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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e_index.jpg


6. 멜리나와 아가시아(2)

 

이해 돕기용 입니다 안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게이지의 사회적 배경 

게이지는 사회 전반에 걸쳐 관여하고 때문에, 학습할 시간과 자기개발이 부족한 게이저 학생들을 위해 정부와 연계하여 조건없이 국립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또한 방과후에 게이저로써 자리잡기 위해 부모님들을 의식한 위장 학원까지 지원되었다. 취업문제 역시 게이저로써 활동하기 위해 월급이 나왔으며, 사회적인 이미지를 위해 위장 취업마져 가능했다. 정부에서도 관여된 게이저들이 많았기에 블러드 게이지 관련 문제가 대두되었고, 고민이 많던 정부는 이렇게 게이지 능력자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아가시아와 같은 나이대의 슬립포레스트 길드 학생들은 대부분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학생 게이저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출석일수가 전혀 없는 학생 게이저들도 적당한 점수를 받은 셈 치고 졸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이저 학생들은 이때만 누릴 수 있는 캠퍼스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성적에 고민 없이 학교에 다녔다. 학교의 입장에서도 사실 학교에 다니는 학생 게이저들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실종사건이 많아진데다가 게이지의 존재를 알게 된 고위 인사들이 학교에서 일어날 블러드 게이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바로 학생 게이저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게이저들은 편안한 환경으로 학교를 다녔다.

 

현재의 아가시아, 나은이는 슬립 포레스트의 길드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학교에 통학했다. 나은이 강의실 문을 열자 낡은 쇳소리가 일어나며 그녀를 반겼다. 땋은 머리칼을 가슴 앞으로 내민 단정한 머리스타일에 흰색 블라우스 위에 네이비색 뷔스티에 원피스를 걸치고 있는 것이 그녀의 볼륨감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들었지만 사실 그런 것까지는 잘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30분이나 일찍 온 덕분에 교실 안은 고요했다. 어디에 앉을까 갈팡질팡하다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의 교실과는 다르게 칠판을 보기 쉬운 경사진 형태의 강의실 구조를 그녀는 마음에 들어 했다. 혼자 앉아있는 분위기가 좋았던 나은이는 조심스레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자석으로 된 똑딱이 커버를 열었다. 맨 앞장에 멋진 필체로 적혀있는 문구를 보며 나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입학 축하해!

세연이 그만 괴롭히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그랬으면 좋겠다

너의 아름다운 대학생활을 위해

                                                                -이설아

 

그녀는 세연이라는 글자에 시선이 가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변했다. 여운이 나듯 손으로 세연이라는 글자를 한번 쓰다듬다가 곧바로 주황색 띠지가 튀어나와있는 것을 잡아 넘겼다. 띠지를 넘기자마자 멜리나와 자신의 수업 시간표를 정리해둔 페이지가 나타났다. 나은이는 시간표를 번갈아 보았는데 둘의 수업 시간표는 거의 비슷하게 짜여있었다. 나은이 멜리나를 따라서 짠 것인지 학교에서 짜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은이는 한참이나 시간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세연이라고 해. 윤세연. 헤헷

“...”

넌 뭔데 이름이?”

세연이라고 한 아이의 앞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친구를 만나고 싶던 세연이는 아이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아이를 재촉했다.

아아아! 이름이 뭐냐고오!”

... ...”

?”

.....”

?”

 

생각에 잠겼던 나은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많은 학생들이 자리한 채 수업 시작을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나은과 멜리나는 같은 수업이었기 때문에 분명 어딘가 한구석에 있을 것을 기대하며 두리번 거렸지만, 어디에서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교시가 연속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멜리나가 올 것을 내내 기다렸다. 결국 나은은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우두커니 교실을 지켰다. 어디에도 멜리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오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텅빈 교실 처럼 나은의 마음에도 공허함만이 남았다. 

나은은 한 시간 후에 다시 수업이 있어 아까전과 마찬가지로 미리 강의실에 앉아 있으려 찾아갔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이 수업 중이었다. 어쩔수 없이 적당히 기다릴 곳을 찾던 나은은 말없이 교내를 방황하다가 산책로를 걸었다. 그러다 학교마다 흔히 있는 연못이 보여 한적한 기분을 맛보려 다가갔다. 그녀는 연못 위에 놓여진 다리를 여유롭게 거닐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거 뭐야! 뭐야!”

