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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앙! 그르르륵

쏴아아아.


번개가 번쩍임과 함께 노송이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노하기라도 한듯,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끝없이 펼쳐진 숲사이로 작게 난 오솔길을, 후드를 쓴 두 인영이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한명은 나이가 든 성인여인이었고, 다른 한명은 이제 열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여아였다.


"하악, 하악."

"달려라 아가. 돌아보면 안된단다."


엄마로 보이는 여인의 우려와는 달리 아이는 뒤돌아 볼 여유도 없어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고, 얼굴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팔을 부르르 떨며 한 단어를 되뇌이고 있었다.


"아빠가... 아빠가...!"

"다른 거 생각 하지 마! 뛰는 거만 생각해!"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딸아이를 두 손으로 꼬옥 껴안고 내달렸다. 하지만 그녀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호흡이 아까보다 더 거칠어졌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며 숨을 고르쉬던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가 들렸다. 두 눈에는 쌍심지가 켜졌지만, 팔은 벌벌 떨고 있었다.


끼이익-


아이를 데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후드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급하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초조하게 여기저기를 뒤지던 그녀는 마침 찾았다는 듯 사각형으로 생긴 나무상자의 뚜껑을 위로 열어젖혔다.

그것은 바로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뒤주였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텅 비어 있었다.

아이를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 내지 마."


뒤주 속에 아이를 꾹 집어넣은 여인이 입술에 검지를 대며 한 마디 한뒤, 뚜껑을 닫았다. 어둠 속에 갇힌 아이는 오들오들 떨다가, 금세 뒤주 안에 난 구멍에 얼굴을 바짝 붙이며 바깥 세상을 들여보았다.

기골이 장대한 성인남자 두명이 칼을 쥔 채 여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큭. 뛰어봤자 벼룩이지."

"꼬맹이는 어딨지 여자?"

"아이는 죽었다! 나만 데려가면 될 거 아니냐?"


날카롭게 소리치며 바닥에 나뭇가지를 주워들며 겨누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은 본인도 알고, 상대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놈들은 당연히 뒤주를 뒤지다 아이를 발견할 게 뻔했으니까. 여인은 왼손으로 후드를 벗었다. 두 남성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우우웅

"오호라."

"대단하구만. 남자놈 꺼는 쥐좆만하더만."

"내 남편을 모욕하지 마라!"


놀랍게도 여인의 이마에는 한쌍의 더듬이가 나 있었다. 작은 단검만한 길이에 끝은 뭉툭했는데,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남자들을 위협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후드 까고 보니 은근히 반반한걸? 새하얀 게 홀딱 벗겨도 볼만하겠구만 그래, 킬킬킬."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케란. 지금은 저년이랑 딸년의 더듬이를 잘라가는 게 우선이야. 우린 지금 밀렵꾼이란걸 잊지 말라구."

"쳇, 알겠어 알겠다고... 자 그럼!"


옆의 남자의 핀잔에 손을 까닥거리며 입맛을 다시던 케란이란 남자가 갑작스럽게 여인에게 덤벼들었다. 여인은 더듬이를 번쩍이며 남자에게 맞섰지만 힘없는 아낙네가 덩치 큰 장정을 이길 길은 없었다.


"빨리 꼬마애가 어딨는 지 말해!"

금세 바닥에 누운 여인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왼손에 목을 쥐고 오른손으론 칼을 들이댄 채 소리쳤다. 머금은 눈물 안에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여인은 이내 이마에 달린 더듬이의 끝을 하나로 모았다.

스파크가 튀었다.


치아아악.


"으헉. 이, 이건 대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갑자기 무언가에 눌린 듯 여인의 몸 뒤로 풀썩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뒤에 서 있던 남자도 몸을 휘청거렸다.


"모, 몸이 무거워져?!"

"이 망할 년이 재주를 부렸군."


어느새 남자가 쥔 검을 뺏어든 여인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어서 썩 꺼져라!"

"큭, 하하하. 이봐, 미안한데 우리도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거라고."


두 남자가 이내 몸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아까의 압력이 존재하고 있는지 여유로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뒤의 남자한테 검 한자루를 받은 케란이라는 남자는 숨을 가다듬은 채 양손으로 검은 거머쥐었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푸욱.


순식간의 일이었다. 여인이 쥔 검은 힘없이 튕겨졌고, 가슴을 뚫고 등뒤로 삐죽 솟아나왔다.


'어, 엄마...'


아이는 두 눈을 부릅 뜬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뒤주를 박차고 달려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당부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 남자들이 무서워였을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딸꾹질이 났다.


'끕.'


다행히 입안에서 맴돈 딸꾹질. 아이는 두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두 눈은 구멍을 통해 바깥의 모습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젠장, 죽었는데도 저주가 계속되다니?"

