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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05:30

Blizzard Guard(21)ep4. 실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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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칼라 병사장과 같은 조가 되어 오후주간의 첫 근무에 나섰다.
베일 일등병과 서던 오전주간 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주간근무의 교대경계는 SR과 SS 사이의 시간을 정확히 반 갈라서 이루어진다고 하니깐 말이다. 이를 하프타임(half time)이라고 한다.
"내 뒤 따라서 천천히 가자 아르펜."
오히려 칼라 병사장과 근무를 서니 좋은 점도 있었다. 바로 순찰 및 배치속도였다. 저번 주의 사수였던 베일 일등병의 거의 반절에 가까운 속도였다. 롱소드에 쇠뇌를 짊어진 중무장이라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소초내의 위치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덕분에 속으로 쾌재를 부를 정도였다. 실수만 안하면 되었다.
"베일이랑 서다가 나랑 근무서니 몸은 좀 편하지?"
"그, 그것이..."
순간 그렇다고 말할지 아니라고 말할지 고민되었다. 멈춰서서 그런 나를 슬쩍 뒤돌아보던 칼라 병사장이 웃으며 어깨를 짚었다.
"대답 안해도 돼.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니깐."
"아, 네..."
"그런데 말이다, 분대장이랑 같이 근무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한번 생각해보렴."
순간적으로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칼라 병사장에게 얼음장이 된 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어서 가자."
다시 표정을 풀며 앞장서는 칼라 병사장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근무지는 V라인을 넘어서 처음 베일 일등병과 돌았던 2경5초소였다. 2소초의 근무자들과 동시근무를 서기도 하는 이 초소는 우리가 맡은 경계영역 중에 가장 지대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철책선 바깥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르펜 잠깐, 이리로 따라와."
1경89초소를 지나 2경5초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칼라 병사장이 손짓했다. 철책선 뒤의 계단, 그 뒤로는 비스듬한 언덕이 나 있었는데 사람이 올라가기엔 조금 힘들어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육중한 무장으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잘만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짐작도 안갔지만 분대장의 명령은 따라야 했기에, 나는 하는수없이 그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올라서 앙상한 나무 사이를 지나치자마자 바로 초소가 나왔다. 생각치도 못한 지름길이었다.
"심심한데 쟤네들이나 놀래키자."
칼라 병사장의 시선이 초소 위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두 병사들을 향했다. 우리가 있는 위치가 사각인듯 아직까지 발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내게 조용하란 신호를 보내고선 허리를 숙이며 민첩하게 다가갔다. 나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랐다.
"아니 이런 씨이~ 부럴, 도대체 어떤 새끼길래 아직까지 교대를 안오고 있는 거야?!"
소리안나게 사다리를 타면서 올라오고 있을 무렵, 한 고참의 불평어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사다리를 거의 다 올라가던 칼라 병사장이 낮게 풉, 거리며 웃었다.
"이런 씨이~ 부럴 새끼라 미안하다."
"응!? 어어, 카, 칼라 병사장님...!"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칼라 병사장을 본 고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흡사 유령이라도 본 사람마냥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군모에 박힌 두줄화살이 부르르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름 모르는 일등병은 급기야 허리까지 숙이며 목소리를 떨었다. 칼라 병사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와 함께 그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계급을 떠나서 우리 다 같은 병사들이잖아? 근무자가 코앞에 도착할 때까지 찾지도 못했고 타분대 분대장 면전에서 욕한거쯤이야 뭐,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지 아무렴."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하는데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가 다 살이 떨리는 이유는 왜였을까?
사시나무 떨듯 떨던 두 고참들은 칼라 병사장에게 한참동안이나 빌고나서야 인수인계를 마치고 소초로 귀환할 수 있었다. 경계로를 내려가는 그들을  피식 웃으며 한참동안 지켜보던 칼라 병사장에 내게 넌지시 말했다.
"그거 아냐? 짬 먹으면 이런 짓도 재밌다."
"그, 그렇습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너 내초 서라."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이 정도면 쌀쌀한 축에도 못 껴."
"알겠습니다."
등에 메고 있던 쇠뇌를 초소 외곽에 거치시킨 칼라 병사장은 허리춤에서 롱소드도 풀어헤쳐 검집 채로 기대놓고선 팔짱을 낀 채 한참동안 철책선 바깥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표정이 진지해져 있었다.
"원래 내초와 외초는 사수랑 부사수가 한시간 간격으로 교대하는 건 알지?"
"베일 일등병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아마 저번주에는 계속 외초만 섰을 거야. 그때야 너 속성으로 교육시킨다고 그랬던 거고, 난 규정대로 할거니 안심해라."
"네."
까놓고 말해서 지금 칼라 병사장을 보고 있자니 정말 근무 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항상 굳은 표정으로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던 베일 일등병과는 영 딴판이었다.
이것이 바로 병사장의 여유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참, 어제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어제 한 얘기라면 황금마차에서 포션얘기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포션이 중요하다고 하신 뒤에 대화를 중단하셨습니다."