... ... 뭐야...!”

주변에 드리워진 투명한 벽들은 소녀들을 가로막았다. 두 소녀들은 겁에 질린 채 공간을 빠져나가기 위해 손을 잡고 내달렸다.

나은이 놓지마! 놓지마!”

,...”

그러다 얼마가지 못하고 나은이 바닥에 넘어졌는데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야이 바보야!”

아야... 아파...”

그런데 두 소녀에게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구세요? 안돼! 오지마세요!”

 

나은에겐 무서웠을 경험이지만, 멜리나와 함께한 기억은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평소에 친구가 없던 나은에게 오직 멜리나, 윤세연만이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은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저기요...”

나은이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 혹시... 괜찮다면 전화번호 좀...”

... ...”

나은이 갑자기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다가 입을 어물어물 하고는 청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에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며 청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

 

에이리아가 적어준 것에 남자친구라는 말을 나은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말수가 없던 탓에 친해지려고 해도 사람들이 오해하기 다반사였고, 여성적으로도 매력이 넘치는 스타일이었기에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도 많았지만, 부끄럼이 많은 나은에겐 어려운 일로만 다가왔다.

나은은 당황한 마음에 알지도 못하는 건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급히 달려온 바람에 숨을 헐떡이다가 뒤늦게 잘못 들어온 것임을 알고 돌아서려했다. 그런데 문득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나은은 잘못들은 줄 알고 다시 돌아서려 했지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이잉~ 정말이야, 헤헷. 믿는 거지?”

나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조금씩 커피숍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한발자국씩 천천히 나아가던 나은의 시선이 커피숍의 유리창을 넘어 향했다. 시선이 멈추고 난 뒤에 그녀의 숨이 멎듯이 발이 멈춰섰다. 커피숍 안에서 남자친구에게 안긴 채 히히덕거리고 있는 멜리나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모습은 평소에 나은도 길드에서 보지 못했던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은은 그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은은 멍하니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내내 커피숍에서 보았던 멜리나를 잊을 수가 없었기에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에서 나은을 불러댔지만 멍하니 반응이 없었다.

쟤 뭐야? 장애인이야? 푸훗

이상해 쟤, 벙어리 아냐?”

뭐야 쟤 사람같지 않아

나은의 귀로부터 비아냥이 들려왔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나은에겐 멜리나만이...

 

괜찮아?”

... ....”

학교 운동장의 한가운데서 넘어진 나은을 세연이 일으켜 세웠다.

이젠 괜찮아...”

, ...”

우린 함께니까

 

나은은 멍한 얼굴로 정처없이 길을 걸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고 나서야 나은은 정신이 들었는데 어느새 중랑천 위의 다리를 걷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항상 아빠를 기다렸었던 나은이었는데, 먼 길까지 와버린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비가 퍼붓듯이 쏟아 내렸다. 나은은 쏟아지는 비를 피할 생각 없이 멍하니 빗속을 거닐며 온몸이 축축해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내 멜리나의 모습이 나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우산을 쓴 채 달리던 소년의 시선으로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걷고 있는 나은이 눈에 띄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하고 의아함을 가졌지만 비가 내리는 통에 남의 사정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년은 나은의 옆을 지나치다가 문득 어디서 본 것 같아 돌아보며 그녀를 불렀다.

아가시아 누나?”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착각했나라고 돌아서려는데, 소년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침울하게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걱정이 든 소년이 나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멍한 눈빛으로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곤 소년은 깜짝 놀라 우산을 들이댔다.

누나! 왜 그래요! 어디아파요?”

나은은 자신을 막아서듯 앞에 선 소년을 보며 멈춰섰다.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르...”

누나 왜 그래요? 감기 걸리겠어요. 왜 이렇게 비를 맞고 있어요

에르는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서 나은에게 걸쳐준 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수건을 꺼내어 나은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다 대뜸 나은이 에르에게 안겼는데, 그녀의 체중이 짓누르는 바람에 무게를 버티지 못한 에르가 결국 나은을 안은채 주저 앉아버렸다. 온몸이 물기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에르의 옷을 적시며 나은의 촉감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당황한 에르가 바둥바둥 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촉감 때문에 선뜻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누나 자, 잠깐만! 아니 잠깐만! 아니!!”

