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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7 23:57

통조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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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 통조림 프로젝트
0. 호라와 샨 삼촌의 잡담.


 남자의 이름은 샨이었다. 샨의 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달의 여왕 군도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라쓰롤의 시민들에게 미지에 가까운 울 반도의 황인종인 샨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명확한 이야기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단편적인 것만 알려졌는데 '10년 전에 라쓰롤에 정착했고, 정말로 어느 순간에 라쓰롤의 손꼽히는 거부가 되어 있었다.' 정도로 그의 대한 것들, 특히 그의 과거는 극히 알려지지 않았다.
샨 은 라쓰롤에 큰 영향력 있는 거부였지만, 다른 명사들이 공개석상에 쉽게 모습을 나타나 시민들과 어울림을 당연히 여기는 것과 달리 그의 모습은 정말로 볼 수 없었다. 샨은 자신의 철옹성 같은 저택에서 왕으로서 군림하기를 좋아했지, 밖으로 나와 라쓰롤의 시민들과 대화를 즐기는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라쓰롤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틀어박힌 통에 여럿 뜬소문만이 무성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포악한 사막의 오스풀 제국에서 도망친 귀족으로 정치적인 매장 때문에 망명했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노예출신으로 주인의 재산을 훔쳐 라쓰롤로 도망쳤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북방의「노쓰 팽」의 합스라부르트 왕가의 시종 중에 한 명으로 알렉서 2세가 쿠데타로 인해 암살당하자, 왕가의 숨겨진 재산을 정당한 후계자를 위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소문도 샨이라는 사내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호라는 베일에 쌓인 샨의 모습을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작은 소녀에게 샨은 정말로 이상한 삼촌이었다. 그녀의 삼촌은 라쓰롤의 서쪽 지구인 ‘퀸 네렐리아’의 15번가에 자리잡은 3층 건물의 왕이었다. 호라가 ‘붉은 아가씨’라는 별칭으로 붙인 이 3층 건물은 샨이 개조한 건물이었다. 겉 모습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100년전에 유행한 오래된 양식의 건물의 1층은 카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2층과 3층은 샨의 왕국이었다. 1층의 구석에 숨겨진 청동 계단을 따라 그의 왕국에 발을 딛으면, 지붕 전체를 아치형 유리돔으로 만들어놓아 정오의 따사로운 햇빛이 집 안으로 스며 들었고, 간혹 바다에서 찾아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이면, 빗소리가 오폐라처럼 웅장하게 들리는 구조였다. 2층과 3층은 많은 방을 가졌지만, 공통점은 하나가 있었다. 층간이 없이 뻥 뚫린 거대한 로비. 그 곳에는 많은 그림들과 조각상. 오래된 책장들과 빽빽하게 자리잡은 책이 옥상의 유리창에서 흘러 내리는 햇살을 받으며 샨의 왕국을 방문한 손님을 기다라고 있었다. 그리고 샨이 곳곳에 놓여있는 쇼파에 아무렇게나 눕거나 앉아서, 자신의 왕국에 파묻혀 있었다.

