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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5 09:57

<크리스마스> -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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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 다른 이야기





  “크리스마스이브가 마지막 날인 사람은 기분이 어떨까?”


  그녀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잔뜩 껴서 달이 보이질 않는다. 구름의 틈을 찾아 눈동자를 굴려본다. 하지만 소용없다. 달은커녕 별조차 보이질 않았다. 틈이 없었다.


  나는 대답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어 하겠지.”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온 입김은 곧 바스러진다. 마지막 남은 가을의 낙엽이 발길질에 부서지고 산산 조각나 비로소 겨울임을 인정하듯이 무참하게. 목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없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빨강, 노랑, 하얀색 불빛들이 번쩍거렸다. 사람들은 빛과 빛 사이를 가득 메웠다. 빛과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 차버린 셈이다. 마치 이 모두가 텔레비전 화면 같다. 12초 간격으로 사람에게 자극을 주는 기계 덩어리는 무차별적인 자극으로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갖고 있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오늘 아침에 나왔던 기상청 예보를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눈이 올 것이라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의 희망. 평소에는 그다지도 믿지 않던 기상청 예보도 이럴 때만큼은 맞을 것이라 기대했다. 아직 눈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고개를 쳐들긴 마찬가지였다. 나와 그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본 밤하늘은 그저 어두울 따름이다.


  “눈 왔으면 좋겠어.”


  “글쎄…….”


  그녀는 희망했다. 나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 희망을 던져 저 하늘에 부딪힌다면 눈이 쏟아져 내릴 정도로 하늘은 눈구름을 머금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래, 나는 눈이 내린다면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묻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뒤돌아서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삼보정도 떨어져 있었다. 내가 다가서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때, 아무렇지도 않아?”


  현란한 빛과 수많은 사람들에 취한 탓일까.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가서려던 걸음도 얼음과 같이 얼어버렸다. 간신히, 간신히 입을 열어 입김을 불어낸다. 하아. 목소리가 담겨져 있지 않다. 숨은 바스러진다. 대신에 그녀의 숨이 눈앞에 번져온다.


  “나는 너랑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어.”


  나는 오늘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이걸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예수가 태어난 날,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하나의 기념일. 특별해서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직접 이야기하려 오늘을 기다렸다. 문자나 전화로 통보하는 다른 이들보다는 좋은 남자이고 싶어서. 내 커플링도 그녀에게 주기 위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가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 마지막 날이지, 우리.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렇지만 말하지 마. 헤어지자는 말, 이제는 그만 만나자는 말, 여기까지가 적당하다는 말 모두 하지 마. 순식간에 감정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거, 옆에서 보면 다 알아. 고작 며칠, 길어야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변해버린 감정이라는 거, 보면 다 알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쌓여서 결정한 것처럼 느끼겠지만, 아니야. 최근에 힘들다보니 결정을 내리게 된 거잖아. 그렇지 않아?”


  그녀의 숨에 틈이 보인다. 나는 분명히 텔레비전 화면과 현란한 빛에 감각을 잃은 불쌍한 현대인일 것이다. 그녀도 그렇기를 바란다. 더 늦기 전에 틈을, 찌른다.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의 손을 펼쳐 커플링을 쥐어준다. 그녀는 커플링을 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오므려준다. 그리고 등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서둘러, 서둘러 걸어들어 갔다. 이제 그녀의 숨은 나에게 닿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