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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로마 토탈워에 빠져있었을때 로마 내전기에 치룬 전투중 가장 인상에 남은 전투중 하나를 소재로 써내려가는 팬픽입니다.

그때 상황은 대충 기억나는데 인물들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그부분은 대충 껴맞췄습니다;;;

아무쪼록 잘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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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비움 회전

마리우스 군제 개혁 이후

식스투스 율리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율리우스 가문) vs 퀸투스 브루투스 (브루투스 가문)

BC224년 로마 제국은 고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가문. 율리우스 가문, 스키피오 가문 그리고 브루투스 가문은 제각기 갈리아, 시칠리와 북아프리카, 그리스를 포함한 동지중해 방면으로 그 세력을 뻗어나아갔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인 가문은 브루투스 가문으로 BC270년 로마가 처음으로 지중해 세계로 발돋음 했을 당시부터 수십년이 지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끝임없이 쉬지도 않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해 나아갔다.

트로이가 멸망하고 천년이 흐른 뒤 그들의 자손들이 다시 그리스 세계로 귀환한지 어언 50년.

브루투스 가문은 전 그리스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폰투스를 정복했으며 이집트를 멸망시켰으며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크리미아 반도를 개척하여 흑해 무역의 중심지로 삼는 한편, 지중해 해안의 해적들을 정리하여 평화롭고 항구적인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한때 브루투스 가문의 진출에 열광했던 원로원은 점차 좁아지는 자신들의 입지를 보고는 브루투스 가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계 주요자리르 차지한 그들은 원로원 뿐만 아니라 율리우스, 스키피오 나머지 두 가문에게도 위협적인 것이었으며 점차 어려운 임무를 부여하여 브루투스 가문의 위상을 끄러내릴려고 했다.

하지만 브루투스 가문은 이해하기 힘들 기세로 이 모든 위협과 음모에 연연하지 않으며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파괴하고 나아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곤 했다.

급기야 원로원은 브루투스 가문의 세력을 꺽는 한편으로 당시 가문의 당주였던 아물루스 브루투스에게 자살명령을 내린다.

당시 아물루스는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관련일려 안티옥에 있었는데, 해당지역의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이집트를 멸망시킨지 얼마 안되던 차였다.

마지막 그리스 도시를 멸망시키고, 폰투스를 아야톨리니아 북쪽으로 밀어냈으며 셀레우코스를 이집트로부터 구해낸 전쟁영웅인 아물루스는 원로원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원로원은 아물루스를 비롯한 브루투스 가문을 로마에서 제명시켰으며 브루투스 가문의 전 영지를 몰수하고 비무장 상태로 로마로 돌아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을 통보했다.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브루투스가문은 그러나 그러한 요청을 받아들일이 만무했다.

마침 북부 트라키아 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전 영지에서 징병이 개시되었으며 고대 지중해 세계의 모든 군대보다 더욱더 강대한 군세를 지니게 된 브루투스 가문은 곧바로 십수개 완편 군단을 편성 서쪽으로의 진군을 시작한다.

동맹이 깨지기전 이미 서지중해 곳곳에 동맹 로마 가문을 돕기 위해 파견나가 있던 브루투스 가문의 함대는 나머지 가문의 함선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쥐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가문의 군대는 전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전장터에서 이탈하여 로마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이집트 방면군은 북아프리카로, 동지중해 방면군은 일단 발칸반도로 집결한후 이탈리아 남부의 브루투스 영지를 거쳐 각지로 진군해나아갔으며 아야톨리니아와 크리미아 반도, 그리고 발칸 반도에 있던 군대는 거의 모든 경로를 통하여 서방의 로마 영토로 행군해 나아갔다.

퀸투스 부루투스는 가문의 당주 아물루스의 장자로 태어나 16세 성인이 되자마자 1개 군단을 이끌고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이집트의 전사들을 사막의 모래속에 몸을 뉘이게 했다.

그후 아야톨리니아로 와서 폰투스와 패권을 쥔 일대 회전에서 승리, 폰투스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가 가문이 원로원으로부터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건 트라키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아테네에서 보급 및 보충병을 받던 중이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코넬리우스와 티베리우스, 아물루스, 루시우스와 더불어 총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차 이탈리아 원정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북부에 상륙, 상륙지점의 교도부를 확보하여 후속부대의 안전한 상륙을 지원하여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차 이탈리아 원정군 중 반도 남부의 가문 본거지에서 출발한 3개 군단은 신속하게 카푸아를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진격 로마시를 포위한 다음 원로원 직속 군단을 전멸시켰다.

