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장편
2018.10.19 05:31

Blizzard Guard(19)ep3. 경계[5]

조회 수 39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iIEy6co.jpg

크게 홍역을 치렀던 첫날. 그리고 두번째 날부터 오전주간근무의 마지막 날까지 나는 베일 일등병과 같은 조에 같은 근무지를 계속 유지했다.
쉬는 날 없이 계속되는 일정이었기에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참자는 말만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키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늘도 별일 없이 한가하구만."
손을 이마에 붙인 채 사방을 둘러보던 베일 일등병이 중얼거렸다. 외초로 경계를 서던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라만 이등병에게 경계에 대한 모든 과정들을 들은 뒤에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었다. 완전히 외우지 못했던 둘째 날에도 한두가지만 틀렸었고, 셋째 날부턴 모르는 것 없이 척척 대답할 수 있었다.
경계로 이동의 경우도 악착같이 쫓아가며 단 한번도 뒤쳐지지 않았다. 그만큼 많이 힘들었지만, 덕분에 한번도 혼나지 않아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평온했었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 오전주간근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칼라 병사장이 우리 둘에게는 고생했다고 월요일에 바로 비번을 잡아주겠다고 했으니 오늘만 무사히 끝나면 당분간은 푹 쉬어도 되었던 것이다.
다만, 지금 괜히 신경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으레 있었던 베일 일등병의 시험이 오늘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르펜."
"...네?!"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화들짝 놀란 내가 소리쳤다. 아차.
"...관등성명 안 대냐?" 
"이, 이등병 아르펜, 주의하겠습니다."
"크. 됐다, 임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실수했을 때의 그 말투가 아니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안하던 짓을 하니 갑자기 무서워졌다.
잠시간의 정적 뒤, 베일 일등병이 다시 말했다. 전보다 한결 너그러워진 어조였다.
"속성으로 강압을 넣기는 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겠네. 이제 너 신병 다 뗀 거야."
아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로 호칭을 바꾼 거였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에게 베일 일등병이 뒤이어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한테 말했지? 악감정 한개도 없다고. 사실 네가 보여준 것도 있고 해서 평소보다 더 빡쎄게 굴린건데, 진짜 완벽할 정도로 통과하네. 대단하다 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냐. 넌 임마 정말 독종이야. 심하면 막내소리 한달 넘게 듣는 녀석도 있었어."
나는 왠지 그게 라만 이등병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다.
"아무튼, 넌 진짜 우리 분대의 차기 에이스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진 말고. 군대는 위계질서로 돌아가는 동네니깐."
"명심하겠습니다."
베일 일등병의 이야기를 들으며, 첫날 칼라 병사장과의 대화가 무슨 의미였는지를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관문 하나가 더 남았으니깐 긴장은 계속 유지하는 게 좋을껄. 어떻게 보면 그게 제일 힘드니까."
"네."
아마도 실전을 말하는 것일테지. 고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껏 신병들은 전입와서 반드시 한 달안에 적(주로 고블린이다.)을 죽이게 된다고 한다.
사냥을 통해 동물은 죽여봤지만 몬스터는 아직이었다. 뭐,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어서였을까? 말 없이 경계를 서는 시간은 그전에도 안갔지만, 오늘은 유난히 안가는 듯했다. 
상당히 지루하다는 생각이 유난히 들 즈음이었다.
"뭐, 포상이라고 하긴 뭐하고 재밌는 이야기나 하나 해줄게."
그렇게 말한 베일 일등병이 미간을 긁적이며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는 듯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 '카슈타르 반정'이 뭔지 알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50여년 전, 아르고니아의 왕조가 바뀌었던 사건이다. 하지만 어릴 때는 역사에 관심도 없었고, 귀족양자가 되려고 힘을 키우기 바빴던 시기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LD 654년 이맘때쯤에 있었던 일이지. 그전 왕조의 마지막 왕, 아니, 폐자(閉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왕이라고 할게. 아무튼 당시 남부의 실세였던 카슈타르 공작이 폭정을 이유로 주위 가문들과 함께 기존의 왕이었던 네프라 3세를 실각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사건이었지."
"그랬었군요."
"아마 당시에 어린 세자가 행방불명되어 한동안 논란이 일었는데 데리고 도망치던 왕비가 함께 자살했다고 확인이 됬었다나봐."
"좀 이상하긴 하군요. 느닷없이 자살이라니..."
"뭐, 역사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믿기 싫어도 믿어야지. 아무튼 이제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때 이후로 우리 지방에서 들려오는 민담같은 거야."
"네네."