에르는 맥없이 안겨있는 나은으로부터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에르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경찰차가 지다가다가 둘을 보곤 멈춰서더니 나은의 얼굴을 확인하곤 차에 태웠다. 영문없이 덩달아 경찰차에 끌려간 에르는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나은의 부모가 실종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하필 그 시간에 나은과 그러고 있었으니, 범인으로 찍힌 것 마냥 경찰에게 취조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름

.. 아니, 강현중이요

나이는

“16살이요...”

일반적인 신원조사였지만, 에르는 범인이 된 것처럼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에르의 말을 받아 적는 키보드 소리와 이따금씩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관계는

, 관계요?”

에르가 당황했다. 관계를 물어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은과 만난 건 게이지 길드인데, 게이지 때문에 만났다고 얘기할 수도 없었고, 여러가지로 연관점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 그냥... 아는 사이요

아는 사이?”

... ... , 선배에요. 선배

...”

경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너 같은 학생이 저 여자를 납치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그냥 기록해두는 거니까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에르의 체구는 나은보다 작았다. 어릴 때부터 성장이 미숙했던 에르는 항상 남들보다 작았고, 반면 나은는 키가 크고 몸매도 좋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아무리 여자가 약하다지만 체구가 작은 에르를 이기지 못할 것 같진 않았다. 얼마 지나서 나은의 부모님이 경찰서에 찾아와 나은을 마구 끌어안는 것을 보니 꽤나 걱정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부모에게 다가가 이 학생이 나은과 함께 있었다는 얘길 해주었고, 오해할만한 부분은 다행히도 생기지 않았다. 에르는 조용히 나은의 부모 앞으로 나가갔는데 오히려 나은이 에르를 가르키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에르...”

부모님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은을 바라보았는데, 당황한 에르가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 저는 강현중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나은의 부모님이 대뜸 에르의 손을 잡더니 놀라는 기색으로 말했다.

내 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너는 어떻게 알게 되었니? 친한 사이니?”

.. ... 제 선배입니다

... 선배...”

나은의 부모가 이해하는 선배의 의미와 에르가 말하는 선배의 의미를 달랐다. 일반적으로 학교 선배로 이해했겠지만, 에르에게 지극히 당연하게도 게이지의 선배였다. 자신의 딸과 어울리는 에르가 신기했던 부모는 기어코 에르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 앞에 도착한 에르가 차 앞에서 섰고, 나연은 창문을 내리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르, 내일...”

, 네 내일봐요. 나은이 누나

에르는 아가시아의 이름이 최나은이라는 것을 경찰서에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차는 곧장 가버렸고 에르는 멀어지를 차를 보며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에르가 집으로 드어가려는 찰나에 오늘 있었던 아가시아의 모습을 떠오르기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는데, 아가시아의 피부가 닿은 것도 덩달아 생각나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얼마 후 저녁이 되어서 나은은 저번에 비를 맞으며 걷던 다리를 다시 찾아왔다. 바람을 쐬고 싶기도 했고, 에르를 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절망감이 든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거리에 나왔다. 나은은 아무생각 없이 다리를 거닐다 멜리나의 생각에 미친 그녀는 학교 근처의 모텔촌까지 들어와 있었다.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한 나머지 서둘러서 길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에 근처 모텔의 입구로부터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은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자주 보던 금발이 눈에 스쳤기 때문에 조심스레 다시 시선이 향했다. 아니길 바랬지만 금발머리가 눈에 띄는 그녀는 멜리나였다. 놀란 나은은 서둘러서 몸을 숨겼다. 사실 나은이 숨어야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녀는 쿵쾅대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문득 길드에 왔던 멜리나가 떠올랐다.

 

멜리나를 본 마르셀이 다그치는 말했다.

요새 왜이렇게 안와!”

멜리나가 미안한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모았다.

진짜, 진짜, 진짜 미~

너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 그치...”

너 어떡할거야. 실습도 나가고 할 게 많은 데, 이렇게 능력을 다듬지 않고서 어떡할 건데!”

