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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08.12.09 23:08

<칼>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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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쪽.

  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오후 9시 47분.


  불을 켜지 않은 자취방 안에는 바깥과 다를 것 없는 캄캄한 밤이 그득히 차있었다. 다만 이 안에는 단 하나의 별도 보이질 않는다.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옷도 벗지 않은 채였다. 양복이라 뒤척일 때마다 관절을 죄어와 갑갑했다.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새로 온 문자메시지 한 통. 어머니였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면접은 잘 본건지 묻는 문자다. 화면이 눈부셔 휴대폰을 덮어버린다.


  나는 오른손으로 심장 위를 더듬어본다. 부드러운 자켓의 느낌 안에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이 안에는 칼이 있다. 안주머니에 비스듬히 들어있었다. 칼은 전체 길이가 약 16센티미터뿐이 되지 않는 폴딩 나이프다. 칼날은 접이식으로 손잡이 안에 감춰져있는 것을 엄지로 꾹 눌러 반대편으로 밀어내면 새하얗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자태를 드러낸다. 칼날의 길이는 대충 7센티미터 정도다. 오늘 아침에 집 앞에서 주운 것인데도 날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나는 품에서 칼을 꺼내 칼날을 세웠다. 손잡이는 양손으로 감싸 쥐고 천장을 향해 칼을 쳐들었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잡았다. 칼끝은 정확히 내 심장을 겨냥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얀 방에 나는 누워있다.




  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오후 1시 20분.


  규칙적인 신호에 맞춰 차들이 멈췄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사거리에 굉음이 울린다. 다른 몇몇 운전자들은 놀라 경적을 울려댔고 지나가던 할아버지는 욕설을 내뱉었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스포츠카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간 것이다. 은빛 차체에 크롬 도금이 된 바퀴는 몇 분 뒤 특유의 굉음과 함께 한 번 더 사거리를 휩쓸었다. 다시 보니 차종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벤츠 SLK, 약 1억 원의 외제차였다.


  사거리의 한 귀퉁이에서 나는 한 시간째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편의점 앞 탁자를 내 것처럼 쓰고 있었다. 세 번째로 그 차가 굉음을 내며 눈앞을 지나갈 때, 난 눈으로 차의 뒤꽁무니를 좇았다. 그리고 차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을 때, 입모양만으로 효과음을 집어넣어본다. 끼이이이익 쾅.


  탁자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친구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런데…… 그건, 그러니까 피해망상이잖아?”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정오의 햇살이 친구의 안경을 번쩍이게 만들었다.


  “피해망상이라니?”


  나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친구에게 되물었다. 들고 있던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뜨거운 커피가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중얼거리며 친구가 내게 들려준 800원짜리 편의점 커피다. 친구도 커피를 쏟을 듯 큰 목소리로 말한다.


  “니가 말한 걸 들어보면 그렇잖아. 면접관이라고 놀고먹어? 그리고 다른 면접자들은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잘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친구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옳은 말. 열심히 했다면 어떤 난관이든 해쳐나갈 수 있을 것이란 말. 딱 해쳐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난관이 주어졌을 것이란, 희망적인 이야기다. 만약 난관을 헤쳐 나가지 못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면접관들은 분명히 날 비웃었다. 내 정보가 담긴 서류를 넘겨보면서 실소를 머금고 있었단 말이다.


  친구가 대뜸 묻는다.


  “또 주먹질이라도 해서 남한테 화풀이라도 할래?”


  나는 어이없다는 듯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도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뜨거웠던 커피는 이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식었다. 입술에 컵을 가져다대고 한 모금 마셨다. 찬바람에 아리던 몸이 녹으며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의자지만 나는 몸을 묻었다. 가볍게 나오는 탄식에 하얀 입김이 묻어 나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마. 일단 오늘은 좀 쉬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나는 친구의 말을 끊었다.


  “좀 쉬고 준비를 더 해봐야겠지.”


  이번에는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커피만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 앉아 올려다보자 친구는 뒤통수를 긁으며 미안해했다. 친구는 머쓱하게 웃었고, 회사에 둘러대고 나오긴 했지만 금방 들어가 봐야한다고 변명했다. 그렇지. 첫 직장인데 밉보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친구는 경보하듯 길을 건너, 높은 건물들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커피는 이미 다 마셨다. 하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 손에 들린 컵이 가벼워지자 허무하게 느껴졌다. 상표가 있는 뚜껑을 뜯어내고 밑바닥에 얼룩처럼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비싼 값의 커피를 얻어마셨다면 이것보단 맛있다고 느꼈을까? 친구가 나를 내려다보며 지은 머쓱한 웃음이 생각난다.


  해는 여전히 저 하늘에 떠있다.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그리고 하늘을 베며 날아가는 한 대의 비행기. 비행기의 꽁무니를 따라 그려지는 비행기구름은 정말 새하얀 상처처럼 보였다. 날카로운 것에 베여 스산하게 벌어지는 상처. 그곳에서 차디찬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떤다. 아침에도 이렇게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