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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둑 후두둑.

"천천히 가자 아르펜."
"네."

2경5 근무지를 향하는 경계로. 내 앞에서 판초를 뒤집어쓴 채 계단을 오르고 있는 안젤리카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무덤덤해보이는 겉과는 달리, 마음 속에선 활화산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흘 전 있었던 고블린들과의 사투로 인해 근무가능한 분대원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가장 부상이 심한 베일 상등병은 현재 치료를 위해 사단본부에 가 있는 상황이었고, 프레카 병사장의 경우 그보단 덜했지만 회복이 필요해 근무에선 이탈한 상태였다.
물론 조만간 페바에서 근무지원이 오겠지만 그들이 올 때까지는 비번이 1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근무의 임무를 가지지 않은 내가 자진해서 같이 근무를 서게 되었다.
안젤리카와 함께 근무를 서게 되는 것은 덤이지만. 헤헤.

"그래도 비가 쫌 덜 내리니까 다행이다. 딱 운치 좋은 날씨네."
"그러게요."

그녀의 말에 대답하던 나는 묘한 시선으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경계근무를 할 때에는 근무지가 겹치면서 본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사수와 부사수로 함께 근무를 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너무 좋았다. 분대원 고참 몇몇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군법상 병상호간 연애는 금지였기에 소초에서는 참아야 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깐 말이다.
최전방에서의 경계근무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서는 파트너와 2인1조로 보낸다.
나와 안젤리카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이기도 하지만 데이트이기도 한 셈이다.

"2경5에서 근무하는 건 진짜 오랜만인걸요."

한참 계단을 타던 끝에 근무지 앞에 도착한 내가 초소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한 마디했다.

"하기야, 니 보직 바뀌고 근무서는 게 이번이 처음이잖아."
"네. 아직도 그 때가 생생한걸요."

정말 그랬다. 지금은 사단에서 다시 지어놨지만, 이 곳은 불과 5개월 전에 예티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곳이다.
한번씩 내가 놈과 일대일로 싸워, 살아남은 건 물론이고 눈알을 터뜨려 쫓아내기까지만 했던 그 때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 차례의 수하를 거치고 2경5 초소에 도착한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갔다. 전 근무자들과 가볍게 경례를 나누고 간단한 인수인계를 거친 뒤 교대되었다.

"그, 그럼 근무 잘 서. 고생하구."
"네. 고생하셨습니다."

전 근무자들은 둘 다 상등병의 고참들이었는데, 안젤리카에게도 까마득한 고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척 공손했다.
그럴만도 한 게 그들은 사흘 전 전투에서 2명이 희생되었던 3분대의 고참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에게 있어 내 존재는 예티를 쫓아낸 규격 외의 괴물이면서도, 자신들의 직속후임들을 죽인 고블린들의 복수를 대신 해 준 은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경계로를 향해 걸어가는 그들을 한참 지켜보았다.

"갔나?"
"네. 이제 안 보이네요."

대답하는 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이제 더 이상 남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덥썩.

"니는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를 거다. 헤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을 안아온 안젤리카였다. 나는 너털 웃음을 지었다.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의 그녀는 내 앞에서 유난히 사투리를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번씩 흥분할 때는 본래의 진한 억양이 나왔었는데, 그게 지금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아뇨. 아는데요."
"어떻게 아는데?"
"저도 이 순간을 계속 기다렸으니까요."

양손으로 그녀의 허그를 푼 내가 뒤돌아서 꼬옥 껴안았다. 제법 두꺼운 근무복과 판초를 뒤집어 쓴 상태였음에도, 그녀의 가쁜 심장소리가 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한동안 안은 채 그간 내색하지 못했던 감정을 해소했다.

"그렇게 대놓고 껴안을 수 있으니까 디게 좋다..."

좋아서 함박 웃음 꽃을 핀 그녀의 모습은 참 예쁘면서도 귀여웠다.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장난 어린 한 마디를 건네었다.

"네. 좋긴 한데 그래도 여기가 근무진데 근무는 서야죠, 사수님?"
"괜찮다. 내 부사수가 척살병 아니가."
"저 오늘 경계병 무장으로 왔는데요..."

내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방패가 없는 나는 전투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뭐, 그래도 지금은 오러를 초보자 수준으로나마 다룰 수 있어서 전보단 낫지만 말이다.
안젤리카는 대답 대신, 내 목을 팔로 감으며 속삭였다.

"니 근데, 둘이 있을 때는 좀 말 편하게 해라. 우리 사귀는 거 아니가?"
"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보단 안젤리카의 사고방식이 자유분방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녀와 눈을 맞춘 채 한참을 바라보던 내가 어렵스레 말을 꺼내었다.

"그, 그럴까...?"
"그래! 딱 듣기 좋네."

꼭 재롱 부리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표정 같았다. 나는 쑥쓰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근무는 서야 하잖아. 간부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기다려 봐~."
 
안젤리카는 창 밖의 전방시야와, 문 밖의 후방시야를 번갈아보며 좁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일루와서 딱 내 앞에 서."
"알겠... 으, 으응."

말버릇이란 게 쉽게 고쳐지는 건 아니었나보다. 말실수를 한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앞에 섰다. 깍지를 끼며 나를 부둥켜안은 그녀가 말했다.

"앞에 함 봐바라. 후방 잘 보이재."
"아, 그렇네?"
"이러면 시야도 잘 보이면서 그, 그 뭐야... 추운 날에 서로 체...온도 나눌 수 있고 좋잖아."

말하는 중 맞닿은 가슴을 통해 안젤리카의 심장이 유난히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의 붉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되자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내가 대답했다.

"너랑 키가 비슷해서 다행이네. 샨티 상등병님이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잖아."
"킥킥. 그거야 그렇네."

우리는 가볍게 수다를 떨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초나 생활관에선 눈치를 봐야했기에 나나 안젤리카나 서로 하고싶은 말이 어찌나 많았는지, 긴 근무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휴. 나도 틈 나는대로 열심히 익히고 있는데, 큰 진전이 없어. 속상해 죽겠어."

오러수련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탄하는 목소리에서 근심이 묻어나왔다.

"큰 진전이 없다는 건 그래도 조금씩은 발전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지금은 어느 정도야?"
"단검에다 한번씩 발출연습을 하는데,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만 맺히는 정도야."

안젤리카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놀라워 했다.
오러 유저란 것은 당연히 어디서 도박 따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수없는 인고의 시간과 혹독한 수련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오러유저다.
내 경우, 후장식 오러라는 확율적으로 정말 희귀한 특성때문인지 재능을 타고났고, 예티와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잠재력이 폭발해 급격하게 진전을 이룬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의 경우 아무리 좋은 연공법을 배우더라도 오러의 발출에 2,3년은 걸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런걸 감안해볼 때 안젤리카의 재능과 노력은 대단한 편이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 너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만 하면 돼."
"또 예티가 쳐들어오면 어쩌는데...? 그 때 내 아무 것도 못하고 짐만 됬잖아..."
"그땐 내가 또 지켜주면 되지."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좀 더 쎄게 끌어안았다. 사실 일개 경계병이 예티 손에서 살아만 나도 기적적인 일이었는데, 안젤리카에겐 이런 말 못할 고민이 있었구나 싶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속마음을 보다 더 많이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근무 오길 정말 잘했다.

"그나저나 휴가는 어땠는데? 아직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잖아."
"아참. 그랬지? 하긴 내가 분대원들이랑 생활패턴이 다르니깐."
"빨리 말해조. 궁금하니까."

좀처럼 안부리던 애교를 부리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저번 달에 갔었던 10일간의 휴가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