"듣기론 저주가 아니라 일종의 마법이라고 하더군. 일정시간이 있다나봐."

"딸년이 분명히 이 근처에 숨어 있을텐데...!"


여인을 죽인 장본인, 케란이란 사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변들 둘러보았다. 뒤주 안 구멍속에서 지켜보단 아이는 순간 그의 눈과 자신의 눈이 서로 마주친 듯한 착각을 받았다.


"히끅."


갑작스레 나온 딸꾹질에 놀란 아이가 다시 두손을 입으로 막았다. 케란이라 불린 남자의 시선이 정확히 아이가 숨어있는 뒤주를 향했다. 동공이 급격히 커져갔다.


콰콰쾅!


하지만 하늘의 보살핌이었을까? 마침 떨어진 번개소리에 고개를 다시 뒤로 돌렸다. 저주에 걸려 헛것을 들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케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두막 안의 뒤주들을 바라보는데 거동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또 다른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포기하자."

"뭐라고?"

"언제 아르고니아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딸년 찾다가 사이좋게 성벽에 모가지 걸릴래?"

"크윽..."

"저 년 더듬이만 잘라서 가져가자. 그러면 5년은 놀고 먹을 돈을 받을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고민은 길었지만 실행은 찰나였다. 금세 단검을 꺼내어 여인의 더듬이를 잘라, 작은 자루안에 집어넣은 두 남자는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오두막을 떠났다.


끼이익.


두 남자들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는 뒤주의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여인의 시신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여인의 더듬이는 참혹하게 잘려 있었고, 눈의 초점은 사라져 있었다.


"히끅... 엄마..."


아이는 후드를 벗으며 여인의 시신을 안았다. 항상 봄처럼 따뜻하기만 했던 어미의 품이 오늘따라 한겨울의 냉기처럼 차디찼다.

아이의 더듬이는 손가락만했다. 조금씩 움직이는 더듬이를 잘린 어미의 더듬이에 갖다대었다. 살아있을 적엔 이렇게 더듬이를 마주대면 엄마의 감정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끝없이 어둠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히끅.


주위는 깜깜했고, 적막만이 흘렀다. 아이의 초점이 흐려졌다. 

뒤주 안은 답답하고 어두웠다.

오두막 안도 답답하고 어두웠다.

엄마와 아빠가 없는 이 세상도 답답하고 어둡다.

아이는 여인의 시신 위에 누운 채, 그렇게 한참동안 시간을 지세웠다.



***



오두막을 빠져나온 아이는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신발이 다 헤져 맨발로 걷고 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얼굴은 헬쑥해져 있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신기할 정도였다.


다그닥 다그닥.


얼마나 걸었을까? 일단의 기마가 아이에게 다가왔다. 주변을 맴돌던 스무여기의 기마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었고, 한 인영이 말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왔다. 아이는 초점이 없는 눈빛으로 인영을 바라보았다.

아르고니아에 매번 내리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뒤로 동겨멘 채 묵직한 갑옷을 입은 20대초반의 미남자였다. 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아이를 안았다. 


"아아, 드디어 찾았구나. 이제서야 너를 찾은 나를 용서하거라."

"누...구..."


언어조차 잊어버린 듯, 말투가 어눌하기 그지없었다. 초점이라곤 온데간데 없는 아이의 눈빛에서 그간의 참상을 느낀 그가 말했다.


"이 나라의 왕자이니라. 민달팽이 일족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너희 가족의 변고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나마 너를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름이 무엇이냐?"


왕자의 물음에 아이는 머리속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 안은 눈처럼 새하얀 도화지일 뿐이었다.


"이름... 기억나지 않아..."

"....그렇구나."


왕자는 아이를 자신의 말에 태운 채, 기마대와 함께 궁궐로 돌아왔다. 그리곤 바로 의사를 불렀다.


"이 아이는... 자폐증이로군요."

"자폐증이 무엇인가?"


외상에는 조예가 있었지만, 정신적인 방면에는 지식이 없었던 왕자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참 턱을 매만지던 의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내다가, 집 밖을 나가 사람과 일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며 교류합니다. 그러면서 성장하지요. 왕자님도 침소에 계시다 어전회의에서 대신들과 전하를 뵈며 대소사를 듣고, 궐밖을 나가 민생을 살피시지요? 

"그렇지."

"사람은 그렇게 경험하며 차츰차츰 성장합니다. 밖의 풍경을 보고 사람의 언어를 먹으면서 말이지요."


말을 마치며 의사는 두 손가락으로 작은 사각형을 만들었다.


"이 아이는 외부의 그 모든 풍경을 보는 눈이 막혀 있고, 언어을 먹을 입이 닫혀 있습니다. 뭐랄까, 깜깜한 뒤주 속에 자신이 갇혀 있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된단 말이오?"


