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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잠시 바라보던 라만 이등병은 다행히도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다시 자기 할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르펜, 라만."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 전이었다. 세레나 일등병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네, 세레나 일.등.병님!"
"헤에. 너 그거 재미 들렸구나. 계속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럽잖아."
본인이 한 말과는 다르게 입이 귀에 걸려 있는 세레나 일등병이었다. 이 악센트는 여전히 유효하구나.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그래도 선임인데 너네들한테 너무 신경을 못써준 것 같아서... 가벼운 파티라도 할까 하는데 어때?"
뺨을 긁으며 살짝 먼산을 바라보는 듯 말하는 세레나 일등병의 모습은 지금 와서는 상당히 익숙한 그림이었다.
그냥 보면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 말을 하기까지 상당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는 부분을.
"안그래도 저번에 온 황금마차에서 먹을걸 잔뜩 사시더니 저흴 위한 것이었군요...!"
라만 이등병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고 나는 먼저 선수쳐서 두손을 모아 말했다. 가만히 있다간 이 답답한 말더듬이 고참이 우쭐쭈물거려서 괜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 감동받았습니다!"
두 손을 모아서 나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제서야 맞장구를 치는 라만 이등병이었다.
"저, 저도..."
"식사하고 구두방에서 봐, 얘들아."
말을 마치고 생활관을 빠져나가는 세레나 일등병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발그레한 모습이었다. 후임으로서 이런 생각하면 안될 것 같지만,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는 고참이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휴식시간. 나와 라만 이등병은 잠시 생활관에 앉아 있다 세레나 일등병이 말한 곳으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구두방이라고 불려진 막사옆에 붙여 지은 이 자그마한 나무집은 휴가 나가기 전 전투화를 광내기 위해 만든 곳으로 전전대의 병사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지었다고 한다.
물론 평상시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데 짬 비린 일이등병들이 고참들의 시선을 벗어나 상호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종종 이용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들처럼 말이다. 
"어라. 생각보다 깨끗합니다."
라만 이등병의 말에 따라 청소라도 하려고 빗자루를 들고 온 나는 구두방 안의 깨끗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상시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곳이라 먼지가 자욱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미리... 청소하신건가..."
평소보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의 모습은 은근히 감동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보아온 세레나 일등병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잠시후, 우리가 앉아 있는 구두방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걸음걸이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미안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닙니다. 금방 도착한 참이었네요."
급하게 달려왔는지 조금 숨을 헐떡이는 세레나 일등병이 품에서 간식을 꺼내어 바닥에 늘어놓은 뒤 양초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어둡기만 하던 구두방 안에 작은 온기와 빛이 생겨났다.
"생각보단 춥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은연중에 우리의 눈치를 살피던 세레나 일등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 딴에는 우리를 챙겨주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건데 날도 추운데 괜히 불렀나 하는 표정이 느껴져서였다.
"그, 그렇지? 안그래도 추울까 싶어서 걱정 많았는데, 다행이야."
내 생각대로였다.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활짝 웃는 세레나 일등병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간식들을 우리에게 권했다.
"그래도 내 후임들인데 한번도 안 챙겨준 것 같아 미안해서 있는 돈 다 털어서 샀어." 
무리를 하셨구나. 쥐꼬리 봉급인거 뻔히 아는 사실인데. 나와 라만 이등병을 슬쩍 서로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세레나 일등병님."
"아니야. 사양하지 말고 다 먹어야 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며 묘한 부담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저녁식사를 조금 하긴 했지만 한꺼번에 다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았으니깐.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침이 고이는 걸 보면 내가 이등병이 맞긴 맞나보다. 제일 배고플 때라고 하더라.
나와 라만 이등병은 간식을 한입 먹으며 세레나 일등병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같은 고참들이 있을 땐 절대 꺼낼 수 없는 얘기들이 오고 갔다. 이리저리 치이는 생활, 고참들에 대한 이야기, 근무의 지루함 등등.
바로 가까운 고참들이여서 그런가, 분대원이 다 모여 있을 때보다 편한 느낌이 있었다.
"그나저나, 아르펜은 두 사람 어떻게 생각해?"
"누구 말씀이십니까?"
"안젤리카 일등병님이랑, 베일 일등병님."
"아..."
결국 화제가 여기까지 왔다. 하긴,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세레나 일등병이 모를리 없었다. 두 고참이 대화할 때면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느낌이었으니깐.
세레나 일등병이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안젤리카 일등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은연중에 느꼈나보다. 
하지만 나로선 상투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그런 당연한 거고. 내가 너 때도 두분이 나 엄청 챙겨주셨으니깐."
말을 마친 세레나 일등병이 자신의 두 검지를 맞닿으며 말했다.
