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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1.

자화룡(雌火龍) 리오레이아 (8)

 

 

 

 

 

용의 비늘은 깨어졌다. 약간의 피가 내 얼굴에 튀었다. 비늘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선홍색 살이 드러났다. 미지근한 피가 볼을 적시며 흘러내리기 전에, 제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오베론을 휘두른다. 비늘이 떨어져나간 곳을 노렸다. 그러나 날이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 리오레이아가 머리를 높이 들었다. 포효할 태세다. 나는 무방비인 리오레이아의 가슴으로 한 발자국 파고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힘껏 내려 치고, 몸을 오베론과 함께 한 바퀴 돌리면서 왼다리의 무릎과 오른다리의 무릎 뒤쪽을 횡으로 베어냈다. 다리의 비늘은 대부분 몸통의 것보다 약하다. 리오레이아의 무릎이 조금 굽혀졌다. 포효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리오레이아가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재빨리 앞으로 두 바퀴를 굴러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오베론을 땅에 꽂아 리오레이아와 나 사이에 벽처럼 세웠다.

랜든의 부상 정도를 생각해보면 수레는 그리 빨리 달릴 수 없다. 불빛과 아이루의 눈이 시야의 불편함을 없어지게 해준다고 해도, 숲 속에 편하게 달릴 수 있는 길 같은 것은 없다. 게다가 우리가 묵은 곳으로부터 포장된 길이 있는 곳까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십 분이 걸리니, 할아범과 랜든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이 숲 속에 있는 한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리오레이아는 상처를 입고 화가 난 듯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낮게 울었다. 하지만 오베론으로 세워둔 이 푸른 벽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오베론의 손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 벽을 넘어서려 하면, 벤다.”

 

리오레이아는 온몸의 비늘을 곤두세웠다가 눕히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내게 공격받은 부위에서 몇 개의 비늘이 더 떨어져 내렸다. 자화룡의 녹색 비늘은 마치 나뭇잎과 같아서, 이제 그것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볼 때면 낙엽이 떠오른다. 햇빛도 달빛도 닿지 않는 곳에서, 불빛에 바스러질 나뭇잎의 여왕.

먹이사슬에서 인간 위에 위치하는 비룡 종()의 하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인간과는 다른 헌터라는 또 다른 종이라면······.  

나보다도, 웬만한 인간보다도 많이 살았을 나뭇잎의 여왕은 눈에 독기를 품었다. 그녀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했다. 하늘의 왕을 꺾고, 그의 자리를 찬탈하고 육신을 유린해 만든 검을 들고서 이제는 여왕인 자신조차 위협한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그녀를 죽일 마음은 없지만 내 모습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도망친 다른 나뭇잎의 여왕과 이곳 숲 일대의 여왕 자리를 놓고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 해괴한 산불은 둘 중 누군가 무분별한 도전자가 지른 만행으로 본다면 맞을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도망가라. 용은 그 정도 상처로 죽지 않으며 말끔히 회복할 수 있다. 다만 랜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당신은 싸우고 있다. 그는 가만히 놔둬도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살 확률을 조금이나마 늘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서, 당신과 나는 싸우고 있을 뿐이다.

 

이 벽을 넘어서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베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말은 내가 세워둔 벽에 가로막혀 여왕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한 쪽 발이 땅을 깊이 파고, 낮은 울음 소리가 숲 전체를 가라앉힌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날리는 불티 사이로 별빛을 찾아본다. 당연하다는 듯 별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등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오베론이 부르르 떨렸다.

 

 

#

 

 

기분 나쁜 습기가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여전히 불 타오르는 숲은 이제는 꽤 멀어져 작은 호수 정도로 보였다. 불길이 잦아들어 숲도 힘 없이 축 늘어졌고, 붉게 일던 파문은 느리고 또 느려져 갔다. 저 곳 어딘가에서 파문을 일으키던 여왕 자화룡 리오레이아도 잔잔함 속에 파묻혔다. 달아난 한 마리도 생각보다 멀리 도망친 것 같았다.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한 방울 맞은 것이 눈덩이 위였다. 갑작스레 눈을 감게 되었지만, 얼른 눈을 뜨지 않고 잠시 멈춰 섰다.

불의 왕이 비의 여제(女帝)를 사랑했다는 우리 마을의 설화가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어떤 사실들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것일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불의 왕과 비의 여제이야기의 끝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길가에서 할아범을 찾았을 때 랜든은 이미 죽어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비 때문인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이루들 중 한 마리가 앞발로 랜든을 툭툭 건드려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미야오 미야옹 먀오. 여전히 아이루가 사람의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저 울음 소리만큼은 어딘가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사냥은 안 한다더니, 챙길 건 다 챙겨왔구나. 빌어먹을 놈.”

 

겐다 할아범의 시비에 나는 등을 돌렸다. 어깨에는 철로 만든 실로 꿰매어 가져온 자화룡의 비늘, 날개발톱 그리고 날고기 같은 것을 들쳐 매고 있었다. 실을 약간 들어 매달려있는 것들을 가볍게 흔들었다. 비늘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나는 물기에 잔뜩 짓눌린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는 남는 장사가 아니잖아.”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서 나무 아래 어깨에 맨 것을 내려놓고, 오베론을 그 옆에 내리꽂았다. 할아범의 대답이 들려왔다.

 

확실히, 그렇지.”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로 인해서 질퍽해진 땅에 수레는 말할 것도 없었고 걸음도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랜든을 실은 수레는 아이루들이 각각 네 모서리를 맡아 들어 옮겼다. 평소 같았으면 이동을 멈췄을 날씨였고, 애당초 이동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우리들은 묵묵히 걸었다. 아이루들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먼 곳에서 울부짖는 리오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도 빗소리 때문일까, 사람의 그것처럼, 고통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