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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펼쳐진 라 게세르의 전경을 보며 로이에르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했다. 루나키아 산맥을 빠져나왔다는 사실 하나가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고, 몸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게 했다. 할 수 있다면 그는 크게 소리도 지르고 싶었다. 허나 옆의 두 사람의 존재가 그의 욕망을 억눌렀다.

 

  에이페리아는 로이에르의 심정을 백번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로이에르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싶었다. 로이에르보다 나은 이성의 통제로 그녀는 그 행위를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다만, 벅차오르는 기쁨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두 남녀는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걸 새로이 깨우쳤다. 이제 마음껏 주변을 둘러보아도 방향 감각을 잃는 일은 없었다. 눈앞의 길이 갑자기 꺼진다거나, 저 멀리 보이는 라 게세르가 사라진다거나, 지금의 맑은 날씨가 돌연 폭풍우로 바뀐 다던가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았다.

 

  카일은 말없이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만세를 하고 있는 로이에르. 입 꼬리가 한없이 올라가려는 에이페리아. 카일은 베르자네크의 배려 아닌 배려로, 루나키아 산맥을 최단 시간으로 빠져나왔단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는 기쁨을 더해주지 않아도 두 사람은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두 남녀를 내버려두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로이에르의 번쩍 들은 두 팔은 내려오지 않았고, 에이페리아의 입술은 연신 움찔거리며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진정하고 우선 레임으로 가도록하지. 준비해야할 것도 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기도 해야 하니까.”

 

  카일의 말에 두 남녀는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머쓱해하는 두 남녀를 뒤로 두고 카일은 라 게세르를 향해 걸어갔다.

 

 

  레임은 주점 겸 여관이라는 가게의 특성 상 점심시간은 한산 했다. 저녁은 일정을 마치고 들어오는 손님으로 북적였고, 아침은 투숙객 중 아침 식사를 하고 가는 이가 꽤 있었으나, 점심은 마을 내 전문 식당들도 많았기에 굳이 레임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손님 하나 없는 텅 빈 가게. 레임의 주인 토르시는 홀로 바 테이블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잡음 없는 적막함 속에 마른 천이 유리잔과 마찰하는 뽀드득 소리만이 가게를 채울 뿐이었다.

 

  끼이익. . 나무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 이 시간대에는 좀처럼 들리는 법이 없는, 낯익지만 낯선 소리에 토르시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낯선 시간대에 들어온 방문객 3명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객을 본 토르시의 눈이 커졌다.

 

라쿠스! 벌써 돌아왔나?”

 

  방문객들은 그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렇기에 토르시는 적지 않게 놀랐다. 엘라 퀴노스를 향해 간다는 그들이 벌써 돌아온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별일 없었나. 우리가 출발하고 얼마나 지났지?”

 

  카일-토르시에겐 라쿠스라 불린-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토르시는 잠시 날짜를 떠올리더니 웃으며 답했다.

 

오늘로 정확히 일주일이네.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엘라 퀴노스를 다녀온 게 맞긴 한 건가?”

 

  카일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가 아닌 구석진 곳의 테이블 자리로 가 앉았다. 같이 들어왔던 에이페리아와 로이에르도 뒤따라 앉았다. 홀에 손님은 없었기에 토르시가 카운터에 선 채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엘라 퀴노스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토르시는 에이페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 덕분에 루나키아 산맥이 어떤 곳인지도 잘 알게 되었네요.”

 

  에이페리아는 다소 지친 기색이 묻은 미소를 보였다. 토르시는 안타까움이 묻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하, 루나키아를 처음으로 겪어본 분들은 대게 그런 얼굴들이죠. 무가치한 질서 속에 가치 있는 혼돈은 잘 찾으셨습니까.”

 

  이어지는 토르시의 물음. 에이페리아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보며 카일은 무심히 말했다.

 

그냥 처음으로 루나키아 산맥을 다녀오는 이에게 건네는 샤나크식 인사법이야.”

아하.”

 

  카일의 말에 에이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시는 대화중에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닦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엘라 퀴노스에 정말 카일 키르와일러의 거처가 있던가요? 그는 만나보셨나요?”

 

  에이페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스스로 카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까먹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토르시를 포함한 라 게세르의 모든 사람들에게 카일 대신 엘라시 라쿠스란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당사자. 그가 가만히 있는데, 그녀가 선뜻 아 그럼요. 사실 당신이 라쿠스라고 부르던 저 남자가 카일입니다. 놀라셨죠?’ 라고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페리아는 어찌해야할지 모른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녀의 상황을 본 카일이 능숙하게 대신 나섰다.

 

엘라 퀴노스가 어떤 곳인지는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하긴, 대륙에 도는 소문은 온갖 것이 있지만, 그게 다 맞지는 않지.”

 

  카일이 대답대신 애매하게 던진 물음. 토르시는 그 물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카일이 되묻는 것 하나로 화제를 돌려버리자, 에이페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보다도, 이곳을 떠나게 돼서 필요한 것도 챙길 겸 인사차 들렀네. 당분간 이 두 사람 일을 봐줘야 해서 말이야.”

 

  당분간이라는 그의 말에 에이페리아의 미간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래? 허허. 그거 참 안타까운 소식이군, 자네 덕분에 편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오래 걸리는 일인가?”

 

  토르시의 물음. 카일은 에이페리아를 슬쩍 쳐다보고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일단은 1년 정도, 더 길어질 수도 있고.”