우중충한 잿빛위로 정오의 햇빛이 흘러내렸다. 잿빛의 단발머리. 작은 벌새모양의 장신구가 달린 머리끈으로 한쪽을 곱게 땋은 새하얀 피부의 단발머리 소녀, 호라는 푹신한 줄무늬 문양을 가진1인용 쇼파에 앉아 맞은편에 앉아있는 샨을 관찰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짧게 깎아 험한 인상을 주는 검은색 머리. 기른다고 길렀지만 밋밋하기 짝이 없는 턱과  콧수염. 라쓰롤에서 보기힘든 약한 구리빛의 살피부. 무덤덤해 생기를 잃은 검은 눈. 풍만한 볼살. 호라는 샨의 얼굴을 보면서 어릴 때, 유모가 읽어준 '400일간의 카델의 이야기'라는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악덕상인의 얼굴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에 혼자 속으로 웃음을 떠뜨렸다.
돈만 밝혀 아내까지 팔아치운 동화속의 악덕상인과 샨은 외양만 비슷하지 영 딴판인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샨은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그렇게 웃고있어?"
"제가 언제 웃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삼촌?"
"그 놈의 삼촌소리."
호라의 시치미에 큰 쇼파에 누워있던 샨은 툴툴거리며 하인이 가지고 온 담요 속으로 파고들었다.
"언제까지 삼촌이라 부를꺼야? 자칭 조카야"
"삼촌은 삼촌이걸요."
"피가 한방울도 안섞인 남을 삼촌이라 부르면 곤란하단다. 자칭 조카야."
"하지만 아버지께서 삼촌이라 부르라고 했는데요. 삼촌"
호라의 말에 샨은 앓는 소리를 낼뿐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담요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 그때 싸인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였어. 젠장
호라의 자홍색의 눈동자에는 샨의 투덜거림을 듣고는 호기심이 번들거렸다.
"삼촌. 무슨 싸인이요?"
"그 삼촌소리 좀 그만 불러라. 안그래도 심란하단다. 자칭 조카야"
"자칭이란 말은 빼주세요, 삼촌. 조카는 조카지, 자칭 조카가 어디있어요? 조카라고 불러요. 삼촌"
"그 자칭 조카가 너란다. 조카야"
호라는 샨의 말에 예쁘장한 자기 얼굴에 걸맞는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이제야 조카라고 말해주시는 군요. 삼촌"
"젠장. 내가 언제부터 네 삼촌이 됬다는 거야"
"그래서 인정을 안하실껀가요? 삼촌"
그 루데야가 묻자 샨은 또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담요를 걷어차고는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짧은 반바지에 가운만 대충 걸쳐입은 샨의 커다란 몸집이 들어났다. 샨은 자신의 짧은 머라카락을 오른손으로 빡빡 긁적댔다. 그리고 빌어먹을 싸인이라 중얼거라며 연신 곱씹기 시작했다.
"삼촌. 그 싸인이 어떤것 인지 이야기 안해주실껀가요?"
"알 것 없어!"
"그렇다면 안해주셔도 상관없어요."
호라는 그녀의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셨던 '여유롭게!'를 속으로 연신 중얼거라며 최대한 여유있는 모습으로 자신이 앉야있던 쇼파에 파고들어 샨이 사방에 어질러놓은 책으로 쌓아놓은 탑에서 아무거나 꺼내 펼쳐들었다. 덕분에 책더미는 우르르 무너졌다. 호라는 태연하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샹기움. 요정왕의 혈통의 몰락]이라는 소제목 아래로 쓸데없이 자세한 계보가 나와, 무척이나 따분해 보였지만 호라는 억지로라도 책장을 넘겼다.

