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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1.

자화룡(雌火龍) 리오레이아 (5)

 

 

 

 

타오르는 불길 위로 연기가 자욱하게 솟아오르고 거기엔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밤하늘의 영역을 가르려는 듯, 두 개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일렁였다. 세상은 금세 사막보다도 뜨거워졌으며 삽시간에 붉게 변했다. 나무, 나뭇잎, 바위, , 대지 그리고 하늘, 많은 것들이 붉거나 혹은 검다. 용이 포효하자 그 소리는 열풍과 함께 밀어닥친다. 머리가 울리고 살갗은 타 들어갈 것 같다. 귀를 막았지만 두 마리 용의 포효를 막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입에서는 절로 신음 소리가 났고, 내장이 통째로 진동하는 듯 하다. 포효는 곧 멎었지만 불길은 더욱 멀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런데 랜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 겐다 할아범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잠들었던 자리 옆에 그의 짐이 아직 있었다. 그러나 짐은 헤집어져 있었다. 헤집어진 그의 짐 사이에서, 바람에 휘날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그의 책만이 눈에 띈다. 어느새 책에는 불이 붙고, 순식간에 전소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린다. 그의 이야기들은 눈 깜짝할 세에 재가 되어버렸다.

겐다 할아범은 서둘러 쿨러 드링크, 식량 등을 챙겼다. 나는 한 병의 쿨러드링크를 깨끗이 비우고 등을 돌렸다. 불 붙은 그의 짐을 뒤로 하고 숲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첫 발을 뗄 때, 열에 못 이긴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등 뒤로 겐다 할아범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불꽃은 진정 꽃처럼 나무에 피어, 불씨들을 꽃가루같이 날린다. 꽃가루는 강렬한 빛을 품은 새로운 불꽃을 낳고, 또 다시 더 많은 꽃가루들을 날렸다. 불꽃에게 나무는 숙주에 지나지 않았다. 꽃은 나무를 제물 삼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밤하늘 아래 지상의 붉은 별들이었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수분을 다 바치고 끝내 말라, 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이윽고 불꽃은 숲을 삼키며 그 많은 것들을 있게 한 자연을 통째로 숙주로 삶는다.

이건 무슨 짓이지. 말도 안 된다.

포식자가 약자를 잡아먹을 때는 규칙이 있다. 배부른 포식자는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그런 살육은 하지 않는다. 먹이사슬이란 일부만 깨어져도 사슬 전체가 못 쓰게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통이다. 보통, 그래, 자연의 섭리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한 번 자화룡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번 것은 약간 달랐다. 고통 받고 있는 비명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숨을 몰아 쉬었다. 공기가 무겁고 텁텁해 기침이 나왔다. 눈물을 머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나는 곳은 왼편의 언덕 방향이었다. 포효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그쪽 방향으로 달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곧 랜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오십 센티미터가 겨우 넘는 검을 들고 느릿느릿 전진하고 있었다. 모양은 뛰는 것 같았지만 걷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더욱 빨리 달려 그를 바짝 좇았다.

 

어이, 랜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몸을 날렸다. 그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그의 허리를 붙잡고 체중을 실어 그를 넘어뜨렸다. 그가 되는 대로 날린 주먹을 가볍게 피한 뒤,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았다. 손목을 약간 움직여 그의 턱이 들리도록 했다. 그의 눈동자는 나를 깔아보듯 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그쯤 해둬.”

 

랜든은 이를 악물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내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고 부러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갑옷은 그렇게 쉽게 부서질 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복수······. 세상사는 인간의 도리라는 건가?”

 

불은 우리들의 그림자를 흔들리게 만든다.

 

아니, 사냥은 하지 않으면 사냥 당한다. 그런 게 진짜 사냥이지. 죽으러 가는 건, 누군가의 복수도 사냥도 아니잖아. 웃기는 소리······.

 

나는 그의 목을 쥔 채로, 다른 손은 주먹을 쥐어 허공에 들었다. 그대로 턱을 가격해 그를 기절시키고 데려갈 심산이었다. 조금 다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막 주먹을 내리치려 했을 때, 그가 소곤거리듯 작게 말했다. 비웃음인지 미소인지 모를 웃음과 함께였다.

 

내 슬픔에 대한 복수요.”

 

나의 주먹은 그의 턱을 때리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말이 있을 줄 몰랐네요. 세상사 인간의 도리라니. 복수라는 거, 알아요. 해봤자 아무도 안 돌아온다는 거. 그냥 단지, 단지······.”

 

말하지 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지마.

 

그러면.”

 

아니다.

 

너무 슬프잖아요?”

 

아니야.

순수하게 조금은 목이 매인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를 내리치려고 했다. 팔꿈치를 최대한 뒤로 뺏다가 주먹을 아래로 내질렀다. 그때 랜든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의 목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맹렬하게 무언가를 좇았다. 거의 숨을 못 쉬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세게 쥐고 있었던 것이다.

 

리오레이아.”

 

나는 허리를 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오고 있었다. 한 번 날개 짓을 할 때마다 점점 바람의 세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갑옷을 갖춰 입은 난 몰라도, 랜든은 바람에 날려갈지도 몰랐다. 재빨리 일어나 랜든을 일으켜 세웠다. 풍압이 더욱 거칠어졌다. 이제는 날개 짓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위에 불길이 이곳을 중심으로 바깥으로 밀려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불길이 더욱 세지기까지 했다.

랜든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억지로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앞만 보고 그를 질질 끌어 움직였다. 간신히 풍압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났다. 나는 우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일단 상황이 나쁘니.”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고 말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 리오레이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입에는 새빨간 불과 검은 연기를 머금은 채로, 붉은 불빛 속에서 리오레이아의 녹색 비늘은 홀로 달빛을 받은 듯 그 색을 보다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불타버린 숲의 화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