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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1.

자화룡(雌火龍) 리오레이아 (4)

 

 

 

도시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울퉁불퉁한 숲길에 들어섰다. 우리가 갈 곳으로는 길이 닦여있지 않은 탓이다. 이따금 불쑥 튀어나와있는 굵은 나무뿌리와 주먹만한 돌들이 사람의 발길을 거부했다. 우리들의 걷는 속도는 점점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단한 갑옷의 무게로 그것들을 짓밟았고 천천히나마 지나간다.

얼마간 숲 속을 걷다 쉬는 시간을 가졌다. 랜든의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조금 이른 때에 걸음을 멈췄다. 랜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겐다 할아범은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할아범은 힘을 써서 그를 억지로 앉혔다. 그는 반항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지듯 땅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한동안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완전히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가장 길었던 한 숨의 끝에 그가 내게 말했다.

 

당신의 그 대검이 곧 힘의 상징이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에 그 모습도 보기 힘든, 창화룡(蒼火龍)의 비늘과 갑각(甲殼)으로 연마한, 하늘의 왕의 상징.”

 

그는 머리를 살짝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의 입 꼬리에 걸린 것은 분명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오베론(Oberon)······. 힘의 상징이자, 하늘을 추락시킨 자의 증언.”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색을 잃은 기억들이 일순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쪽빛을 잃은 창백한 창화룡, 생기를 잃은 비늘. 옆으로 누워 늘어뜨린 날개에 달린 발톱은 부숴져 있고, 하늘을 감싸 안아야 할 날개는 땅으로부터 떠나려 할 때마다 단지,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달마저 집어삼킨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빛만이 반짝인다.

반짝임은 번쩍임으로 바뀌고 색이 세상을 되찾았을 때, 랜든은 내 앞에 서있었다. 내가 그의 눈을 올려다보자마자 그는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던 사람의 힘이 아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리고 나의 멱살을 쥔 주먹은 계속해서 떨렸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왜 사냥을, 사냥을 왜 하지? 힘을 갖고서, 당신은 많은 것들을 구할 수 있는데, 가끔 밥값이나 벌기 위해서? 귀족의 장식품을 하나 늘려주는 대가로 며칠을 편하게 살려고? 아니면 당신이 장식품을 모으는 쪽인가? 그도 아니면 당신의 명성을 위해? 대체, 저것들을 다 절멸시키는데 쏟아 부어도 모자랄 힘을, 어떻게 쓰고 있는 거야!”

 

나는 그의 눈에서 새까만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당신한테는, 당신한테는 사냥이 뭔데?”

 

생각해본 적 없다.

 

내가 당신을 찾기 위해 수소문 했을 때,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당신이 더 이상 헌터가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 그런데 그것만큼은 기억에 남아. 사람들이, 당신은 이제, 사냥개일 뿐이라고······.”

어이, , 랜든!”

 

겐다 할아범의 고함 소리에 랜든의 어깨는 흠칫 놀란다. 할아범은 화를 내며 그와 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종전의 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는 겐다 할아범에게 얌전히 붙들렸다. 내게서 그를 떼어낸 다음, 할아범은 쳐내듯 그의 어깨를 놓았다. 그러자 그는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얼굴을 땅에 박을 뻔 한 것을 두 팔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해 막았다. 그러나 한 팔이 힘을 잃고 땅바닥에 팔꿈치를 부딪친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할아범은 당황해서 그를 부축하려 했고, 나는 그를 그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또 다시 아이루들만이 대화를 나눈다. 쉴 시간이 끝나고 다시 숲길을 걷기 시작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오늘 내로 목적지는커녕 숲을 벗어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만 누구도 걸음을 빨리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숲 속에서 밤을 맞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그에게 해주지 않았다.

모닥불을 피우고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랜든은 내게 죄송하다며 말을 건네왔다. 혼란스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는 짐 속에서 그의 책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마지막 장을 펼쳐 엄지손가락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받아 들고, 그가 펼쳐둔 부분을 읽어 본다.

명부(名簿)였다. 이름들이 잔뜩 쓰여있고, 아저씨, 아줌마, 누님, , 동생 같은 호칭들이 각 이름마다 모두 붙어 있었다. 약 서른 명 즈음 되었다.

나는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모두 읽고 랜든을 쳐다봤다. 랜든은 불안한 사람처럼 주먹을 꼭 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계속해서 주물렀다. 시선은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흔들리는 모닥불 때문일까, 그의 등 뒤에서 그의 그림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그림자가 제 것이 아닌 것마냥, 웃는 표정으로 짓고 이야기했다.

 

제 고향 사람들이에요. 죄송스럽게도 모두의 이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 같았던 이웃들 이름은 모두 기억해서, , 그렇게 써뒀죠.”

 

크지 않은 마을이었다. 가끔 드나드는 행상인이나 헌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말대로 가족처럼 지냈을 마을이다. 큰 웃음 소리 한 번이면 마을 사람 모두가 불을 밝히고 뛰어나와 함께 웃고 즐겼을, 대가족과 같은 곳이다.

이 이름들, 그들의 이름들. 랜든의 주위에 머무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들의 이름들이다. 항상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그는 그림자들과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기억 속에 남은, 과거의 것에 슬픔을 비춰 만든 그림자와 매일매일 말이다.

 

자화룡은 이제, 눈만 감으면 그려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그의 책에 그린 수 많은 자화룡들이 떠올랐다. 자화룡은 녹색으로 물들인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몸을 펴고 불을 뿜어낼 것처럼, 그림은 날카롭게 그려져 있었다. 목이 뻗어 나오는 곳과 날개발톱이 달린 곳 위에 털처럼 난 가시도 창의 끄트머리처럼 뾰족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벌레 소리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에 묻힌다. 우리들은 몇 마디를 주고 받고서 각자 자리에 누웠다.

 

 

 

 

 

속삭이면서도 잔뜩 힘을 준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일어나, 어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이미 불침번을 서고 잠든 참인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상체를 일으켰다. 겐다 할아범의 호통 소리도, 벌레의 울음 소리도, 어떠한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도 간신히 떴을 뿐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막 눈을 비비려 했다.

그때 멀리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빛은 붉고 커다랬다. 그리고 곧 폭발음이 들렸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후 이제는 겐다 할아범의 말소리가 확실히 들린다.

 

레이아다. 자화룡이야. 가까운 곳에 두 마리나 있어!”

 

난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서 숲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