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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7 04:20

'ㄱ' 투성이의 글

조회 수 19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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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엔 유난히 작가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취미작가였다. 그냥 취미로 직장이 끝나면 집에 와서 글을 쓰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 중엔 실력이 뛰어나서 잡지에 글을 보내기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이원용 씨의 글을 제일 좋아했다. 그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잡지 중 하나인 진개장의 편집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원용 아저씨는 우리 옆집에 살았는데, 내가 심부름 하고 남은 돈으로 아이스께끼를 하나 사 들고 오던 날에 그를 집 밖에서 만났다. 그는 얇은 면 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그 몰골이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최근 엄청난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담배와 커피가 섞인 듯 매우 불쾌한 구취를 풍기며 뭔가 열렬하게 설명했지만, 나는 코를 싸매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진개장의 편집장과 매우 친했고, 덕분에 매주 금요일엔 조판공 아저씨를 도와 활자상자에서 원고를 찍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 최근엔 거의 일의 반을 도맡아 하기도 할 정도로 나는 유숙했다. 그 당시엔 아직까지도 활자를 찍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판공일이 필요했다. 하여간 그때도 나는 어김없이 조판공 아저씨를 도와 활자를 찍어내다가 이원용 아저씨의 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없었다.


 


아니 영애야 왜 여길 영국의 왕궁인 듯 양 유유한 모양으로 걸어 온 거야. 엉아는 영애 너 가 여기에 온 것을 아시고 있니? 아마도 우리의 엉아는 영애 너 가 여기에 아무도 알 수 없게 온걸 알 수 없을 거야. 암, 알 수 없지. 어서 엉아와 엄마와 아우가 아직도 아주 어린아이 같은 영애 널 언제 오나 하며 어림은 커녕 예상도 못 하여 안심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애 너 가 오길 그냥 원하고만 있을 거야, 암. 아름다운 너의 엉아와 엄마와 아우가 애타게 원하는 영애 너는 어서 원래 왔던 곳으로, 너의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야만 될 거야.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같이 어리광 같은 행동은 안돼.


 


글쎄, 아주 잘 쓰여진 글은 아니었으나 뭔가 독특한 느낌의 글이었다. 글이 어찌됐건 나는 이걸 찍어내야 했다. 기세 좋게 이 담긴 상자에 손을 뻗었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시 한번 손을 상자 안에 넣어 보았으나 만져지는 것은 빈 상자의 밑바닥과, 거기에 쌓인 얇은 먼지들뿐이었다. 상자에 은 한 개도 없었다. 두려움에 빠져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조판공 아저씨에게 달려가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아저씨! 이 한 개도 없는데요!


뭐라고?


그러니까, 조판실에 이 한 개도 없어요.


, 상자 안에 한 개도 없단 말이야?


몰라요. 주간문학지 녀석 중 한 놈이 와서 몽땅 가져갔는지도 모르죠.


망할 놈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그래,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어서 가서 그 놈들이 가진 모음자들을 전부 뺏어와.


그거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요, 일단 글은 오늘밤 내로 찍어내야 하는데, 어쩌죠? 안 그랬다간…….


이원용 씨한테 혼쭐좀 나겠지.


 


조판공 아저씨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긴 글이냐?


별로 긴 글은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그럼 지금 빨리 가서 대신에 다른 자음을 집어넣자. 아무도 저런 녀석의 글 따위는 자세히 보지 않겠지.


예에.


 


내가 대답하며 조판상자로 돌아갔다.


가끔 이 인쇄소에서 모자라는 글자가 나오면, 그것 대신 을 넣었다. 모자라는 문자는 그리 많이 나오질 않았으므로, 독자들은 가끔 이 나오지 않을 자리에 이 나오면 그저 단순한 인쇄소의 작은 실수로 여기고 넘어갔다. 언제나 글자가 모자랐을 때 을 쓰도록 배워왔던 나는 대신에 외에 다른 자음을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글을 자세히 읽어보다 깜짝 놀라서 혼자 중얼거렸다.


 


을 집어넣는 수밖에. 근데 이건 참 이 많기도 한 글이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대신 을 넣어 인쇄를 마쳤고, 돌아온 월요일에 나온 이번 진개장의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가니 격개갸 괘 겨길 격국긔 곽국긴 듯 갹 규규한 모갹으로 걸거 곤 거갸. 걱가는 격개 너 가 겨기게 곤 것글 가시고 깄니? 가마도 구리긔 걱가는 격개 너 가 겨기게 가무도 갈 수 겂게 곤 걸 갈 수 겂글 거갸. 감, 감 수 겂지. 거서 걱가과 검마과 가구가 가직도 가주 거린가기 같근 격개 널 건제 고나 하며 거림근 커녁 계삭도 못 하겨 간심도 할 수 겂는 삭태게서 격개 너가 고길 그냥 권하고간 깄글 거갸, 감. 가름다군 너긔 걱가과 검마과 가구가 개타게 권하는 격개 너는 거서 권래 괐던 곳그로, 너긔 가늑한 집그로 돌가가갸만 될 거갸. 기제 더 기각 거린개같기 거리곽 같근 핵독근 간돼.


 


이 알 수 없는 글로 야기된 소동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요상한 글은 이교도에 전하는 암호문이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교도를 두려워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원용 씨의 집이 끈끈이인 양 파리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이원용 씨는 집에 없었다. 그는 사라졌고 동네의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는 그의 유령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합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자 대중들의 분노는 결국 가라앉았으며,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어떤 학자는 진개장의 편집장이었던 작가가 옳지 못한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을 풍자하기 위해 한글의 처음,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만으로 된 헛소리를 쓴 것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을 통해 풍자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자를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나의 실수에 의해 만들어진 이원용 씨의 글 본문을 해석해 대기만 급급했지, 글 아래에 작게 쓰인 이원용 씨의 이름이 기권굑이라고 나온 것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하였다.


 


 


 


 


 


 


 


이 글을 에드거 앨런 포 에게 바칩니다.

  • Pru·닛키 2007.04.27 20:34
    에드거 엘런 포우의 글에 이런 글도 있었어요? 몰랐네;;
  • Mr. J 2007.04.28 06:07
    'X 투성이의 글'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글은 제가 배경을 한국에 맞추어 패러디 한 거지요 ;ㅁ;
  • 도톨묵 2007.04.30 13:26
    코멘트가 늦었습니다. 하하, 이거 재밌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