"이등병 때부터 봤지만, 수상하단 말이야! 안젤리카 일등병님이 유일하게 사투리 의식하기도 하고, 두 분 대화할 때만 분위기가 묘해지는 거 너도 느껴지지?"
"...사실은 그렇습니다."
"너, 안젤리카 일등병님 좋아하지?"
하아. 여자의 직감은 속일 수 없나보다. 고개를 올려 하하 웃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군대는 연애를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아니, 그건 맞는데 짝사랑은 상관없잖아? 괜찮으니깐 말해 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이었나? 나는 이 순간 제일 무서운 고참이 누군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세레나 일등병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네. 좋아합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라하는 세레나 일등병이었다. 뭔가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였을까? 나는 잠자코 세레나 일등병을 지켜보았다.
"갈등이 있는 두 일등병과 그 사이를 파고드는 이등병의 짝사랑! 이거 너무 극적이여서 글 한번 써야 되겠는데?"
"저, 저기 세레나 일등병님..."
혼자 텐션이 올라 두팔을 가슴에 안은 채 좋아라 하고 있는 세레나 일등병을 보며 나는 상당히 난감함을 느꼈다. 문득 우리를 여기로 부른 궁극적인 이유가 이거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세레나 일등병은 안심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걱정마 아르펜. 이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깐."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왠지 모를 억울함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메이아 상등병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세레나는 평상시엔 얌전한데 연애얘기가 나오면 아주 발광을 한다'라고 하던가?
그러던 중 난 오늘 있었던 사건 하나를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간식만 먹고 있던 라만 이등병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세레나 일등병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어떤 거?"
"이 소초안에 세레나 일등병님을 좋아하고 있는 분이 계신다는 걸요."
"켁켁."
조용히 간식을 먹고 있던 라만 이등병이 사레가 들린 듯 가슴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세레나 일등병이 마실것을 건네주었다. 
세레나 일등병의 어조는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잠깐만. 누구야 그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얼버무리기로 했다. 세레나 일등병의 말에 일순간 욱해서 꺼낸 말이었긴 한데, 더 이상 말하는 건 위험한 듯했다.
"그게 저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서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구두방 바깥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우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채 한동안 껌뻑였다. 그러다 세레나 일등병이 다급하게 입바람을 불어 양초를 껐다. 구두방안이 금세 어두워졌고, 우리 셋은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 대화하기 싫다는 겁니까?"
억양을 듣는 순간, 안젤리카 일등병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걸 굳이 대화해야 하냐?"
베일 일등병이었다. 어두워서 육안은 보기 힘들었지만 느껴졌다. 우리 셋의 표정이 모두 호기심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는 것을. 누구라 할 것 없이 구두방의 벽에 바짝 붙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남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잘 들어 안젤리카. 우리 둘 사이의 일은 내가 입대한 순간 끝난 거야.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 없잖아?"
"내가 십년 동안 봐온 베일이란 사람이 맞나 의문이 드네요. 입대하면 더 이상 안 볼 생각이었습니까?"
안젤리카 일등병의 목소리는 무척 감정적이었다. 반면 베일 일등병의 목소리는 고요한 물처럼 잠잠했다.
"내가 항상 말했었지? 가문끼리의 주박에 우리가 얹메이진 말자고. 너도 네 인생을 살면 되잖아. 나도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고. 우리가 같은 부대, 그것도 분대의 맞선임 된건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내 생각은 그래."
"항상 얘기했잖아요. 가문을 떠나서 베일 일등병님만 괜찮다면 전 따르겠다고. 뭐가 싫습니까?"
"전부 다. 사람은 어른들이 정해준 사람끼리가 아니라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맺어져야 하는 거야. 아직도 이해 못하겠냐?"
베일 일등병의 목소리에는 유난히 날이 서 있었다.
"이야아..."
조용히 감탄사를 흘리는 세레나 이등병은 꽤나 흥분한 어조였다. 어두워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느껴질 정도였다.
"에취!"
하지만 라만 이등병이 그런 기대감에 초를 치고 말았다. 기침소리를 듣자마자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남녀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역력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 그러죠."
이 대화와 함께 더 이상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랬어..."
타박하는 세레나 일등병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라만 이등병은 예의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마침 청소시간도 다 되어 가는데 이만 나가자."
말을 마침과 함께 자리를 정리하는 세레나 일등병이었다. 함께 정리하던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아참. 얘기 하다 말았었지, 누구야 그거?"
"그, 그건 나중에 얘기해드리겠습니다."
괜히 얘기했나 싶은 후회가 몰려왔다. 나는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세레나 일등병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라만 이등병의 두 시선을 모른척 하면서 자리를 털고 나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