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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내리고 난 이후의 내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나는 다시 소초장실로 가 소초장에게 말했다.

"윗선에 대한 보고를 하루만 유보해 주십시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보지?"
"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은 제가 질테니 부탁드립니다."

일개 병사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도, 나와서도 안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소초장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그리고선 알 수없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군에서 이러고 다닐 수 있는 건 네가 유일할 거다 아마."

나는 대답대신,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경례와 함께 소초장실을 나와 안젤리카와 뇽이 있을 취사장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마침 유리젤 상병도 함께 있었다.

"어머머. 우리 소초의 영웅 아니야~? 오랜만에 본다 그치?"
"아, 네. 저,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 위상이 그렇게 격상되었음에도, 유리젤 상등병을 마주할 때면 여전히 라만 일등병처럼 말더듬이가 되버리는 건 어찌 바꿀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헤헤헤. 우리 뇽이 참 귀엽네에~?"

어느덧 그의 시선이 뇽을 향했다. 나도 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뇽의 표정은 몹시 굳어있었는데, 꼭 식사하는 중에는 도저히 보면 안될 배설물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크르릉! 끄지라!"

녀석이 처음으로 적개심 어린 소리를 내었다. 마치 위기의식을 느낌에 따른 본능적인 행동 같아보였는데, 그 모습이 묘하게 공감가는 것은 왜였을까?

"힝... 소초에서 처음으로 미움 받았네."

예상과는 다른 격한 반응에 당황과 함께 울상을 지으며 물러섰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리카가 입을 가린 채 끅끅 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뇽을 향해 팔을 벌렸다.

"뇽이 일로 온나."

그러자 아까의 썩은(?)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환해진 표정의 뇽이 안젤리카에게 득달같이 안겨들어 얼굴을 마구 부벼대었다.
노예가 해방되면 저런 표정일까? 참 진귀한 광경이다.

"아. 아르펜. 어떻게 됬는데?"
"소초장님껜 하루 유보해달라 했고, 중대로 가서 율라 중사를 한번 만나봐야지요. 그럼 아마 해답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으응.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온네이. 뇽은 내가 돌보고 있을 테니..."

대화를 나누며 눈을 마주보면 우리 둘은 금세 무언가를 깨닫고 쑥쓰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대화내용이 꼭 일터에 나가는 남편을 마주하는 아내같았다고, 서로 느낀 탓이다.

가벼운 헤프닝이 끝난 뒤, 나는 소초를 나서 보급로를 따라 율라중사가 있는 중대본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혼자 명령도 받지 않고 마음껏 타 거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0번 척살병이 가진 또 다른 특권이었다. 그만큼 상부에서 예티를 단독으로 상대한 나에게 고평가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중대본부에 도착한 내가 율라중사를 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행위가 20초를 넘기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차앙!

섬광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방패!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었다. 사전에 챙겨온 방패로 튕겨낸 내가 고개를 들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튕겨진 자신의 시스를 회수한 율라중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까닥였다.
말이 필요 없는 상황.
고개를 끄덕인 내가 주저없이 율라중사에게 달려들어 병장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최근 나와 그녀의 대련에는 몇 가지 룰이 생겼었다.
오러를 쓰지 말 것.
턱끝까지 숨이 차올라 죽기직전까지 멈추지 말 것.
끝나기 전까지 말하지 말 것.
덕분에 나와 그녀는 서로 숨을 헐떡거릴 때까지 치열한 대련을 거치고 난 뒤에야 땀범벅이 된 상태로 서로 머리를 맞댄 채 흙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용건으로 왔냐? 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지옥을 보여줄 거야."

금세 숨을 고른 율라중사의 뒷말에, 정곡을 찔린 나는 숨을 최대한 고르내쉬면서 머리를 굴리다 이내 말했다.

"신기한 걸 발견해서요. 율라중사님께 얼른 보여드리고 싶어 급하게 왔습니다."
"...나부터 알아야 되냐?"
"예"
"그렇단 말이지."

역시 율라중사는 눈치가 빨랐다. 허리반동만으로 단숨에 일어선 그녀는 내 팔목을 잡아끌며 근처에 걸린 천수건 두개를 챙겼다. 그리곤 멀찍이서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중대장에게 다가가 정중하면서도 엄중히 경고했다.

"이제부터 씻으러 갈건데, 훔쳐보시면 내일의 해를 못보게 해드리겠습니다."
"히이익! 아, 알겠네!"

금세 사색이 되어 고개를 쓰덕이는 중대장을 보며, 나는 중대의 실세가 누군지를 여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자그맣게 마련된 샤워실 안으로 나를 끌고와선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훌렁 벗어던지는 율라중사를 보고선 기겁을 해버렸다.

"저는 내일의 해를 보고 싶은데요?!"
"넌 예외야 임마. 같은 신도끼리 씻는 게 뭐 어때서?"
"...네?"

일반인과 궤를 달리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개진 내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부끄럼쟁이 녀석. 그래, 씻는 동안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놔 봐."

첨벙, 쏴아아.

바가지로 온몸에 물을 뿌리는 율라중사의 알몸이 나도 모르게 상상되어 고개를 홱홱 저은 내가, 평정을 되찾으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경계로에서 이동중 철책선 바깥의 존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게 먼데."

솔을 비누에 묻혀 온몸 구석구석을 닦는 소리같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예티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체구는 인간만한데 말이죠."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율라중사가 씻는 것조차 멈출 정도로 놀랐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계속 해봐."
"네."

그 뒤로 나는 안젤리카와 함께 소초로 데려와 소초장에게 보고했다가 하루 유보시킨 부분까지 소상히 얘기했다. 들으면서 샤워를 마무리한 율라중사가 몸을 닦고 옷을 입으며 물어왔다.

"그래서, 소초 외의 간부 중 내게 제일 먼저 보고한 이유가 뭐냐?"
"그야 율라중사님이 제일 믿을만한 분이라 판단되서였지요."
"훗, 녀석."

율라중사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덧붙여 말했다. 

"잘 찾아왔어. 철책선 밖에는 아직 카이안 콴타께서 남겨놓은 유산의 흔적이 있지. 그 작은 예티가 어쩌면 실마리가 될 수 있어."

율라 중사가 남은 한개의 천수건을 내밀었다. 마침 땀으로 찝찝했던 차라 고맙게 받아든 내가 옷걸이 앞데 서서 겉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 예티녀석, 똑똑한 것 같긴 한데 아직 인간의 말은 잘 못합니다."
"그건 걱정마. 그 문제는 내가 잘 아는 유능한 마법사가 해결해 줄 테니깐 말이야."
"그, 그렇군요."

알면 알수록, 일개 중사에 머무를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마 1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인원이 다 준비될 거야. 그 사이 1소초장은 상부에 보고를 못하게 될 테고. 내일 네 소초에 순찰 차 들리면 되겠군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사실 이해는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부연설명 다 빼먹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떡같이 말할테니 찰떡같이 대충 이해해라. 율라중사는 이런 화법의 상관이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율라중사님."
"왜? 더 궁금한 거라도 있냐?"
"그게 아니고... 다른 데 좀 쳐다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아까부터 그녀는 알몸인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도끼리 알몸보는게 뭐 어때서? 내가 씻는 거 언제 보지 말라고 하든?"
"..."

참 곤란한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