아니, 그러니까 진짜 진짜 미안이라고...”

미안해서 이게 해결될 상황이냐!”

그런 마르셀의 성에도 멜리나는 조금씩 나갈 기세를 보였다.

아앗, 아직도 골반이 아프네. 헤헷

멜리나가 오금이 저린 자세로 구부정하게 있다가 슬금 뒷걸음질치면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 헤헤, 나 레포트가 좀 많아서! 진짜 진짜 진짜 곧 돌아올게! 미안 여러분!”

 

분명히 레포트 때문에 바쁘다던 멜리나는 남자친구와 모텔에서 나오고 있었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을 속였다는 이유보다 자신이 남자친구보다 못한 존재로 느껴진 나은은 마음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절망감이 어깨를 짓누르기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 ... 아무것도...”

 

그 이후로도 멜리나가 길드에 오지 않는 것이 길어졌다. 이것에 대해 엘로드와 에이리아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가시아는 더 심각해져서 누군가 말을 걸어도 아무 반응하지 않았고 그냥 시계 바늘처럼 길드와 학교를 오갈 뿐이었다. 둘의 걱정에 슬립 포레스트 길드에는 심각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에르는 길드의 자공간 9층 테라스에 올라갔다. 바이스가 외부처럼 꾸며둔 덕분에 하늘과 구름이 보이거나 바람이 불었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아늑한 장소였다. 물론 그 옆으로 맥도날드가 있었지만 말이다. 에르가 테라스로 나가자마자 난간 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아가시아가 보였다. 여전히 구슬퍼 보이는 아가시아가 멍하니 인위적인 하늘을 바라보고있기에 에르는 조심스레 아가시아의 옆에 앉았다. 평소에는 누가와도 반응이 없던 아가시아가 에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누나

아가시아는 수척해 보였지만 에르를 보며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뒤에서 따라 들어온 아르휀과 다니카 등 다른 사람들이 아가시아와 에르가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곤 그 자리에 멈춰섰다. 멍하니 주변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아가시아가 에르에겐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놀란 사람들이 조용히 둘을 응시했다.

누나

다른 이들의 말에도 반응이 없던 아가시아의 고개가 에르를 향해 돌아갔다. 에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요즘... 멜리나 누나가 안와서 그러는 거에요?”

아가시아는 말하기 어려운 듯 시선이 바닥만 향했다.

저는... 항상 약자의 위치에 서있어서. 강한 사람의 마음을 몰라요. 한번도 강한 사람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멜리나 누나의 마음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에르의 말이 멈추자 아가시아의 시선이 다시 에르를 향했다.

약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주변에서 바라보면서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게 아닐까요? 그게 그 사람을 위한 행복이 아닐까요?”

에르는 아가시아가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어 머뭇하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사람을 꽁꽁 묶어둘 수는 없잖아요.. 그 사람이 불행해지는 모습은 싫잖아요?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뒀을 때 가장 행복한 거죠.. 단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힘들 때, 힘이 되어 주는 게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힘들 때 믿을 수 있는 건...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사람뿐이죠.”

이해하는지 모르는 지 알 수 없는 아가시아의 얼굴에 무언의 미소만이 맴돌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아가시아의 일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일이었기에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엘로드와 에이리아가 번갈아서 아가시아와 상담을 했고 조금씩 나아져갈 뿐이었다. 멜리나는 점점 연락이 두절되기에 이르렀다.

A-7반은 전과 같이 현장을 대비한 훈련을 계속했다.

~, 방어술 훈련을 하겠어요. 먼저 아르휀?”

!”

40대 초반의 기혼으로 보이는 여성이 아르휀을 일으켜세웠다. 아주머니들의 특유 파마머리가 인상적으로 보였다.

아르휀은 다들 알다시피, 최상급에 속하는 능력이에요. 쉴드 게이지입니다. 현재 거의 최강의 방어 능력이라 해도 무리가 없죠. 그러니 아르휀의 능력을 먼저 볼까요?”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상에 놓여있는 야구배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아르휀이 여성을 향해 격투준비를 하듯이 자세를 잡았다.

