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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책을 읽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그곳에는 감정이 넘쳐났다. 그 감정에 취해 백일몽을 꾸다 정신을 차려보면, 무채색 현실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렇지만 살아보고자 했다. 내가 이런 회색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분명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것을 고쳐나가면 무언가 바뀔 것이라 믿었다. 남들처럼 취미를 가지고, 지인들을 만나 웃으며 떠들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셔도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학에서의 강렬하면서도 중독적인 감정들은 현실에서 느끼는 그것과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문득 답답하여 집 밖으로 나왔다. 한겨울 밤공기는 드러낸 손의 감각을 무뎌지게 했다. 손을 마주 비비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번 깊숙이 빨아들이다 내뱉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만의 색으로 세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인적 없는 새벽의 거리에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염세적으로 살아갈 거야?

눈이 올 때면 언제나 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여러모로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술집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면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목소리는 컸으며, 언제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 오해와 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나는 손에 쥔 담뱃갑을 내려다보았다. 디스플러스. 그가 늘 피우던 담배였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 너한테만 손해라고. 각자 자기 살기 바쁜데, 매사 부정적이고 어두운 사람한테까지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어?

빈 술잔을 들어다 놨다 하며 그는 내게 말했다. 테이블에 놓인 빈 소주병의 개수가 점점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술자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가만히 그를 주시했다. 술자리에서 보통 말하는 사람은 그였고, 나는 듣기만 했다. 그도 이런 포지션을 나쁘다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너도 30대야. 언제까지 그렇게 살건 아니잖아. 아까 왔던 내 친구도 한 마디 했어. 금방이라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 같다고.

이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에 많이 취해 있기도 했거니와 주정뱅이 끼리 하는 대화라고 해봐야 쳇바퀴 구르듯 하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결국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어버렸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다 피워버린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새 것을 꺼내 물었다. 담배연기가 떨어지는 눈 사이에서 잠시 멈칫하다 이내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 같다고.

그의 말을 입에 머금어 본다. 나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렸다. 그때 그가 지었던 표정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분노와 불안, 미안함과 슬픔이 얽힌 그의 얼굴. 그런 그에게 나는 무표정으로 대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이나 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술잔을 비울뿐이었다.

그는 작가였다. 유명하지도, 베스트셀러에 오르지도 않는 그저 그런 책을 쓰는 사람이었다. 자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심심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그 내용은, 책의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나에게 편하게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을 만난 것이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 사람의 글을 좋아했기에, 자신의 글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의 그를 바라보며 갭을 느끼는 것을 즐겼었다.

서늘한 새벽공기에 몸이 떨려왔다. 폐 속에 남은 담배연기를 한숨과 함께 내뱉기를 여러 번. 몸을 한껏 움츠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왔다. 좁은 원룸 방 안은 바람이나 겨우 막아줄 뿐 밖의 온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전기포트에 수돗물을 가득 담아 스위치를 눌렀다. 파란색 조명을 비추며 조금씩 부글거리기 시작하는 물을 확인 하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 같다고.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조용히 중얼거려보았다. 빈속에 연거푸 피운 담배 때문에 조금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지금 이 모습을 보면 그는 나에게 무어라 말할까. 혀를 차며 가만히 나를 바라볼까. 아니면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다가와 안아줄 수도 있다. 평소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전기포트의 불이 꺼졌다.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아 한 모금. 온기가 몸으로 퍼짐과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껴졌다. 눈앞이 흐려진 직후, 눈물이 눈가에서 머뭇대다 흘러내렸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에게 저런 말을 해놓고는 먼저 가버린 그를. 긍정적으로 살아가라며 소리치던 그는 어째서 스스로 허공에 발을 내딛은 것일까.

창문이 푸른빛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새 지저귐이 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 알람도 울렸다. 눈가를 대충 훔치고 식어버린 물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부어버린 눈을 물티슈로 가볍게 눌러주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이 가벼운 화장만 한 후 집을 나섰다. 원룸에서 내 카페는 도보로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담배를 연거푸 세 대 피울 때 즈음이면 도착할 정도로. 금세 얼어버린 손으로 힘겹게 가게 문을 열자 밤새 가시지 않은 커피향이 났다. 늘 해왔던 대로 조명과 히터를 켜고 그라인더의 스위치를 눌렀다. 원두가 갈리며 나는 향을 한번 맡아본 후 포터필터에 담아 커피를 내렸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일련의 행위를 반복하길 여러 번. 커피머신의 정비가 끝난 후 행주를 빨아 주방 한쪽에 배치, 쇼 케이스와 포스기의 전원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거주지인 이곳의 아침은 빨리 시작된다. 출근길 아침, 커피 한 잔을 원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가게가 존속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윽고 사람들이 가게 앞을 지난다. 각기 다른 표정, 옷차림을 하고는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 얼굴을 문 쪽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카페의 문이 열리고, 문에 달아놓은 작은 풍경소리가 울린다.

금방이라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 같다고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을 무시한 채로 고래를 숙인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단골손님을 향해 살며시 미소를. 자연스레 커피를 내려 건네고 다음손님을 맞이한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 SKEN 2017.07.24 22:08
    오오 필력보소..굳!
  • 반딧불 2017.07.24 22:27
    와 필력봐 이런 숨은 인재가...!
    처음부터 분위기는칙칙한 어두운 분위기가 뿜어져나오던게
    원룸에 들어가는 장면까지 분위기를 살리는게 완벽합니다
  • 홍차매니아 2017.07.24 22:29
    쩌네...
    뭔가 자전적인 소설 같다?
    한번 호쾌한 모험물 써보라고 강요해지고 싶어진다?
    여튼.
    필력 쥑이네
  • PORSCHE 2017.07.25 01:41

    무덤덤하고 거침없이 담백한 글이네. 이야기도 거칠지만 이렇게 잘 읽히는구나! 대단한데?!
    근대 그녀가 좋아하는 그는 그런말을 남기고 허공에 발을 디딘건가? 상실감이 크게 느껴지는 글이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이라는 부분에서 그래도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석했는데, 쉽게 읽혀져서 재밌게 읽으려다가 생각에 잠기는 글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