 

  토르시는 다소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걸리는군, 한동안 빈자리가 많이 생각나겠어.”

원래가 타지 사람이었잖은가, 없던 사람이 다시없어 지는 건데 뭐.”

아까도 말했듯, 자네가 온 뒤로 편해진 것이 꽤 많았으니까. 사람은 편리함을 한번 알고 나면, 그 편리함 없인 살기 힘든 법이지 않나.”

 

  토르시의 장난이 담긴 우는소리에 카일은 피식 웃어보였다.

 

불편함에 다시 익숙해지고 마는 것 역시 사람이지. 아무튼라 게세르에서 트윈 게이트까지 나와 있는 지도 좀 주겠나? 가능한 자세한 걸로.”

트윈 게이트? 유스티니아 공국으로 가나? 꽤 거리가 있는 여정이로군. 잠시만 기다리게 창고에 좀 갔다 와야겠군.”

 

  토르시는 바 테이블 뒤편에 있는 뒷문을 열고 나갔다. 토르시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에이페리아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일을 쳐다봤다.

 

1년 말인데요.”

?”

 

  에이페리아의 말에 카일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처음엔 경황이 없다보니 그냥 넘어갔는데, 생각할수록 불공평 한 것 같아서요.”

어떤 점에서 그렇지?”

 

  카일은 에이페리아의 말에 다소 흥미를 느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에이페리아는 숨을 한번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찾아간 건, 1년이란 한시적인 기간 동안만 당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당신이 뛰어난 사람이란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1년이란 기간은 너무 짧아요.”

1년은 조건부일 텐데?”

그래요. 물론 그 1년 뒤의 일은 내가하기 나름 이란 건 알겠어요. 다만, 최악은 생각해둬야겠죠. 내 입장에선 당신이 그냥 1년만 힘을 빌려주고 떠나는 건 일방적인 손해에요.”

 

  카일은 턱을 긁적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에이페리아는 계속 얘기해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일방적으로 1년이란 조건부를 거는 것 대신, 내 쪽에서도 조건을 걸고 싶어요.”

조건이라고?”

 

  카일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에이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때까지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로이에르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최소한 1년 혹은 그 이후. 당신이 힘을 빌려주는 그 기간 동안만큼은 로이에르를 당신의 기사단에 입단시켜줘요.”

 

  카일의 두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로이에르의 입은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카일의 기사단. 레이븐. 자타공인 대륙 최정예 전투 집단 중 하나. 그곳에 한시적이라도 로이에르를 소속시켜달란 말이었다.

 

흐음.”

 

  카일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에이페리아를 마주 봤다. 그녀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로이에르가 레이븐에 소속되게 되면, 그 일원으로서 훈련도 받고 실전에 배치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 자신이 황녀를 딱 1년만 도와주고 떠날 경우. 그냥 보내주기보단 적어도 황녀의 사람인 로이에르를 키워주게 만든 후 보낼 생각인 것이었다.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난 본래 도와줄 생각이 없었어. 단지 나한테 준 그 편지 때문에 우선 1년이라도 도와주겠다고 한 거지. 내가 조건부 승낙을 했다 해서, 황녀 전하가 조건을 같이 제시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카일은 무심하게 답했다. 그의 말에 에이페리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던 카일은 피식 웃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발상은 나쁘진 않군, 시도도 괜찮았어. 적어도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지. 아무튼, 그 제안 역시 조건부로 들어주도록 하지.”

 

  에이페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일은 로이에르를 슬쩍 쳐다보았다. 로이에르는 레이븐에 소속될지도 모른단 사실에 기대감과 긴장감이 공존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단원은 입단시험 이외의 방법으론 뽑지 않아. 그러니 애송이가 시험을 볼 수 있게는 해주지.”

그 입단시험의 내용은 뭐죠?”

 

  에이페리아의 물음. 카일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로이에르를 바라봤다.

 

레이븐의 부대장, 혹은 부대장 대리를 맡고 있는 단원 4명과 11로 모의 대결 후 4명 전원으로부터 승낙을 얻어내는 것.”

 

  에이페리아와 로이에르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레이븐의 부대장이라고 하면 두 남녀도 한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각각 이름이 잘 알려진, 카일 밑의 직속 실력자들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로이에르가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의 시험은 아니란 건 본인 스스로는 물론, 무예에 대해 잘 모르는 에이페리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카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애송이한테는 많이 버거운 시험이지. 그러니 전원 승낙 대신, 그 반인 2명에게만 승낙을 받으면 입단시켜주는 걸로 하지.”

  • 불꽃휴먼 2020.03.02 20:14

    너무 오랜만에 쓰셔서 그런지, 아니면 전편이 다른 시점이라 그런지, 전개가 너무 더디다고 느껴지네요 ㅜ
    요즘 트렌드의 독자 입장에선 '아 좀 빨리 본거지 가서 얘네들 좀 성장시키자. 산맥 지겹다...'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론 전편의 인물들과 얼른 조우해서 로리에르가 노예처럼 조련(?)당하면서 성장하고, 서서히 메인급 빌런들의 떡밥이 살포되는 그림이 빠르게 그려지면 소설의 긴장감과 박진감이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에이페리아의 경우, 분명 글의 흐름상 여주인데 땡깡부리는 공주님의 느낌을 못 벗어나고 있어 아직까진 매력도가 높지 않아 보입니다. 로리에르가 대기만성형 무력담당 기사의 포지션이라면 에이페리아 또한 다른 계통의 능력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모습이 있어야 캐릭터의 매력이 살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