게이지의 세계에선 물리공격, 원소공격, 초능력 나뉩니다. , 먼저 물리방어

쉴드 게이지 물리타입 방어

아르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투명한 거북이 등껍질 모양이 나타나며 아르휀을 감쌌다. 쉴드가 생기는 것을 본 여성은 조심스레 다가가 쉴드 위로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가 쉴드에 닿자마자 냄비가 울리는 탱하는 소리와 함께 배트가 튕겨져 나가버렸다. 여성은 힘없이 배트를 놓치고 말았는데 배트가 땅바닥을 구르자 놀란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

잘못했으면 여성이 배트에 맞았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에 아르휀은 긴장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여성은 다른 학생을 불러세웠다.

, 에르? 나와볼래?”

에르가 짤막하게 대답한 뒤 벌떡 일어나 여성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성은 에르의 어깨를 감싸쥐며 소개했다.

우리 에르는 바람의 검을 소환할 수 있어요. 바람 타입의 원소 공격도 가능하죠. 그래서 원소 계열 방어를 확인해 볼까요.”

여성이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휀이 다시 격투준비를 하듯이 자세를 갖추며 읊조렸다.

쉴드 게이지 원소타입 방어

아르휀의 읊조림이 끝남과 동시에 쉴드가 생겨났다. 에르는 아르휀을 향해 서곤 대뜸 바람을 일으키듯이 손을 털기 시작했다. 연약한 바람이 살짝 일어나는가 싶더니 허공을 잡으며 가볍게 바람의 검을 끄집어내며 검도하듯이 아르휀에게 공격 자세를 취했다. 에르의 검을 보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아이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에르, 바람 검기를 일으켜서 공격해보세요

여성의 말에 에르가 아르휀의 쉴드를 향해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색의 검기가 나아가며 아르휀의 쉴드를 두드리다가 사라졌다.

, 이렇게 원소타입으로 쉴드를 세우면 막을 수 있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막을 수가 없어요. 에르, 쉴드에 검을 대보세요

여성의 말에 에르는 천천히 검을 쉴드에 찔러 넣었다. 그런데 방금과 같이 막는 모습이 아니라 검은 쉽게 쉴드를 통과했다.

같은 특성이 아니면 막아지지 않죠? 이건 쉴드 게이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리는 물리공격끼리 막는 것이 수월하고, 원소는 원소끼리 막는게 수월합니다. 오행이라고 들어보셨나요? , 나무, , , 쇠라는 건데요. 이것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각각의 상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건 다음에 알려드리도록 하고요. 아르휀, 에르의 물리 공격을 막는 것을 다시 해볼까요?”

아르휀이 짤막하게 대답하고 난 뒤 쉴드를 물리타입으로 재전개했다. 에르는 검을 다시 고쳐잡았는데 여성이 에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긴장푸세요 에르. 지금 아르휀의 방어는 물리 방어니까, 검기는 거두셔야 합니다. 자 그럼 해볼까요?”

검기는 거두고...”

문득 불안한 심정이 들었던 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검기를 거둘 수가 있었나?’

사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던 에르였지만,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고 생각한 뒤 아르휀의 쉴드를 향해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에르의 검이 쉴드에 막히며 튕겨나갔는데, 검에서 일어난 바람의 검기는 쉴드를 뚫고 아르휀의 어깨와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꺄악!”

아니, 이런!”

놀란 에르가 손에서 검을 놓치자마자 주인을 잃은 검은 바람으로 흩날렸다. 아르휀은 조심스레 검기가 지나간 자리를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입고 있던 후드의 팔과 옆구리는 뻥 뚫려있었고 안쪽의 티셔츠까지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여성도 아르휀의 상태를 살폈지만 다행히 상처가 없는 것에 안심했다.

... 에르, 검기조절이 아직 잘 안되나 보군요. 정말 위험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에르가 고개 숙여 사과했는데 아르휀은 검기가 지나간 자리를 더듬어 보기 바빴다. 그녀가 한참이나 더듬어 보고 나서야 안심이 든 듯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갑자기 뭔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휀은 문득 가슴에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끼곤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주저앉았다. 그녀가 괜찮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비명에 놀라 아르휀에게 다가갔는데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오지마!”

아르휀이 주저앉은 채 황급히 후드를 당겨 몸을 가렸다. 그제야 눈치를 챈 여성이 아이들이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자자! 아르휀은 괜찮아요! 다들 신경쓰지 마시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에 보죠!”