왕자의 목소리가 조금 초조해졌다.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도 해결책은 모릅니다. 워낙 희귀한 경우이기도 하고, 고위집안 자제가 걸린 경우가 드무니까요."

"그렇군."


의사의 말에 왕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 가만히 있으면 얼어죽고, 굶어죽는 곳이다. 이곳 아르고니아는. 곰곰이 생각하던 왕자가 의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그대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이 아이의 뒤주를 부술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

"이 아이가 그토록 중요한 아이입..."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으려던 의사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왕자가 아이가 쓰고 있던 후드를 살짝 들췄기 때문이다. 왕자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대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시오. 그대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날카로우면서도 나지막한 한 마디에 의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명심하겠습니다."


****


아이를 발견한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의사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아이는 예전보다 좋아졌다. 글도 잘 쓸줄 알고, 호신술도 수준급으로 터득했다. 고문서를 뒤지던 왕자의 노력으로 더듬이의 사용법도 점차 터득하고 있었다.

영양 가득한 왕궁의 식사로 젓가락 같았던 몸도 나이와 함께 먹으며 아이는 어느새 소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지 처음 만났을 때보단 좋아졌을 뿐이구나."


왕자가 소녀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훈련은 받고 있었지만 정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뒤주를 깨진 못한 것이다. 


"아이야, 아직도 네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네, 저하."


또박또박하지만 감정이 한올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한숨을 쉬던 왕자의 시선이 의사를 향했다. 의사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미력한 소신으로선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 싶사옵니다."

"아니오, 그대는 최선을 다했소. 아무래도 이 상태로 머지않아 창설될 내 직속 특임대에 데려가야겠소."


숨쉬고 생동감 있게 걸어다니는 인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왕자는 손에 턱을 괸 채, 더듬이를 교접하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날 밤이었다. 잠자리에 든 소녀는 습관적으로 더듬이를  맞닿으며 새근새근 잠에 빠지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왕자가 한시간도 빠짐없이 더듬이를 써야된다고 당부해서 시작한 이 훈련.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지직. 지지직.


더듬이가 부딪히면서 작은 마찰음을 자잘하게 내고 있었다. 수마에 빠지기 전이었음에도 어제의 소리와 다르다는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소녀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더듬이를 잠시 바라보았지만, 금세 잠에 빠졌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꼬마야, 그 핫바 이제 나 주지 않을래? 숙녀는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대면 안된단다~.'


머리에 보라색스카프를 두른 거구의 남자가 장난스럽게 여성이 들고 있던 핫바를 낚아챘다. 여성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까불지 마, 보라돌이. 먹는 순간 혼날 꺼야?'

'까불지 마 보라돌이~ 먹는 순간 혼날 꺼야앙~'


다 큰 여성답지 않은 아이같은 말투에 남자가 장난스럽게 따라하며 핫바를 한입 베어물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동공이 커졌다. 바로 이마에 자신과 똑같은 더듬이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찰싹 찰싹!

'아야야... 그만해 아프다고!'


여성은 양더듬이로 보라색 스카프 남성의 뺨을 수차례 후려갈기고 나서야 남은 핫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지켜보던 한 남성이 손짓했다.


'너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대장이 우리 찾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자.'


짧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20대초반의 남자.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다부진 몸집의 그는 등에 큰 방패를 메고 있었다. 소녀는 여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성은 언제 그랬냐는듯, 방긋 웃으며 그 남자를 따랐다.


'알았어 펜! 대장 보러 가자.' 

'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처음 듣는 호칭인데, 아련함과 그리움이 몰려왔다. 혼란스러웠다. 문득 소녀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꿈이란 사실을 차츰 자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꿈은 자각하는 순간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소녀의 시야에 보라빛스카프의 남자, 더듬이를 가진 여성, 갈색 머리칼의 남자 이 셋의 형상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안간힘을 쓰며 세 인영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갈색 머리칼의 남성은 자신에게 환하게 웃으며 파고드는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천히 와 쵸이, 그러다 또 넘어질라.'

'쵸....이...?'


소녀는 눈을 부릅떴다. 오래되었지만 멋들어진 샹들리에가 보였다.

침소였다. 꿈에서 깬 것이다. 튕겨지듯 상체를 일으킨 소녀가 침상에서 뛰쳐나왔다. 급히 펜을 들고 양피지 조각에 무언가를 적었다.


'C.H.Y.O.I'

"쵸이, 쵸이, 쵸이.... 내 이름."


짧게 되뇌이던 소녀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마음 속의 뒤주에 금이 간듯 기억의 조각이 빨려들어왔다.


'우리 쵸이는 누구한테 시집갈 거야?'

'당연히 아빠한테 가야지~.'

