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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3.09.12 23:58

그 날 이후(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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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담담히 책을 바라보며 딸의 터져버린 울음을 달래주기 위해 읽기 시작한 시를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듬어 찾고
─그러면서도 애써 말을 피한다
─부어오른 이 강가에 모여서

언제나 담담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떨리고 있었다. 딸은 아내의 품안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멀리 동쪽의 지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잿빛 하늘. 끝임 없이 날리는 하얀 재. 언제나 빛나던 바다가 부서지고 사라진 자리에는 메말라 갈라진, 죽음이 집어삼킨 뻘이 길게 늘어져 지평선을 향해 나가 있었다. 딸의 훌쩍이는 울음소리만이, 아내가 잠시 침묵하자 찾아온 적막을 억지로 쫓아낸다.

나는 다시 힘겹게 고개를 아내에게 돌렸다. 아내는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시를 마저 읽어나간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딸의 훌쩍임이 사그라든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낡아 빠진 탁상 시계가 11시 43분을 향해 움직인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아내의 갈라진 입술이 힘겹게 떨어진다.

─쾅 소리가 아닌 훌쩍임과 함께

우리는 숨을 죽인다. 시계가 끝이 왔음을 알린다. 그녀가 쓴 웃음을 짓는다. 이제는 사라진 에스프레소의 쓴 맛이 혀 끝에 뜬금없이 느껴진다.

─그 날이 오면… T.S. 엘리엇

멀리, 동쪽 지평선에서 예정된 폭발이 일어난다. 일찍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었던 거대한 폭음. 온 세상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소리. 예정된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동쪽 지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하얀 빛이 온 세상을 덮는다.

 

0.


 언제나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열대우림과 끝임없이 들려오는 새소리. 흘러가는 강물과, 밀림의 거대한 나무의 뿌리 사이로 뿔뿔거리며 돌아다니는 짙은 초록의 세계. 아얀뜨레는 말없이 나무를 쓰다듬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을 어떻게 잊을까. 아얀뜨레는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풍경을 찬찬히 바라봤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제는 살아서 다시 보지 못할 고향.

 기억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고향. 아얀뜨레는 홀로 눈을 감은채 자신이 바라본 모습을 억지로 담아봤다. 아얀뜨레는 천천히 눈을 떴다. 거대한 열대나무도, 새의 지저귐도, 발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강물의 흐름도 모두 사라져있었다.

차디찬 바닥의 냉기가 아얀뜨레를 깨웠다. 바닥 한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을 꺼져있었다. 짙은 안개가 여전히 기분나쁘게 가득했다.

 아얀뜨레는 갑작스럽게 차오르려는 눈물을 훔쳤다. 잔혹한 현실이야. 아얀뜨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꿈 속의 고향은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작은 공터도, 기분좋은 웃음을 터뜨리던 정령들도 그대로 였다. 오직 아얀뜨레만이 잔혹한 현실에 내팽겨쳐 있었다.

아얀뜨레는 하늘을 바라보려 했다. 짙은 안개는 모든 것을 숨기고 있었다. 이 기묘한 섬은 거대한 안개가 집어삼킨 곳이었다. 안개 속을 돌아니다 보면, 아얀뜨레가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가득했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돌탑들. 안개를 뚫고 간간히 보이는 돌탑은 부서지고 무너져갔지만, 웅장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짙은 안개가 덮어버린 이 섬의 돌탑으로 이뤄진 도시는 거대한 미궁이나 다름 없었다. 여지껏 알지 못하는 미지로 가득한 물음표 덩어리들.

아얀뜨레는 터져나오는 기침을 내뱉었다. 차가운 습기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덕분에 추위가 느껴졌다. 아얀뜨레는 희미하게 속삭이는 정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렸다. 아가, 아직 내게 힘이 남아있단다. 도와줄까? 아얀뜨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희미하게 속삭이는 정령에게 부탁할 정도는 아니였다.

 지금 불침번을 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찾아오는 위험을 쫓아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아얀뜨레의 머리를 스치는 바람이 왠지 따스했다. 아얀뜨레는 눈꼽을 때고는 기지개를 크게 했다. 뻣뻣한 관절이 삐그덕 거린다.