"그래. 그땐 여러사람 있는 곳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지. 하나 물어보자, 너 라이오나 메이아 보면 무슨 생각 드냐?"
"그저 범접하기 힘든 까마득한 고참이라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나는 두 고참들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드넓은 대동양같은 등판에 쩍 벌어진 어깨가 인상적인 라이오 상등병. 그리고 장딴지부터 시작해 어깨까지 온몸이 근육질투성이인 메이아 상등병.
두 고참 다 말수는 적었고 따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지만 이 분대라는 조직내에서 느끼는 존재감 하나만큼은 압도적이었다.
"만약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다 치자, 걔네들 몸만 보고 있어도 정말 믿고 의지하고 싶어지지 않겠냐?"
"네, 정말 그렇습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방을 관찰하던 칼라 병사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그런데 너, 쟤네 둘이 이등병 때는 정말 깡마르고 왜소했다고 말하면 믿겠냐?"
"네?!"
"라이오는 라만보다 말랐었고, 메이아는 세레나보다 소녀같았었지."
깜짝 놀란 나를 바라보며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옮긴 칼라 병사장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둘이 운동을 미친듯이 한거도 한거지만, 그 포션이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 몸을 만들진 못했을 거야."
"...정말 어마어마한 효과군요."
"이번에 거금 털어가면서 산 거도 그녀석들 더 먹이고, 걔네 후임으로 방패수와 부월수 할 애들 먹이려고 산거야."
"네..."
결국 나도 그 포션을 먹을 유력한 한명인 것이다.
듣다보니 작은 의문도 들었다. 입대전에 듣기론 군생활 때 모은 돈을 목돈으로 가게를 차리거나 집을 꾸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칼라 병사장도 귀족집안은 아닐텐데 과연 본인이 전역하고나서야 세대교체를 이룰 후임들을 위해 그 돈을 써야할 당위성이 있느냐였다.
하지만 뒤이어진 칼라 병사장의 이야기는 그 모든 의문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너, 혹시 사람 죽은 거 본적 있냐?"
"아사자라면... 몇번 본적 있긴 합니다."
"아니 그런거 말고. 살해당한 사람."
"네?!"
"나는 실제로 봤다."
올해 1월 한겨울때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우리 소대가 실질적으로 GP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소초생활을 시작한 것은 봄이 완연했던 올해 5월부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전에도 사전적응을 위해 페바에서 GP소초로 보통 일주일단위의 경계지원을 갈 때가 제법 있었다고들 한다.
경계지원예정지가 곧 다음에 교대해 근무할 소초였기 때문에 두세번 같은 곳에 경계지원을 가게 되니 안면도 트게 되고 친해진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타 부대의 병사끼리는 위계가 없었으니깐. 
비극은 세번째 경계지원이 끝나고 3주 뒤에 벌어졌다. 트롤과 고블린들이 철책선을 타고넘어와 습격했었고, 7명의 소초원이 죽고 십여명이 다쳤다고 한다.
"빈자리 메꾼다고 우리쪽에서 교대로 강제차출됬었는데, 그 때 당시엔 난리도 아니었어. 같이 근무 서던 아저씨들 눈물이 끊이지 않았지."
"..."
"죽은 사람들 중에는 나랑 친하게 지냈던, 전역하고 결혼을 약속한 커플도 있더라고."
담담하지만 슬픈 어조로 이야기하던 칼라 병사장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입담이 뛰어나서였을까, 사실 듣는 나도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보면서 깨달았지. 전역해서 어쩌고 하는건 정말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안 죽고 몸 성하게 전역하는 게 최우선의 일이라는 걸 말이야, 아르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날 응시하는 칼라 병사장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젖어있었다.
"내가 웃고 떠들며 정 들었던 사람이 어느 날 차디찬 시신이 되었다는 사실. 그걸 인지했을 때의 마음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 두세번 만났던 나조차도 그렇게 슬펐는데 몇년을 한솥밥 먹던 사람들은 오죽하겠냐?"
"분대장님..."
"다른 녀석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우리 소초원들, 아니 우리 분대 애들만큼은 정말 몸 성하게 군생활 마쳤으면 하는 게 분대장인 내 바램이다."
듣고 있던 나는 문득 눈 앞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이 분이 내 분대장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라 병사장은 정말이지 밝으면서도 강인하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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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 칼라의 대사를 적으며 갑작스레 돌아가셨던 분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분들이 영면하셨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아르펜의 빠른 전역을 위해 최대한 달려보겠습니다.
ps. 마고르->페니아로 수정했습니다.
  • SKEN 2019.04.15 19:24
    잘읽었습니다. 실전이라는 제목과 함께
    칼라 병사장의 이야기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분위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매번 느끼지만 칼라 병사장은 그저 빛..
    진정한 분대장의 귀감.. 참 군인..
    저런 분대장 밑에서 군 생활을 한다는건 진정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