이어서 로마를 점령하는 대신 포위를 풀고 율리우스 가문의 영역으로 들어와 제국의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해온 율리우스 가문의 급조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오랜 전쟁 끝에 수많은 휘하 제장들을 잃어온 퀸투스의 군단이었지만 발칸반도에서 가장 신속하게 움직일수 있었던 퀸투스의 군단은 함대의 도움을 받아 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 동북부 해안가, 파타비움 앞에 신속하게 상륙했다.

약간의 휴식 후 퀸투스의 군단은 파타비움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탈리아 내의 율리우스 가문의 군대는 대부분 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야만족 및 카르타고의 잔당들과 상대하거나 원로원을 구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가 있었다.

파티비움 수비대라고 해봤자 총독인 드루수스의 호위병과 민병대 약간, 개혁 이전의 하스타티 두 중대, 그리고 궁병대 하나 뿐이었고 실전경험은 없었다.

미리 스파이를 침투시켜 파타비움의 상황에 대해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던 퀸투스는 어렵지 않게 도시를 점령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랬을 터였다.

식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원정군

내전에 들어가기 전후로 하여 율리우스 가문은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아 족들이 장악한 지역을 점령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그러한 임무를 띄고 알프스 산맥 북부에서 활동하던 식스투스는 퀸투스 못지 않은 백전연마의 노련한 장군이었다.

비록 제대로된 군대를 상대해본적은 없지만 야만인들을 상대로한 백전무패 전적은 율리우스 가문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를 통틀어 보았을때 그를 살아있는 군신의 반열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가 브루투스의 군대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보급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행군하던 중이었다.

특히 파타비움이 퀸투스 브루투스의 군단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식스투스는 그의 군대로 하여금 강행군을 행하게끔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 처한가문의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식스투스는 인근 부대를 이끌고 제빠르게 남하하여 풍전등화에 놓인 파타비움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한편 퀸투스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신속한 율리우스 가문의 대응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북쪽 너머의 알프스 산자락에서 율리우스 가문의 붉은 깃발을 보았다는 정찰병의 보고는 그로하여금 식스투스의 대군단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게끔 만들었다.

첩자의 첩보와 정찰병의 보고를 종합하여 관련된 일련의 정보를 수집한 퀸투스는 총 지휘관의 이름이 식스투스이고 전체 규모는 2개 군단에 약간 못 미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야만인들을 상대했지만 식스투스의 군단은 파타비움 수비대와 달리 비교적 실전경험이 풍부하여 질적인 면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군대였다.

그러나 퀸투스 또한 수많은 전장터를 돌아다니며 여러나라의 군대와 전투를 치룬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곧 그는 자신의 군대가 적군에 비해 취할수 있는 우위점 몇 가지를 파악할수 있었다.

우선 먼저 퀸투스는 율리우스 가문의 부대 구성 가운데 기병 전력이 아군이 우세한 점에 주목하였다.

식스투스의 군단은 2개군단 전부합쳐 3개 기병중대에 불과한 가운데 아군은 6개 기병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싸웠을때 프톨레마이오스와 용병으로 고용한 베두인 기병대의 전장터를 종횡무진하는 전술 기동에 퀸투스는 깊은 인상을 받은바 있다.

그때의 경험 덕택인지 강력한 기동성을 추구한 퀸투스는 건물들이 복잡하게 늘어선 시가전 하에서도 아군 중보병으로 하여금 대다수의 적군을 묵고 기병대는 기동성을 살려 핵심지역을 급습하는 전술을 즐겨 구사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어느 전장터에서든 신속한 승리를 얹을 수 있었다.

또한 두 번째로 식스투스의 군대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극도의 피곤에 절어있었고, 협소한 이동로 덕분에 2개 군단이 한꺼번에 산맥을 넘어오지 못했다.

두 군단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행군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잘하면 각개 격파를 노릴 수도 있었다.

그점에 유의한 퀸투스는 당황했던 초기의 모습과 달리 점차 안정을 되찾고는 평소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퀸투스는 중보병중 일부를 떼어내어 파타비움 포위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대는 좀더 북쪽으로 이동해 도시를 포위했다.

용병대에서 기병을 추가로 고용하여 기동 전력에서 완전한 우위를 달성을 노리고는 식스투스의 군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달후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때는 BC 221년 겨울.

마지막 눈보라가 기승을 부려 뼈속까지 얼려버릴듯한 그런 아주 추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