀들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맥콜라스가 지시한 대로라면 두 여자들도 들어가서는 안됐었지만, 말을 어겨서라도 들어갈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녀들이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공간의 입구가 닫힐 기미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여태껏 실제 현장에 들어가 본적이 없던 에르는 궁금했기에 조심스레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공간의 벽 앞에 다가섰다. 에르가 들어간 공간이라곤 처음에 각성할 때와 길드의 자공간, 그리고 바람의 검을 처음 꺼낸 공간뿐이었다. 심지어 에르는 공간을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입구인가?”

에르는 조심스레 출렁이는 곳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뜩이나 욕을 먹고 있던 상황인지라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잘못 들어갔다간 맥콜라스에게 욕을 얻어먹을 것이 분명했기에 단지 만져볼 요량으로 손을 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르의 손이 닿자마자, 마치 안에 집어넣으려는 듯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에르는 재빨리 손을 빼내려했지만 늪 속에 빠지듯 이미 어깨까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으아아! 이거 왜 이래

에르는 지탱하려 다른 한손을 벽에 가져다 댔지만, 오히려 양손이 공간의 벽에 먹히며 빠르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에르가 벽 넘어로 완전히 들어갔다.

에르가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튕겨나가듯이 달려가더니 그대로 자빠지고 말았다. 다행이 산책로의 바닥이 고무패드였기 때문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턱으로 착지한 덕분에 에르는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듯이 턱을 마구 비벼댔다.

으아씨 너무 아퍼 젠...”

턱과 가슴 손바닥 부위에 고통이 찾아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에르는 아픔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다친 사람들도 다수 존재했다. 만약 전쟁터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르는 바닥에 자빠졌던 고통도 잊고 뭔가에 홀리듯 일어나 생존자들의 사이를 걸었다. 양쪽으로 펼쳐진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산책로 멀리 누군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에르는 그곳으로 홀리듯이 이끌렸는데,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것이 시체인지 깨달았다. 죽어있는 사람을 처음 본 에르가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언가에 찔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굳어있는 사람의 모습은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사로 잡혔다. 겁에 질려 일어나려 했지만, 덜덜떨리는 다리가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참동안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에르에게 떨림이 조금씩 멈추었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선을 옮겼는데, 시체가 있는 곳을 지나 산책로가 이어진 길에 시선이 멈춰섰다. 앞에 있던 시체에 신경이 쏠린 바람에 그제야 더 많은 시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성별을 가리지 않고 피를 흘리며 괴기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자세들이었다. 그 참상을 보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참지 못한 에르는 산책로의 가장자리로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며 한참동안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던 에르가 멍한 표정으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 PORSCHE 2018.10.08 00:15
    게이지 능력의 격차는 경험과 노력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오히려 공포스럽게 다가오네요.
    간접적으로 학생들과 협회 상위 능력자들의 격차도 얼마나 클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르휀이 겪은 경험보다 더 끔찍한 학살이라는 걸 보면서 이들이 보통의 적보다 훨씬 극악무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리나는 도움이 되지않고 짐만 될까 걱정이 되네요. 이번 기회에 성장하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상속에서 친구를 구하러가는 아이들 모습이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몰입이 더 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SKEN 2018.10.13 00:20
    롤랑이 당하는 장면에선 그 위기감과 긴장감이 잘 묻어나와서 좋네요.
    공간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대략적으로 알려주면서 그 분위기를 조성해나가는 내용들이 굳.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 주변 가지들로 표현하고 있어 특히 좋네요.
    공간안의 처참한 상황과 거기에 따라 캐릭터들이 느끼는 공포심이나 거부반응 등이 잘묻어나오는 한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