호라가 아는 삼촌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척이나 입을 열어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집에만 쳐박혀서 놀고있는 사람인지 헷갈리는 사람이었다. 호라가 책장만을 넘기며 조용해지자 샨은 뚱한 표정을 짓다가 궁시렁거리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망할. 꼭 알고싶냐?"
"이야기 해주시면 듣을 수는 있어요. 삼촌"
"꼭 너구리영감마냥 똑같이 말하는구나. 자칭 조카야"
"또 자칭을 붙어야 해요?"
"내 마음이다."
호라는 애들마냥 굴어대는 삼촌을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구리영감은 누군데요?"
"네 아버지"
"아버지가요?"
호라는 삼촌의 대답에 약감의 당혹감을 느꼈다. 샨은 그녀가 당혹감을 느끼는 것을 모른다듯 그냥 제 말을 이었다.
"싸인이 궁금하다며? 그 싸인 때문에 내 앞에서 재미도 없는 [세계왕족 도감]을 억지로 펼쳐서 대충대충 넘기는 맹랑한 꼬맹이를 집밖으로 못걷어차고 있잖아"
호라는 삼촌의 말에 무겁기만한 책을 덮고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책들 사이로 놔두며 물었다.
"삼촌,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요"
"들을꺼야? 말꺼야?"
"듣고있어요."
샨은 쇼파에 엎드린 채, 말을 이어갔다.
"너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들고있던 양피지 쪽지 기억해?"
"네"
"그거 「유산」이야."
"「유산」말안가요? 혹시 마법사 한가람이 만들었다는 그것이요?"
호라가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말하자 샨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
"종이쪼가리가 「유산」이라니... 삼촌, 농담도 심하셨어요"
"그 종이쪼가리에  싸인하는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널 조카로 모셔야하는 내 입장은 거짓말이 아나란다"
호라는 호기심 반, 장난기 반이 섞인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 유산이 뭐길래 삼촌이 끙끙거리게 만드는 건가요?"
"네가 처음 온 날을 기억해?"
"그럼요. 이 저택의 첫 날이잖아요."
샨은 지난 2주 전에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제는 팔자에도 없었던 조카가 되어버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마저 속박해버린 어린 소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날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꺾이고 서서히 다가온 가을의 선선함이 해풍을 따라 찾아온 날이었다. 샨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왕국에 파묻혀있기를 원했지만 이 날만큼은 어쩔수 없이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의 뜬금없는 행차에 저택의 단 하나뿐 하녀, 빅스는 유달리 호들갑을 떨어댔다. 샨은 자신이 밖으로 새삼스런 일이었다는 사실에 서글픔이 찾아온 것을 애써 무시했다. 늘 편한 복장으로 사는 샨에게 너무나 오랜만에 입은 정복은 너무나 갑갑했다. 곱게 다려놓은 흰 셔츠에 매어놓은 넥타이는 너무나 갑갑해서 몇번이나 느슨하게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빅스는 쏜살같이 나타나서는 넥타이를 제대로 매어놓고는 가버리는 통에 샨의 기분은 짜증스럽기만 했다. 빅스는 샨의 통에도 익숙한 듯, 아이를 구슬리듯 샨에게 초가을용 외투를 입혔다.
샨은 너무나도 일을 귀찮게 만든 그 놈의 면상을 봐야한다는 사실이 빅스를 보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울스란의 엥거이란 별명을 가진 중개인이 취급하는 물건은 위험성 때문에 다룰 수 있는 소수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저택에는 샨을 제외하고도 그 물건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2명이나 더 있었지만 각자의 사정때문에 샨은 평소에 생기지도 않는 책임감을 가지고 억지로 저택 밖으로 나가게 됬다.
이 날따라 평상시에 부르면 길어도 10분이면 오던 마차가 한 시간만에 도착했고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할 정도로 라쓰롤의 시내는 번잡했다. 그 와중에 목의 넥타이는 샨의 목을 더욱더 조이는 것만 같았다. 마차에 같이 타서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눈매는 어렴풋이 싱글벙글 웃고있는 빅스만 아니였다면 샨은 옷이고 나발이고 모두 벗어 던졌을지도 몰랐다.
샨의 고역은 그가 시내에 빅스를 내려준 다음, 그를 몸소 행차하게 만드신 중개인의 오리궁둥이를 한대 걷어찬 후, 물건 값을 치루고나서, 제과점 앞에서 케이크 박스를 5개나 쌓아놓고 기다리던 빅스를 우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새로운 고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샨이 울스란의 앵거가 거의 반 년동안 질질 끌다가 겨우 빼앗다시피 가져온 물건을 외투속에 집어넣는 동안 빅스가 양손에 케이크 상자를 잔뜩 쌓아놓고는 먼저 내려, 종종걸음으로 먼저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가는 숨겨진  계단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특유의 짧은 말투로 샨을 찾았다.
