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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은 내 원룸에서 멀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기에 걷는 길이 익숙했다. 그가 살던 아파트의 비밀번호는 예전 그대로였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겨우 몇 개월 사람이 살지 않았을 뿐인데 공기가 몹시 탁했다. 식탁 위를 손으로 쓸어보자 뽀얗게 먼지가 묻어났다. 가구는 대부분 처분했는지 집안이 실제 평수보다 더 넓어보였다.

서재에는 그가 늘 들고 다니던 노트북과 책 한권이 놓여있었다. 가장 최근에 쓴 사계였다. 출간하자마자 읽어보았기에 내용은 얼추 기억하고 있었으나 표지를 넘겼다. 그의 글은 언제나 큰 굴곡 없이 잔잔히 이어졌다. 말이 없고 무뚝뚝하지만, 능력 있고 사려 깊은 아버지와 모든 것을 포용하며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 방황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는 자식들.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이 주인공이었다. 딸의 철없는 투정과, 아들의 거친 반항으로 가정의 평화에 금이 가지만, 이해와 사랑으로 그것을 메워갔다. 이런저런 일화를 거쳐 가정은 평화를 되찾는, 어디선가 한번 쯤 읽어보았을 법한 성장소설이었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나는 웃었다. 이런 것을 꿈꾸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모습은, 이 글에 아버지가 아니라 그 자식들에 가까웠다. 세상을 향한 투정과 반항 때문에 엄마와 나를 놓아버린 그가 한심하면서도 애처로웠다.

그가 품고 있던 환상.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자아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맥없이 책을 덮었다. 계기는 병실에서 엄마를 본 것이 아닐까.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채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달콤한 문학 속에서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괴리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눈앞에 현실을 들이민 것에 대한 죄의식인지. 환상 속에서 헤엄치느라 엄마를 외로이 내버려둔 그에 대한 원망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서재에 있던 그것들과 몇 권의 서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다 집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끝을 마무리한 장소였다. 아파트 관리인들이 경각심을 가진 모양인지 자물쇠가 걸려 있었으나 잠겨있지는 않았다. 문에는 녹이 슬어있었다. 몸을 기대어 힘을 주자 경첩이 소름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옥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은 초록색 페인트로 빈틈없이 칠해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치워둔 눈이 녹다 어는 것을 반복해 덩어리져 있었다. 건너편에도 아파트가 있어 전망은 좋지 않았다. 그저 삭막한 도시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옥상이었다. 문득 그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보고 싶어졌다.

난간이 낮고 폭이 넓어 올라서기 편했다. 군데군데 남은 눈들이 얼어 미끄러웠다. 조심스레 끄트머리로 발걸음을 옮기자 상가 앞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분리수거장에는 관리인이 무언가 부지런히 분류하고 있었다. 호프집 파트타이머가 메뉴 배너를 힘겹게 옮기고, 편의점 주인이 가게 앞을 쓸어내었다. 가방을 맨 학생들이 줄지어 하교하며 재잘거리는 것을 마냥 내려다보았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조금 떨리기 시작해 난간에서 내려와 담배를 꺼냈다. 아마 그도 나처럼 담배를 입에 물고 이곳에 있었을 터였다. 견딜 수 없어 올라온 옥상 위에서 마지막으로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불을 붙였겠지. 머릿속으로 그가 이곳에 서서 난간을 노려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다 이내 그만 두었다. 어차피 이미 다 끝났으니까. 연기가 가득 들어왔다 날숨과 함께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폐처럼 마음이 공허했다.

이제 어떻게 할지, 아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도 않았다. 나를 울고 웃게 했던 이들이 사라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담배를 끄고 다시 난간으로 올라섰다.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이미 어둑해져 밑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찬바람이 옷 사이로 파고들어 오한이 드는 것인지, 겁이나 몸이 떨려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얼굴 위로 떨어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PORSCHE 2018.07.31 15:25
    픽션이라는 사실에 안도할 정도로 몰입감이 엄청났어. 감정선을 자극하는 것이 빠져들어 버렸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해!
  • 반딧불 2018.07.31 19:10
    그냥 한마디밖에 생각이 안나네
    지렸다
  • SKEN 2018.07.31 22:43
    1인칭의 상황 및 배경 묘사와 감정선 같은게 골고루 풍부하게 잘 어우러져서 어느하나 지나침 없이 너무 좋았다. 분위기에 몰입해서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가 남는 그런 느낌? 뭐라 적확하게 표현할 말이 생각나기보단 그냥 너무 좋았단 생각만 들게 만드는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