'하하하, 아빠는 벌써 엄마가 있어요.'

'피잇, 그럼 어떻게 시집가요. 더듬이는 우리밖에 없다면서.'


칭얼대는 아이가 있었고 그런 아이를 꼭 안아주는 더듬이의 남자가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 쵸이가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엄~청~ 많이 생길거야. 사랑하는 사람도 생길 거구.'

'진짜아~? 난 지금 친구가 아무도 없는데?'

'지금이야 없지, 하지만 우리 쵸이가 착한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면, 분명 좋은 친구들을 만날 거야. 저번에 말했지?'

'더듬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 맞아. 네 그 더듬이 조차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날 거야.'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이었다. 하지만 소녀, 쵸이는 음미하듯 그 짧은 대화를 눈을 감은 채 듣고, 보고, 느꼈다. 


"더듬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쵸이는 그길로 곧장 왕자의 침소로 뛰어갔다. 바로 지척이었기 때문에 곧 그녀는 웃통을 벗은 채 면도를 하고 있는 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엑? 너 가, 갑자기 왜...아야야."


감정없던 인형같던 소녀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벌이자 당황하다못해 면도칼로 턱까지 그어버린 왕자였다. 하지만 왕자는 뒤이어진 한 마디에 턱끝의 고통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쵸...이! 쵸이. 내 이름이야. 내 이름은 쵸이야."

"이, 이름이라고?!"


어리둥절해하던 왕자의 표정이 미소로 번져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단지 이름때문만은 아니었다.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


"키에에엑!"

"조심해라. 패잔병이라곤 하지만 몬스터다. 눈먼 칼에 뒈지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


쵸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자를 비롯한 전사들이 방진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수십마리의 고블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왕자는 원진의 정중앙에 있는 쵸이에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쵸이.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들이니깐."

"네. 왕자님."


어느덧 쵸이도 열여덞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키는 160에 달했고 몸의 굴곡도 여인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뒤집어쓰고 있는 체인메일이 그 부분을 상당히 가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조심해, 덤벼든다!"


왕자의 외침과 함께 고블린들이 덤벼들었다. 방패를 들고 원진을 이루고 있던 왕자와 전사들은 금세 전투에 돌입하였다.

투구에 난 구멍에서 삐져나온 쵸이의 더듬이가 교접을 하며 빛을 내뿜었다.


"흐아압!"


한 전사의 검이 빛의 속도로 고블린에게 쇄도했다. 조잡한 방패를 부수더니 금세 목을 날려버렸다. 또 다른 전사는 방패를 휘둘렀는데, 맞은 고블린의 몸체가 5m나 멀리 날아가버렸다. 박치기 한방에 두개골이 으깨져 쓰러지는 놈도 있었다.


"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자가 혀를 찼다. 쵸이와 함께 하는 첫 실전이었다. 이정도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정말 압도적인 능력이었다. 


10여분이 흘렀을까?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두배나 많은 고블린이었지만 반수 이상이 절명했고, 일부는 도망갔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정리가 끝남과 동시에 전사들은 쵸이를 향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그 대단하다는 신성왕국의 성직자는 명함도 못 내밀겠구만."

"아가씨가 바로 아르고니아의 미래구먼유, 암요."

"정말 대단하구나."


왕자는 쵸이를 돌본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로지 나는 거라곤 광물과 인재뿐인 이 나라에 그녀는 미래를 이끌어갈 최고의 인재였다. 쵸이가 입버릇처럼 한 마디했다.


"더듬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 그래."


여전히 감정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지만 왕자는 그러려니 하면서 웃어넘겼다. 그리곤 그녀의 체인메일 밖에 입은 겉옷의 뒷면에 적힌 글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왕자 자신의 악취미였다.


'NO10. CHY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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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갑자기 삘 받아서 적다보니 엄청 많이 썼네요^^;;;

예전부터 구상이 떠올라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이번에 쓰게 됬네요.

당연히 블가랑 연관 있구...사실상 중반부에 등장하는 캐릭터라 언제 본편에 등장할지는 알수 없을 듯 하네요 ㅜㅜ

본편연재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데...최대한 앞당겨보겠습니다 ㅎㅎ


쵸이의 포지션은 보시다시피 서포터이고,, 만약 구상하던 줄거리라인까지 진행시킬 수 있다면,

최강의 서포터 컨셉으로 가려구 합니다.

그래서 백넘버가 10번입니다^^; 플레이메이커 서포터라고 할까요.

아직 김칫국 단계라 이렇게 단편적인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네요.

  • SKEN 2019.07.28 16:33
    이름도 특징도 종족도 신선한것이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네요!
    본편에서도 만나볼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나저나 휴먼님은 3인칭도 정말 잘쓰시네요 너무나 부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