"샨! 샨!"
"왜?"
마차의 마부에게 얼른 일당을 준 샨은 계단으로 뛰어갔다. 그가 계단에서 본 빅스는 같이 외출했을 때의 복장 그대로 다리에 딱 달라붙는 승마용 바지, 위로는 신사들이 입는 검은색 정복(그녀의 굉장한 볼륨감은 숨기지 못했지만!)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있는 그녀가 케이크 박스를 바닥으로 쏟은지도 모른채, 얼굴 표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새파란 눈동자만은 깜작 놀란 듯, 불안해해고 있었다.
그리고 빅스는 자신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샨에게 물었다.
“딸?”
“뭔 소리야!”
샨은 뜬금없는 빅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빅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계단에 기대어 세워놓은 한 소녀가 계단에 앉아 있다가, 샨과 빅스를 보고 일어서고 있었다.
소녀의 발굽은 닳고 밑창이 떨어지기 시작한 연분홍 구두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고, 스타킹에도 진흙이 튀어있었다. 입고있는 회색 코트는 커서 흘러내릴것만 같았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머리는 복슬리는 사자갈기 같아보였다. 소녀는 약간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딸"
빅스가 인사를 받고는 소녀에게 입꼬리만 올라가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샨은 빅스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부정했다.
"누구 아이인데?"
빅스는 자세히 관찰해야 볼 수 있는 지독하게 희미한 비웃음을 짓고는 샨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고친 결과."
“아니거든!”
빅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는 샨에게 물었다.
“아니야?”
“봐라, 저 애랑 나랑 어디가 비슷하냐고? 내 피부는 저렇게 하얗지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닮았겠다!”
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건강한 올리브빛이 감도는 손등과 소녀의 새하얀 얼굴을 연신 변갈아보다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듯 말했다.
“나 사고쳤어?”
“어이.”
“너, 내 딸이야?”
“아뇨. 두 분 모두 제 부모님은 아니에요.”
빅스의 말에 소녀는 둘의 의미없는 궁금증을 해결했다. 그제서야 빅스는 자신이 떨어뜨린 케이크 상자를 발견했다. 샨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빅스를 무시하고 소녀에게 물었다. 
“왜 남의 저택 유일한 입구를 막고 있는거냐?”
“다름 아니라…”
“여기서 동냥질하면 한푼도 안줄꺼야. 거리에 넘쳐나는 거지에게 줄 돈이 있으면 커피를 한잔 더 마시지…. 하여간 줄 돈은 없어.”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 분들의 성함이 샨 로, 유스티…”
“잠깐, 누구?”
“에? 아. 호라라고 불러주세요. 볼드 성의 백…”
“누구 찾냐고!”
샨은 호라의 말을 3번이나 잘라먹고는 그녀의 어깨를 강압적으로 잡고는 고함쳤다. 샨의 고함은 굉장해서 빅스가 깜짝 놀란듯, 샨을 흘겨봤다. 곧, 망가진 케이크를 수습하느라 정신을 팔렸지만 말이다.
“사람을 찾고 있다고요. 성함이 샨 로…”
“나!”
“무슨 말인가요?”
“샨 로가 내 이름이라고"
샨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는지 호라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샨은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호라의 어깨에서 손을 땠다. 샨은 헛기침을 한번 내뱉고는 진지하게 호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여기 사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어요."
"아버지?"
샨은 라쓰롤에 정착한 이례로, 자신의 저택을 가르쳐줬던 사람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사는 벗들이 이야기를 한 것일까? 샨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라는 샨이 고민에 빠지는 동안,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샨에게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일단 보여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약간은 꾸깃꾸깃해진 편지봉투였다. 샨은 얼른 봉투를 받아 확인했다.