왠지 흥미진진해진 나는 기대어린 어조로 대답하며, 눈으로는 전방을 쫓으며 귀로는 베일 일등병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는 카슈타르 공작이 네프라 3세를 폐위시킨 후 흉흉했던 민심이 차츰 가라앉을 무렵의 일이었다고 한다. 베일의 고향, 오르거스의 외곽지에서 사냥을 하던 사냥꾼 쿠아라는 진귀한 광경을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검은 뿔의 사슴이 자신을 마치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황당하여 사냥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손사레를 쳐보았지만, 그럼에도 검은뿔의 사슴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꿈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도 생생했기에, 쿠아라는 그 다음 날도 그 자리에 갔다. 왠걸, 검은 뿔의 사슴이 또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애처로운 눈망울로 바라보며 숲속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는데, 지나갈 때마다 검은색 발자국이 찍혀져 있었다고 한다. 
홀린 듯 그 뒤를 쫓아가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쿠아라의 앞에 사슴은 온데간데 없고, 두개의 갈림길과 각각 한군데씩 찍혀 이어져 있는 두가지의 발자국만이 남았다고 한다. 검은색과, 마치 황금을 찍은듯한 황금색의.
이 괴이쩍은 현장에 몹시 무서워진 쿠아라는 그 길로 영주성으로 가 모든 일을 영주에게 고해바쳤다.
'필시 황금색의 발굽을 따라가면 금은보화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한 영주는 날랜 병사들을 풀어 황금발굽이 찍힌 길로 보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영주가 보낸 병사들은 앙상한 해골이 되어 갈림길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분노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 영주가 공표했다.
'분명 황금발굽의 끝에는 악랄한 마녀가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 황금발굽이 이어진 길의 진실을 알아내는 자에게 평생 써도 모자랄 금은보화를 하사하겠다!'
처음에는 수많은 모험가들이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너나할것 없이 무리를 지어 황금발굽의 길을 향했다. 하지만 들어가는 족족 해골이 되어 덩그러니 나타났으니, 어느새 겁에 질린 사람들은 그 길을 무서워해 폐쇄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영주도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민담은 여기까지야. 꽤나 교훈이 있는 이야기지."
"다들 황금발굽에 눈이 멀어 쿠아라가 실제로 보았다는 검은뿔 사슴이 간 길은 쳐다도 보지 않았군요."
"그래. 뒷내용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항상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곤 했었지."
어릴 적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던 베일 일등병이 천천히 품에서 시계를 꺼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역시 시간 조지는 데에는 옛날이야기만한 게 없네. 슬슬 복귀할 준비하자, 아르펜."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초소에 도착한 다음 근무자들과 인수인계 절차를 나눈 뒤, 베일 일등병의 뒤를 따라 사다리를 내려갔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힘들게 오르내렸던 경계로가 이리 가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베일 일등병과 함께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며 그가 이야기했던 민담을 떠올렸다.
눈앞에 보이는 재물에 현혹되지 말고, 중요한 게 뭔지를 생각하라는 뜻인걸까.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에게 적절한 교훈이 아닐까 싶었다.
베일 일등병이 모든 것을 말해주기 전까진 나는 내가 서고 있는 근무가 시험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깐 말이다.
양자시험 토너먼트를 우승해 헤임달 가문임을 상징하는 은빛늑대목걸이를 손에 쥐었을 때는 세상을 손아귀에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나는 아직 어렸다. 이곳에서 군생활을 하며 조금 더 성장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여어."
경계로를 지나며 합류하는 인원이 있었다. 메이아 상등병과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어때, 일주일 내내 근무 서보니까?"
"괜찮...지는 않고 아주 죽을 맛입니다."
"그치? 아무튼 생활관 침상에 누워서 하루종일 뒹굴거릴 상상이나 해라."
"상상만 해도 즐겁군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메이아 상등병과 베일 일등병에게서 살짝 뒤쳐진 채, 나는 안젤리카 일등병과 걸음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었다.
"좋겠네, 마지막 날이라서."
"네. 아주 날개만 있으면 날아가버리고 싶군요."
"아니, 그러지는 마라. 탈영하면 내가 활로 쏴버릴 거니깐."
잠시 멈춰선 채 활쏘는 시늉을 하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아우 살벌하셔라...
"참, 그나저나..."
나는 안젤리카 일등병에게 오늘 베일 일등병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뛸듯이 기뻐했다.
"이야. 진짜가?"
"네. 그런데 안젤리카 일등병님,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야 당연하지. 내 동... 아니, 후임이 신병시험 당당하게 합격하고 분대에 녹아들었는데."
"그래도 저보다 더 기뻐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뭐, 아직까지 실전이 남아있으니까 조심해라. 조만간 고블린 아들 기웃거릴거라."
"그래야죠..."
소초에 거의 다 도착한 것을 확인하며, 나는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실전에 대해 단단히 대비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