아얀뜨레의 살갗은 검은 문신들로 가득했다. 기묘한 문신들. 갈색피부보다 문신으로 가득한 모습은 섬뜩하게 보일 지경이었지만 아얀뜨레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짙은 갈색 피부와 문신덕분에, 짙푸른─ 녹색의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였다. 녹색의 세계를 닮은 눈동자는 언제나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엉망인 갈색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아얀뜨레는 느슨해진 가죽갑옷을 동여매고는, 두꺼운 로브를 여미었다. 얇고 호리호리한 곡선의 몸매를 가린 문신의 여자. 아얀뜨레는 바람을 따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예쁘장한 얼굴을 잡아먹는 문신들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아얀뜨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종일 짐을 옮기느라 지쳐 잠든 노새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노새 옆에 놓아둔 짐더미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꺼내고는 꺼져버린 모닥불로 옮겨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얀뜨레는 금방 불을 피웠다. 불꽃은 쉽게 타올라, 금새 몸집을 키웠다. 아얀뜨레는 자기가 잠들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행은 잘도 잠자고 있었다. 아얀뜨레의 눈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왜그런지 더 이상 잠자고 싶지 않았다. 아얀뜨레는 말없이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쑤셔넣었다.

벌써 수색이 진행된지 일주일째였다. 엉망진창인 세계답게 뜬금없이 세상을 뒤엎는 지진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섬. 너무나 짙은 안개가 가득한 섬은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탑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또 어떤 세상이 부서지고 산산조각 나버려, 가라 앉은 것이지. 일행의 조언자 역활을 톡톡히 하는 찰레이의 아들은 단언했다. 그리고는 안개를 뚫고 솟아오른 탑을 보고는 조용히 자신에게 물었다. 저렇게 높디 높은 탑을 수백개나 쌓아올린 이들은 얼마나 대단한 이들이었을까. 모두 신음과 탄성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안개 속의 숨겨진 탑들 사이를 지나가다 보면, 몰락해버린 위대함이 가득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망가진 강철들. 시선을 빼앗는 것들. 아얀뜨레는 망가진 폐허속에서 한 때의 화려함을 상상해봤지만, 도통 상상해낼 수 없었다.

서서히 해가 떠오를 시간이 되어가지만, 안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숨막히 정도로 목을 죄어오는 안개. 아얀뜨레는 지난 일주일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은 아니였다. 안개는 악몽을 감추는 얄팍한 수였다. 아얀뜨레는 일행을 훓어봤다. 분명 섬에 도착했을 때는 40명이나 되는 집단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포함해서 3명밖에 남지 않았다. 안개속에서 흩어져버린 일행. 사라진 일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얀뜨레는 침묵했다.

모닥불의 불꽃을 살려낸 아얀뜨레는 오른손 검지를 쓰다듬었다. 유난히 희미해진 검은 문신. 엉키고 설킨 덩굴식물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아얀뜨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닥불 근처에서 지친 일행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얀뜨레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하랄우. 미안해요

아가, 괜찮아. 오히려 내가 미안해. 아얀뜨레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서서히 사라진다. 검지의 문신이 사라졌다.

─미안해요….

아얀뜨레의 목소리도 안개에 묻혀 사라져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찰레이의 아들로만 불리는 늙은 사내가 몸을 추슬리고는 잠에서 깨어난다. 세월을 따라 떠나버린 젊음이 남긴 흔적만이 가득한 늙은 사내의 얼굴에는 지혜로움과 죽음이 덩달아 내려앉아 있었다. 주름과 수두룩한 수염. 메마르고 깡마른 손으로 찰레이의 아들은 자신의 눈을 비빈다.

─정신 차리셨어요?

아얀뜨레가 질문을 던진다. 찰레아의 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지난 것 같나?

─아마 반나절은 지나간 것 같아요.

─결계는 더이상 유지를 못하겠구먼

아얀뜨레는 문신이 사라진 검지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끄덕인다. 찰레이의 아들은 혓바닥을 차면서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식한 야만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찰싹이는 소리에 야만인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안에서 꽉 쥐고 있던 투핸드소드를 휘젓으며 고함을 질러댄다.

─덤벼라! 덤벼!

─이보게, 적은 없어

찰레이의 아들은 무식한 야만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