ㅡ 빌어먹을 샨 로에게 ‘볼드의 이실페라라’가 보냄.

꽤나 잘 써놓은 문구에 샨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없이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질좋은 흰 종이가 하나 있었다. 샨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극히 간결하고 짧은 문장이 덩그러니 있었다.

ㅡ악성 채무자인 샨 로와 그 일당들은 당장 빚을 갚게. 그 빚은 내 딸을 부탁하는 것으로 변제하겠네.

샨은 편지를 구겨버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호라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 종이 버리셔도 되요. 아, 그리고 앞으로 잘부탁해요. 삼촌"
호라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샨은 화들짝 놀래서 고함쳤다.
"누가 삼촌이야!"
호라는 샨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듯 자신의 커다란 회색코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샛노란 종아쪼가리. 빛바랜 종이는 꾸깃꾸했고 잉크가 번져,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었다. 솔직히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샨은 호라가 종이를 꺼내는 순간, 섬뜩함과 동시에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샨은 조용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떨리고 있었다.
"혹시, 산-티아노의 도살자라 불리신 적이 있으시지 않니?"
"그 별명을 좋아하셔요. 삼촌"
“망할!”
샨은 짧게 외치고는 머리가 아찔거림을 느꼈다. 그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긴 시간속에 파묻어놓았던 과거의 자신의 알량함이 만들어낸 결과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샨은 호라를 보면서 희미한 기억이 점차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11년 전의 산-티아노 요새. 이스의 신족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수시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침공해오는 그 해안 요새는 희귀한 자색 눈동자의 기병대 장교가 있었다. 그는 분명히 시대를 잘못 타고난 기사였다. 일찍이 ‘검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듄의 토너먼트의 우승자로 명성을 날렸을 것이다.
한 손에는 기병들이 사용하는 사브로를 다른 손에는 피스톨로 무자비하게 이교도를 도살한 흉폭한 기병대 장교는 요새 수비병들에게는 언제나 영웅이었다. 이교도에게 저주와 두려움을, 수비병에게는 환호와 숭배를 받은 이 장교는 언제나 자신의 젊은 아내와 아직 핏덩이인 딸의 모습을 담은 작은 초상화를 로켓에 담고 다니면서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샨도 그 로켓의 초상화를 기억해냈다.


 청초하고 유달리 창백하게 그려진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살포시 웃으며, 자신의 갓난아이의 뺨에 키스를 하던 그림. 샨은 그 순간 깨달았다. 눈 앞의 소녀의 자색 눈동자, 회색 머리카락. 산-티아노의 무너져가는 요새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그의 딸이 눈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맙소사"
샨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는 호라를 바라봤다. 그의 딸이 확실했다. 소녀의 얼굴에는 함께 웃고 울었던 남자의 흔적이 가득했다.
“샨, 샨”
빅스가 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샨이 빅스에게 시선을 주자 호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를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감시자"
샨은 이 저택의 숨겨진 계단의 밖으로 조심히 몸을 내밀었다.

라쓰롤 서쪽 지구인 ‘퀸 네렐리아’는 대부분 오렌지색 벽돌과 커다란 아치형 창문들이 가득한 건물로 빽빽이 들어섰다. 거리마다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가스등과 마차가 오가는 도로가 놓인 그의 저택 앞의 거리는 평소처럼 북적거렸다. 중절모를 쓴 신사들. 우아한 우산을 손에 든 화려한 귀부인. 거리에 넘쳐나는 거지와 소매치기. 한껏 거드름 피고 있는 파란 제복의 경찰.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이들이 오갔다. 샨은 자신의 저택의 맞은편의 건물 기둥에서, 자신의 저택을 눈여겨보는 검은색 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한 사내 둘을 금방 찾아냈다. 샨은 잠시 자신의 저택에 쉽게 찾을 수 없는 계단의 구석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둘은 꽤나 힘을 쓰게 생긴 거한이었다. 거기에 코트위로 착용한 요대에는 검이 매달려있었다. 폭이 크고 두꺼운 검인 모양인지, 검집이 컸다. 샨은 조용히 가늠해봤다. 두 거한은 검을 쥐고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거한은 자기들끼리 조심스럽게 속닥거리더니, 한 사람이 서둘러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샨은 아직도 계단에서 있는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빅스는 자신이 쏟은 케이크 박스를 대충 정리해, 다시 박스를 들고 있었다. 호라가 대화도중에 갑자기 사라진 샨에게 의구심이 든 모양인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나요? 삼촌?”
“난 네 삼촌은 아니야. 언제까지 서있기는 곤란하고, 일단 들어가지”
샨은 호라의 여행용 가방을 대신 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낡은 황동열쇠를 하나 꺼내 호라에게 건네줬다.
“먼저 올라가. 열쇠도 있는데 문 정도는 열 수 있겠지?”
호라는 샨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아무런 대꾸없이 계단을 먼저 올라가기 시작했다. 샨과 빅스는 호라가 계단을 전부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나서야 대화를 나눴다.
“감시자?”
“확실해. 저 꼬마를 따라온 모양이야”
“삼촌?”
빅스는 샨에게 상당히 짧은 단어로 함축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샨은 한숨을 쉬고는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는 뒷모습은 너무나 힘이 없었다. 

