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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고 싶어요."

 아담한 여자는 느릿하게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가 짙은 쪽빛으로 일렁거렸다. 딱 달라붙은 청바지, 빛바래고 목티가 늘어진 낡은 티셔츠를 입은 여자. 남자는 초면에 돌직구를 던지는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여자의 무심한 표정 밑으로 겨우 마음먹고 도전하는 이의 열망이 숨겨져 있었다. 
'최근에 실수라도 한 게 있나?'  남자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 근사한 미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자는 초면인 낯선 상대였다. 라틴계 특유의 건강한 갈색빛 피부의 여자는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길잡이라는 것도 알아요."
"거짓말"

남자는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자는 남자의 단호한 말투에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쇼-뱅크 컨설팅에서 당신을 추천하더군요"
"어디라고?"
"쇼-뱅크 컨설팅요"
"망할"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남자는 웨이트리스가 건네준 생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거칠게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여지껏 서있던 여자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망할 도마뱀!"
"더 부정은 안 하시는군요?"
"해봤자, 뭐하려고? 이걸 보라고."

남자는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스마트폰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약속 지켜. Y

남자는 여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여주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법 돈을 썼나보네?"
"네."

비꼬는 남자의 말투에도, 여자는 시종일관 느릿하게 말했다. 남자의 미간은 잠깐 일그러졌다가, 이내 펴졌다. 남자는 기지개를 켰다.

"이 바닥에서 제법 비싼 몸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 보아하니 이제 돈도 없는 거 같은데."
"제 이름은 리키."
"뭐?"
"리키"
"허, 그래 리키 양.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어때?"
"세계의 책"
"나는 바쁜 사람이…잠깐, 다시 말해봐"

리키는 남자를 향해 살포시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세계의 책을 찾고 있어요"

남자, Y는 곧장 빈정거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세계의 책? 혹시 내가 아는 그거 맞나?"

남자는 자신의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필터 부분을 입에 물고는 말을 이어갔다.

"저 빌어먹을 기생충들이 말하는 전설에 나오는, 세상의 모든 답을 담고 있는 책을 해석한 책 속의 책?"

"네, 그거요."

Y는 라이터를 찾으며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Y의 말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잔뜩 묻어났지만  리키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리키의 고른 숨결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거센 바람에도 찬찬히 흔들리는 억새풀 같은 고요함. 시끄러운 술집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분위기. Y는 자신 앞에 앉아있는 리키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뜬금없는 이야기. 뜬금없는 첫 만남. 아담한 여자를 바라본 호감이 넘치는 첫 인상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Y는 자신의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왼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려내렸다. Y는 주머니에서 라이타를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의 필터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는지 모르겠네. 이봐요, 이 맹추 같은 사람아,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Y의 말투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리키는 그런 Y를 지긋이 바라보다,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Y의 굵직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키는 술집의 한쪽 통유리 너머를 가리켰다.

"길잡이. 저걸 보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을 잘 아실예요."

통유리 넘어.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풍경에 Y는 입을 다물었다.


짙은 암벽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 파묻혀버린 도시. 14개의 박살난 고층건물이 기둥이 되어 지반을 뚫어낸 구멍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14개의 고층건물을 기둥 삼아, 강철 프레임과 강화유리로 이뤄진 천장은 뻥 뚫린 구멍을 단단히 막아놓았다. 그리고 천장 정 가운데,  거대한 프로펠러3개가 쉼틈없이 돌아간다. 거대한 프로펠러와 강철 프레임의 그림자가 도시에 내려앉는다.


지하 공동의 거대도시. 분명 19년 전, 도시는 지상 위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Y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 한켠에 내려놓았다. 리키는 진지하게 Y에게 말했다.

"길잡이. 당신이 이 바닥에서 유명한 사람인지 아닌지, 저는 몰라요. 단지 소개받았을 뿐이죠."

리키의 짙푸른 눈동자는 Y을 꿰뚫는 듯이 바라본다. Y는 저도 모르게 그 짙은 푸른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누구도, 19년 전의 「대전이」를 생각못했어요. 아시잖아요."

"뭐, 그렇지"

Y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Y도 19년 전 일어난 대전이를 겪은 세대였다. 하루만에 세상이 뒤바꿔버린 대참사. Y는 19년동안 벌어진 아수라장을 생각했다. 지하에 파묻힌 도시. 14개의 고층건물은 박살났고, 그 충격으로 지하 암벽 천장이 부서져, 도시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새로이 생긴 구멍으로 쏟아지는 태양빛과 외부의 공기. 그리고 괴물들.

Y는 지난 19년의 추악한 투쟁의 시간을 기억했다. 순식간에 박살난 인프라와 사회 시스템들. 그리고 도시에 숨어들어온 기생충들과 괴물들.

"이봐, 세계의 책 말이야. 확실한 정보라도 있는거야?"

Y는 슬며시 들어온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리키에게 물었다. 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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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스트 던전! 내게 글을 쓰라고 하시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