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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을씨년스러웠을 광경이건만, 지금은 꽤나 낭만적이라 느껴졌다.
함께 있는 사람의 차이로 마음이 변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품에 안겨 쪽잠을 자고 있는 안젤리카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원칙대로라면 근무시간에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었고 본인도 그럴 마음이 애초에 없었지만, 내가 강권했다.

"내가 책임질게. 그냥 눈 딱 감고 자."

이 한 마디에 3초간 날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안젤리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 그대로 눈을 딱 감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안그래도 근무 내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기에, 내 제안이 진짜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을 것이다. 

쏴아아.

장마철의 비는 반복적인 빗소리의 향연이었다. 짙은 먹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 위에선 빗줄기만이 쉴새 없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초소의 문도 닫아놓고, 안젤리카를 품에 안은 채 앉아서 낭창하게 창밖의 비만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개막장 경계병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0번 척살병이라는 지위만 믿고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거리 밖의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체감상 50보 밖의 미세한 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가 오니 40보 정도 되겠네.
오러를 다루는 재능은 타고난다더니, 정말 내가 그런 것 같았다. 거기에 실력자와의 대련과, 실전에서 한계까지 쥐어짜내서 써댔으니, 부수적인 능력까지 덩달아 같이 발전하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런 능력 덕분에 내게 있어 시야를 통한 경계는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경계병의 입장에선 꿈의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는 이미 경계병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안젤리카, 슬슬 일어나. 근무지 옮길 시간이야."
"우웅... 시간 벌써 그래 됬나."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다 눈을 비비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란, 화장기 하나 없음에도 고혹적이었다. 괜시레 떨려오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나는 안젤리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을 보니 역시나. 경계병들이 오고 있었다. 세레나 일등병과 신병인 발렌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분대 식구라 수하는 생략했다. 나는 비범벅인 판초를 바깥에서 가볍게 털며 들어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 고생 많으십니다."

발렌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에 비해 묘하게 공손한 말투였는데, 무척이나 기가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실전에서 호언장담하다 개판을 쳐버려 나한테 있는대로 털렸으니까. 나는 녀석의 투구를 쥐고 바로세웠다.

"발렌아."
"이, 이등병 발렌입니다."
"고개 숙이지 마라. 병 상호간엔 그러는 거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사이거든."

말을 마친 나는 안젤리카를 슬쩍 돌려다보았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녀. 내가 신병일 때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었지.

"며, 명심하겠습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열심히 해라."
"아, 알겠습니다!"

얼이 빠져있다가, 꽤나 감동 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를 가볍게 치며 안젤리카와 함께 근무지를 빠져나갔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세레나 일등병님."
"그래. 아르펜. 안젤리카 상등병님도 고생하십시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고, 이내 판초를 뒤집어 쓰며 초소의 사다리를 내려와 다음 근무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내음과 함께 빗방울이 투구를 덮은 판초를 두들겨댔다. 개인적으로는 듣기 좋은 냄새였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
안젤리카도 마찬가지였을까? 약간은 경쾌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그녀가 멈춰서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려 이렇게 물었다.

"펜. 우리 손 잡고 갈래?"

펜은, 이따금 그녀가 나에게 부르는 애칭이다.

"응? 갑자기 뜬금없이?" 
"뭐, 그냥 해본 소리다. 잠을 푹 자고 나니 기분이 좋은갑다."

한 마디 하고선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러다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녀의 뒤를 차근차근 따라가던 내가 자갈을 주워 슬쩍 투구 위로 던졌다.

통-

처음에는 투구를 한번 만지더니 갸웃거리다 다시 걸었다. 그래서 몇발자국 걸어가다 한번 더 던졌다. 

통-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는 안젤리카였다. 내게로 돌아보는 그녀는 달콤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추궁했다.

"우씨. 자꾸 까불면 혼난다이?"
"...미안."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손을 싹싹 빌었다. 안젤리카도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다시 근무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계로의 지형은 눈에 익어 볼 필요도 없었기에, 걸어가면서 철책선 너머의 먼산을 보았다. 
일전의 전투로 홉의 모가지를 따버렸으니 한동안 큰 전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문제의 예티가 찾아올 것이라 직감하는 다음 겨울에 대해선 부던히 준비해야만 하겠지.

통-!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아야! 좀 작작해!"
"응?"

나는 갑자기 돌아서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안젤리카를 어리둥절한 채 보고 있었다. 꽤나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나는 손사레를 쳤다.

"아니. 나 아니야."
"너 아니면 누가 돌을 던진 건데? 이번에는 먼 돌땡이를 던지고 난리야."
"아니. 나 아니라니까."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안젤리카도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동공을 떠올리며,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뒤를 봐줄게. 내가 이런 장난 심하게 치는 사람 아니란 거 알잖아."
"알았다. 믿으께. 그런데 또 장난치는 거 보이면 확 쏴뿔끼다."

살벌한 목소리에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번엔 한눈 팔지 말아야지. 나는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나와 그녀의 주변 기척을 주시했다.
내가 아무리 오러운용이 늘었고, 감지능력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딴생각을 하면서 사위를 다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엔 눈에 불을 켰다.
그리고, 범인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파앙!

역시나, 주시하고 있던 방향에서 돌이 날아왔다. 꺼내든 단검으로 쳐낸 내가 활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제 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안젤리카가 나를 따라 활을 꺼내들며 돌이 날아온 경계로 위를 쏘아보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위쪽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감각은 그 의문의 무언가를 계속해서 쫓고 있었다.
소초의 선임병은 분명 아닐 것이다. 지금 소초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이딴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만히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듯 있던 그것은 곧 이쪽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처억.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의문의 존재. 생김새를 살펴보던 나와 안젤리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야 예티?"
"맙소사."
 
믿기지 않아, 한 차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똑같았다.
그것은 분명, 하얀 털에 긴 팔을 한 설인. 예티었다. 다만 지난 겨울에 보았던 그 괴물과는 달리 몸집도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아직까지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심을 풀기에는, 우리가 아는 예티에 대한 정보가 너무 미미했다. 나와 안젤리카는 장전한 화살에 힘을 살짝 풀었지만, 언제든지 쏠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

예티는 마치 유인원처럼 두팔을 땅에 짚은 채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언제든지 오러를 끌어올릴 수 있는 준비를 끝마쳤다.
설마 이 우기에 예티 같은 게 나타나겠나 싶어 척살병의 무장 대신 경계병의 무장을 하고 온게 실수일까? 우리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지난 겨울의 그놈과 같은 힘을 지니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안젤리카에게 넌지시 귀뜸했다.

"만약 교전이 벌어지면 넌 바로 소초로 잽싸게 뛰어. 그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시, 싫다. 또 니 혼자 싸우게 못놔둔다."
"내가 젤 두려운 건, 네가 그 때처럼 되는 거야 안젤리카."
"아르펜..."

그녀와의 암묵적인 합의는 마쳤다. 나는 예티를 주시했다. 놈은 사뿐한 몸짓으로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최전방 어디의 괴담이었을까. 웃으면서 다가와 경계병의 머리를 단숨에 씹어먹는 예티의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 아르고니아의 인간들이 예티에 대해 아는 부분은 정말 손톱 밑의 때만큼이었다.
불과 10보 앞. 뛰면 바로 교전을 벌일 거리다. 나는 잔잔히 오러를 끌어올리며 놈을 단숨에 베어버릴 부위를 선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지나, 놈이 팔을 들었다. 이 때다 싶어 팔의 관절을 베어버리기 위해 뛰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한 마디에 나는 기껏 끌어올린 오러가 역류할 뻔하는 것을 느꼈다.

"안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