호라가 처음으로 샨의 저택의 밋밋하고 낡은 청동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거대한 유리 돔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책장들과 예술품들이 미로처럼 뒤엉켜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거대한 로비는 호라가 가본 개인이 운영하는 어떤 도서관이나 미술관보다 많은 책들과 예술품이 있었다. 호라는 조심히 발을 내밀었다. 오래된 단풍나무로 짜놓은 바닥은 호라가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아무렇게나 세워진 책장마다 다양한 이름의 책들이 잠들었고, 역사적인 인물의 흉상들, 괴상하고 흉폭한 괴물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의 조각상들이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소녀가 처음보는 양식의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책장들처럼 곳곳에 위치한 수납장에는 호라가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히 있었다. 로비는 복잡한 미로였다. 곳곳에 사람들의 호기심과 소유욕에 불을 지르는 그런 미로. 호라는 샨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구성하는 컬렉션을 구경하다 한 수납장 앞에서 멈춰 섰다.

수납장의 유리문 안으로 이런 저런 물건들이 가지런히 있었지만, 유독 호라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은반지였다. 보라색 곽 안에 있는 은반지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여인의 작은 손가락에 들어갈 크기의 은반지는 섬세하게 기하학적인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호라의 시선은 한참이나 그 은반지에 빠져 들어갔다. 호라가 처음 보는 은반지는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평생 보아온 물건처럼 지극히 당연함을 느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은반지는 번득였다.
“저거 멀쩡해보여도 저주받은 물건이야”
호라는 화들짝 놀랬다. 급작스럽게 던져진 말은 은반지의 모습에 빠져들던 호라의 심장을 난폭하게 붙잡아, 그녀의 육신으로 집어던졌다. 호라는 순간 딸꾹질이 올라온 것을 겨우 삼키고 뒤를 돌아봤다. 샨이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서서 딱딱한 표정으로 은반지를 내려보고 있었다.
“주인을 가리는 마물이야. 그러니 더더욱 쓸모없지.”
샨은 냉정하게 은반지에 대해 평가를 하고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미로 곳곳에 있는 쇼파 하나를 대충 자리를 털고 앉았다.
“일단 앉아”
샨은 자신의 목을 갑갑하게 조이고 있던 정장과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는 약간은 땀에 절여있는 셔츠 차림으로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호라에게 앉을 것을 권유했다. 호라가 샨의 맞은 편의 소파에 앉자, 샨은 턱을 손등으로 받치고는 호라를 바라본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샨의 얼굴에 부딪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호라는 샨에게 물었다.
“삼촌, 제 가방은요?”
“일단 빅스에게 맡겼다.”
호라는 샨이 말하는 빅스가 누군지 금방 깨달았다. 이 저택에서 샨 말고 본 유일한 사람은, 샨 옆에서 케이크를 쏟고는 딱딱히 굳었던 여성이 전부였으니까.
“옆에 계시던 여성분 성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데요"
“그냥 별명이야”
샨은 싱겁게 말했다. 그리고는 양 손에 땀이 찬 모양인지 자신의 셔츠에 손을 대충 닦았다. 그는 호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거대한 자신의 저택의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급작스럽게 와서 놀랬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샨은 자신의 메말라가는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비비고 있었다. 샨은 입안에 고인 침을 한번 삼켰다.
“…… 이런 말은 하면 안되지만, 그 분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다”
“저도 모르는 일인데, 삼촌이라고 아실까요?”
“삼촌이란 말은 빼주렴.”
샨이 정색하며 말하자, 호라는 샨을 빤히 쳐다보고는 정말 태연하게 말했다.
“삼촌이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신용불량이라면,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불행한 거군요? 삼촌만 믿고 먼 타향까지 절 보내셨거든요.”
샨은 그 순간, 하려고 했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강하다고 느꼈다. 햇살은 너무나 따가워서 얼굴을 마구 찔러댔다. 눈동자는 햇빛에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샨은 억지로 호라에게 말했다.
“젠장, 나도 사정이 있어.”
샨은 한숨을 내쉬고는 쇼파에 푹기대어 묵묵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가라. 하지만 네가 여기서 지내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
"고향으로 갈 여비는 넉넉하다 못해, 넉넉하게 줄게."
"………"
호라는 샨의 대답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둘은 침묵했다.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뛰어 놀며, 두 사람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샨은 메말라가는 입안이 너무나 껄꺼러웠다.

