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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23:27

조개껍데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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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할머니는 새벽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말한마디도 밖으로 꺼내질 않았다. 나도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 했지만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어색함이 돌았다. 그 어색함을 깬 것은 나였다. 할머니는 진홍색 털조끼를 입고 구들에 앉아서 홈쇼핑을 말없이 보고 계셨다.

-할머니

할머니가 눈을 TV에 응시한 채로 대답하셨다.

-왜 그려

-마당에 있는 개들이 조개껍데기를 물고 돌아다니는 것 본적이 있어요?

할머니는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았는데 처음에는 놀란듯한 표정이었지만 조금 뒤에는 슬퍼하는 눈으로 가만히 내 얼굴을 뜯어보고 계셨다.

-왜 물어 그걸. 개들이 하는 일까지 신경 쓸 나이냐

할머니는 개들이 왜 조개껍데기를 산길 위 절벽 구석에 물어다 놓는지 알고 계신 눈치었지만 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개들이 조개껍데기를 물고 돌아다니길래. 궁금해서요. 할머니는 개를 키우셨으니까 아실지도 모를까해서

-원래 내 개가 아니여. 주인없는 개들인디 가엾어서 대리고 왔다

할머니는 다시 홈쇼핑을 보고 계셨다. 잠깐 동안 남편과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집 없는 개들을 대려오신거예요? 마당에서 키운지 얼마나 됬는데요?

-한 넉달 됬나. 그땐 여름이었으니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언가 떠올리는듯 했다. 속눈썹이 약간 흔들리고는 눈을 몇번 깜박이시더니 다시 TV에 집중하려 하셨는데 그때 광고방송으로 넘어가 잠깐 나를 쳐다보고 문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셨다.

-참 더운날이었는디. 바람한점 없었어. 이 바다에 사람이 많을때라고는 피서철 밖에 없으니께. 그렇게 더운데도 시골사는 사람이니 사람구경하러 많이들 돌아다닌다. 해변에서 윗듬 김씨네 평상에 앉아 같이 사람구경 하고 있었는디
도로에서 큰 소리가 나는거여. 먼소린가 하고 쳐다봤는데 차에서 서울양반이 내리더니 욕지껄이를 하길래 가봤지.

할머니는 서울양반이 욕짓껄이를 했다는 말을 하실때에는 노기가 여려있었다.

-가봤더니 글쎄. 서울양반이 개들을 발로 차고 욕을 하는거여. 살다 살다 그렇게 못된 놈은 첨봤지. 사람들은 구경만하고 해서 내가 말릴려는디 강아지 한마리가 차에 치었는지 어쨋는지 피 흘리고 일어나지도 못하는거여. 벌써 죽어있었어 강아지는. 한 일년전부턴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두마리가 그렇게 바다를 돌아다녔는데 이번 봄 쯤에는 한마리가 더 늘어 세마리가 돌아다니더라고 사람도 잘따르고 해서 마을사람들 모두 그 개들을 좋아했었는디. ...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날을 떠올리는듯 내 뒤에 있는 장을 보셨다.

-그랬는디 사람들이 보고만 있걸래 내가 가서 그 서울양반을 야단냈다. 서울양반은 그때야 지가 뭘 잘못하고 뭘 잘했는지 알겠는 눈치드만 지가 잘한건 하나도 없으니께. 내 눈만 씩씩대믄서 흘기더라고. 그랬는디 그때 엊그제 그 소시랑 빌려갔던 놈있잖어 그놈 와선 서울놈 멱살을 잡고는 흔들어댔지. 김씨가 와서 강아지 죽은걸 천으로 싸서 한쪽으로 치웠더니 개들 두마리가 가서는 피를 햝고 털을 햝는디 그걸 보고 있으니께 가슴이 무너지드라. 서울놈 패려는걸 말리고 원식이한테 강아지를 안고 따라오라고 했다.

'남자의 이름이 원식이구나' 생각하며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계속 들었다. 할머니는 눈물이 나오려시는지 소매로 눈가를 한두번 훔치셨다.

-이 새끼를 묻어주고 싶은디 맨 바다밖에 없어. 니 갔었다던 산을 오르다 중턱에 새끼를 묻으려니까 개 두 마리가 짖는게 아녀.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디 어미개 한마리가 위로 올라가서 따라 올라갔는디. 얼마나 올랐나. 힘든줄도 모르고 가다보니께 다 올랐지. 봄이면 나물캐러 가기도 했으니께. 근디 어미개가 절벽있는디 서서 소리없이 있는거여.
원식이 놈이 땅을 파서 묻어줄때까지도 소리없이 있다가. 다 묻으니께 우는건지 개 두마리가 꼭 붙댕겨선 낑낑대는거여. 새끼가 죽었는디 아무렴 개들이라고 슬프지 않겄냐. 그걸 보고 있는디 맘이 아파 가자고 할매 집으로 가자고 하니께 철썩같이 알아듣고는 따라왔지. 개집은 원식이가 맹글어주고.

내가 다 울때까지 가만히 있던 어미개. 날 이해했던 것일까. 사람과 동물을 떠나 엄마와 엄마의 마음이 닿았던 탓일까. 나도 어미개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새끼가 살아있을때 조개껍데기 물고다니는걸 봤지. 새끼가 좋아하는걸 기억하고 하나 하나 물어다 놓는건 알었는디 그래 얼마나 많던?

할머니의 마지막 말에 장에 머리를 기대 울었다. 할머니는 우는 내 옆에서 가만히 앉아 내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개들은 새끼와 함께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몸에 배고 있던 추억밖에 없었다. 내 아이가 자라면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고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인형옷을 입히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밥을 먹이는 상상을 해보다. 그리고 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어떤 기분일지 내 젖을 먹는 아이를 보고 내 젖을 먹고 잠에 드는 아이를 떠올려 보았다. 한번만이라도 내 아이에게 젖을 물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새벽에 왔던 사내가 들고 있던 젖병이 생각났다. 내 아기가 죽어 쓸모 없어진 이 젖을 사내의 아이가 먹어준다면 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줄어들 것 같았다. 내 아이는 죽었지만 사내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마치 사내와 내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진듯 했다. 내가 바다로 이끌려진 까닭이 이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