여성은 아르휀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후드를 살펴보았다.

아이고 이런... 옷이 엉망이네요. 바이스 선생님께 가서 클리어 해달라고 부탁드려요

아이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는데 미안한 감정이 남은 에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한 듯이 서있었다. 아르휀은 볼이 빨개진 채 에르를 쳐다보지 못했다. 아르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여성은 에르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에르, 괜찮아요. 옷은 클리어 하면 되니까. 아르휀이 조금 부끄러운 상황이거든요? 그러니까 먼저 나가줄래요?”

.. 미안해 아르휀...”

에르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 숙인 채 조용히 교실을 나갔다.

 

에르는 9층의 테라스에 올라가 항상 아가시아가 앉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늘 방어수업을 되새겨보며 한참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아가시아가 흰색 원피스를 펄럭이며 에르의 옆에 사뿐히 앉았다. 아가시아의 모습은 많이 털어낸 듯 전보다 개운해보였고 오히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에르를 보곤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에르, 기분, 나빠?”

아뇨...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실수를 좀 해서요...”

뭘까

에르는 아가시아에게 방어술 훈련할 때의 일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아가시아가 조심스레 에르의 손을 잡았다.

아르휀. 착해. , 안 나빠. 실수, 용서해

아가시아의 말을 이해한 에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죠? 용서해 주겠죠?”

아가시아는 맑은 눈동자로 에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시아는 오래전에 걸었던 다리를 다시 거닐었다. 1년 만에 오는 다리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느낌이 그녀는 너무도 좋았다. 단지 치마 자락이 휘날리는 걸 잡고 걸어야 하는 것 빼곤 괜찮았다. 아빠가 사준 흰색 웨지힐 샌들을 힐끔 힐끔 바라보며 마음에 드는 듯 이따금씩 혼자서 헤하고 웃었다. 다리의 끝으로 도달할 때 쯤 누군가 난간을 붙잡고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시아는 모른척하고 지나치려 했지만정리가 안되어 산발인 그녀의 금발머리칼이 아가시아의 발걸음을 멈춰서게 만들었다. 아가시아는 조심히 그 사람의 옆으로 다가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에 마스카라가 번졌는데도 누군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흰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렸는지 새카매져 있는데다가 구두 한 짝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어 자칫 술주정뱅이로 볼 수 있었겠지만

 

 


바로 멜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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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 계탄날...

  • PORSCHE 2018.09.27 21:24
    이전 글 보다 읽는데 집중되고,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서 좋네요.
    문장이 상당히 간결해졌는데 그 덕에 한번에 읽혀지고 재밌습니다!
    주인공이 의도치 않았지만 아가시아와 아르휀과 함께 얽힌 사건들에 대해서 왜 분노가 올라오는 걸까요?허허...
  • SKEN 2018.09.28 23:46
    확실히 문체가 나날이 말끔해져갑니다. 더욱 정진하면 완전 떡상할듯..
    몇번 느꼈던 거지만 은근히 등장인물들의 복장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면이 있어서
    등장인물의 패션까지 신경쓴 티가 납니다. 그래서 등장인물을 연상하는데도 더 선명하게 보이는 점이 있고
    일반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회성을 지닌 아가시아가 어릴땐 멜리나를 많이 의지 했는데
    그런 멜리나는 일반인과 잘어울릴 수 있는 정상적인 사회성을 지녔기에 마냥 아가시아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아가시아에 치중하던 면이 점점 옅어지는 과정. 그 과정을 겪는 아가시아의 심리적인 부분이 아주 잘드러난거 같습니다.
    기존의 3년 그리고 이번화에 1년 점점 시간의 흐름과 주기가 빨라지는게
    곧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것 같다는 기대감도 들면서
    이후 멜리나와 아가시아의 관계가 더 딴딴해지는 계기의 이야기가 나올지,
    아가시아가 멜리나의 곁에서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이야기가 나올지,
    그도 아니라면 이후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어찌 될지 많은 것이 궁금하게 만듭니다.
    P.S 졸지에 아가시아를 끌어안은 에르는 괘씸하고, 멜리나는 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