에피소드 마지막이라 분량이 조금 적습니다.
하도 잘 써져서 연참 달려봅니다. 
전개를 빨리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네요...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ps. 그러고보니 실로 얼마만의 연참인지 모르겠네요.
  • 반딧불 2018.11.03 20:29
    베일 일병이 갈군 이유가 이제서야 드러났네요
    어떤 연유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시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케릭터의 분위기에 주인공이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캐치하고 당황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뭔가가 있나보다 하고 궁금증 플래그를 세워서 이질적인 요소에서 거리가 멀어졌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있네요
    민담 부분은 너무 재밌었습니다! 소설에서 저런 설화를 들려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흥미가 많습니다! 뭔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어떤 요소가 될것같아 너무 좋습니다!
    심지어 기대감을 증폭하는 요소라고 할까요?
    아르펜은 안젤리카에게 있어서 동생과 같이 다가오나봅니다
    이번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는 부분이 너무 가슴 뭉클해지고 따뜻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풀어나가는 전개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민담과, 앞으로 주인공을 시험할 난관이 무엇일지 기대하게 만드는 것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쭉 기대하겠습니다
  • 불꽃휴먼 2018.11.06 11:36
    너무 당황시키면 늘어지고 괴리감 생길까봐 심플하게 '뭐지?' 정도로 끝낸 부분인데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같은 구절 하나 추가시키면 적당할 듯 싶네요.
    민담에 대한 아르펜 개인의 생각은 개인적으론 조금 부족하지 않나 하는 부분이었는데 좋게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항상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SKEN 2019.04.15 18:54
    역시나 재밌습니다. 이 재미난걸 바로 못보고
    개인사정으로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보는데 후회막심.
    맥거핀? 이라는 개념이던가요? 아무튼 그렇게 느껴지는
    민담 이야기가 좋네요. 아르펜의 위주로만 돌던 세계관이 잠깐 환기되며 넓어졌다 돌아온 느낌입니다.
    공과 사를 딱 구분하며 시험에 통과한 아르펜을 인정하고
    딱 적정선을 풀어주는 베일을 보고있자니 역시 특급 일짱..

    P.S 이름 불렸을때 ...네??!! 하며 깜짝 놀라 대답하는 장면에서 톤과 상황이 머리속에 딱 떠오르는 것이.. 역시 기억속 깊은곳에 잠들어 있던 독자의 군시절을 들춰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