샨은 불편한 침묵이 자신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을 걷어차버리듯, 말했다.
"집으로 갈 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호위로 붙여줄게. 이름있는 용병들이고 나와 거래 관계인 사람들이니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런 걱정없이 무사히 갈 수 있을거다"
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회색머리의 소녀는 소매 끝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샨에게 당당히 말했다.
"그래서 삼촌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버리시려는 건가요?"
"……"
샨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 속으로,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샨은 자신을 바라보는 호라의 시선이 너무나 불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분과의 약속은 약속일 뿐이야."
샨은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그 분과 함께 산-티아노에서 했던 약속은……… 아무런 법적인 효력이 없어."
"그렇게 말하실 건가요?"
"젠장. 나도 이렇게 매몰차게 굴고 싶지 않아!"
샨은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의 말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 샨의 얼굴은 지독하게 딱딱하게 굳어 석고상같았다. 그는 호라에게 명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하려고 했다. 샨은 무거워진 입술을 때려했다.

───퍼어어어엉!!!

순간 귀청을 날려먹을 듯한 폭발음. 건물을 뒤흔드는 진동. 진동파와 흙먼지가 로비를 몰아친다. 폭발은 계단 쪽에서 일어났다. 샨과 호라는 폭발에 바닥으로 튕겨 나뒹군다. 호라는 난생처음 느끼는 폭발에 귀에서 지독한 단음이 들렸다. 날카로운 이명은 소녀의 뇌를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폭발에 휘말린 책들이 산산히 찍어져 불타버린 재들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뭐야?!"
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강력한 폭발음은 머리 속에 묻어뒀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냈다. 산-티아노 요새를 공격하던 이도교들이 사용했던, 소구경 돌격포! 작은 포대는 요새벽을 부수는 화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오래된 저택의 청동문 따위야 거뜬히 부수고도 남았다.
"미친, 어떤 놈들이 시내에서 포를 쏴대고 지랄이야!"
샨은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호라에게 다급히 다가가 일으켰다. 흙먼지가 소녀의 몸 위로 가득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샨은 호라의 몸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고는 말했다.
"젠장! 호라, 내 얼굴을 봐. 호라!'
호라는 샨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호라의 몸은 힘이 없이, 축 늘어질 것만 같았다. 샨은 호라의 빰을 가볍게 쳤다.
"호라!"
"네? 네!"
호라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샨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호라에게 명령하다시피 말했다.
"호라, 정신 똑바로 차려! 젠장,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상황은 아닌게 분명해."
샨은 책장들의 틈을 가리키며 호라의 등을 떠밀었다.
"저기 보이지, 달려! 최대한 빨리! 비상구가 있으니 도망쳐!"
호라는 샨을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샨의 얼굴을 쳐다보다 샨이 크게 '달려!'라 소리치자, 그때서야 달려가기 시작했다. 샨은 호라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샨──결계!!"
빅스의 다급한 경고가, 폭발음이 가라앉은 로비 위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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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쓴 부분입니다. 아.. 왠지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