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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 영광입니다. 저희가 식사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나도 거들지. 사양하진 말게나."
손사래를 치려는 칼라 병사장 앞에서 손바닥을 내밀며, 주문을 외우는 샤린이었다. 금세 불꽃이 피어났다.
그렇다. 미처 잊고 있었는데 그는 마법사였다. 그것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마법사.
"그럼 불만 좀 피워주시겠습니까? 다른 걸 부탁드리기엔 저희가 너무 죄송합니다."
"껄껄껄, 그러도록 하지."
금세 보급소 안은 식사준비로 분주해졌다. 나를 비롯한 일이등병들은 식자재를 옮겼고 상등병들은 그것을 손질했다. 샤린은 마법으로 불을 피우며 장작들을 집어넣었고, 칼라 병사장은 물을 채운 냄비에 식재료와 갖가지 향신료를 넣으며 요리를 주관했다.
잠시 후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으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냄비 위에서 손바닥을 살살 저으며 냄새를 맡던 칼라 병사장은 나무로 만든 스쿱(scoop)으로 국을 떠서 호호 불어 샤린에게 시식을 권하려다가,
"아! 이건 제가 하면 안되겠군요. 프레카?"
옆에서 지켜보던 프레카에게 내밀었다. 금세 의도를 눈치챈 프레카 상등병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마찬가지로 호호 불며 왼손으로 아래를 받친 채 샤린에게 스쿱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어떠십니까, 샤린님?"
"음~ 정말 맛있군 그래. 젊은 처자가 떠먹여주니까 더더욱 좋아."
"힛. 과찬이십니다~."

주름이 무색할 정도로 웃으며 좋아하는 샤린과 유난히 콧소리를 내는 프레카 상등병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리카 일등병의 시선이 나를 향해 돌아갔다.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남자는 원래 다 저렇나?"
"다... 저렇진 않죠."
"니는?"
"전 안 그렇습니다."
"얼씨구."

혀를 차면서 샤린쪽으로 시선을 되돌리는데, '잘도 그러겠다.'는 뉘앙스였다.
...뭔가 말할 수 없는 분함이 느껴졌다.

"자, 완성.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먹어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안에 마련된 나무식탁에 음식이 올려졌고, 장거리를 내려오느라 무척 배고팠던 우리는 게 눈 감추듯이 숟갈을 들어 입에 넣기 시작했다.
"와, 맛있는데요?"
"라파 상등병보다 요리 더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금세 탄성이 터져나왔다. 간은 완벽했고, 안에 들어간 식재료는 푹푹 잘 익어 부드럽게 혀를 타고 입안으로 감겨들어갔다.
추워서 얼어붙어가던 속에 생기가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겨울엔 따끈한 국물이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샤린도 스푼을 들어 천천히 음미하듯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곤 감탄사를 토해냈다.
"캬아. 젊은 친구가 참 맛있네 끓였구만 그래."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사례라고 하긴 뭣하지만, 뜨거운 목욕물을 선물해 주겠네."
"정말이십니까!?"
칼라 병사장과 샤린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우리는 뜻밖의 횡재에 기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긴 거리를 걸어내려온 덕분에 온몸이 땀투성이었다. 그 찝찝함 때문에라도 내려가는 길에 샤워얘기는 하고 있었다. 급수장은 넘치는 게 물이었고, 허름하지만 나무로 지어진 샤워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다.
다만 겨울인만큼 찬물로 샤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입장에선 물이 있다는 것 자체를 감지덕지해야 했다. 소초에도 물은 귀했으니깐 말이다.
황금마차에서 돈주고 비누사면 뭐하나? 물 두바가지로 다 해결해야 하는 입장인데. 
저 대마법사 할아버지 입장에선 가벼운 배려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입장에서 이건 미친 호사였다.
"잠깐 선잠이라도 자고 있게나."
그렇게 말한 샤린은 샤워장을 향하더니, 10분후 다시 돌아와 손을 흔들었다.
"목욕물 데워놨네. 5인 정도가 동시에 씻을 수 있는 규모니 남녀가 각각 따로 씻으면 될걸세."
그의 말이 끝나자 우리 모두의 시선이 칼라 병사장을 향했다. 당연히 어느쪽이 먼저 씻을 지에 대한 것이었다. 보통 이런 문제의 판결은 분대장이 내리는 게 불문율이다. 
"아가씨들 먼저 씻으시죠?"
"꺅! 사랑합니다, 분대장님."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 여고참들이 세면도구들을 챙긴채 샤워실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참,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이상한 짓 하면 아시죠, 우리 사랑스런 후임님들?"
프레카 상등병이 들어가기전 뒤를 돌더니 우리에게 던진 경고였다. 그리고 샤워장의 문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
잠시 나를 비롯한 남자분대원들 사이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샤워장쪽과 우리쪽을 번갈아보던 샤린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물었다.
"감시마법 쓰면 볼 수는 있는데, 필요한가?"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칼라 병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 라만이등병이 눈을 잠시 반짝이다 이내 시무룩해지는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러는 사이 샤워장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비누 내놔, 세레나."
"끼악! 샨티 일등병님 어디 만집니까!"
"우리 젤리 역시 나보다 크구나?"
"당연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씻기나 씻어 이년아."
소리만 들어도 시끌벅적함과 함께 활기가 느껴졌다. 안의 풍경이 상상되자 괜히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고참들이 우르르 빠져나왔고, 이번엔 나를 비롯한 5명의 남자들이 들어갈 차례였다.
"아, 좋구나."
옷을 벗은 채 물을 길어 온몸을 적신 칼라 병사장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기엔 충분했다.
추운 날씨에 얼어 있던 몸이 따뜻하게 적셔졌다.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쌓였던 피로가 떨어지는 물과 함께 깔끔하게 씻겨내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왁자지껄했던 여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조용히 목욕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기분이 어떤가."
"덕분에 씻는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칼라 병사장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만 그런건 아니었다. 워낙 힘든 여정이었기에 출발하고나서 지금까지 고참들의 안색이 다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부분들이 은근히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방금의 가벼운 샤워 한번으로 그런 감정들이 싸그리 다 씻겨나간 것이다. 
샤린은 껄껄 웃으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길다란 파이프담배의 입구에 붉은 잎을 꼬깃꼬깃 집어넣고선 손가락을 튕기며 불을 붙였다.
한참을 들이마시다, 가볍게 내뱉으며 연기의 고리를 만들어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느끼는 그 기분과 그 감정. 앞으로도 잊지 말게.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짐승이니깐 말일세."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순간 무슨 이유로 이런 얘기를 했을까 곱씹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새파랗게 어린 우리가 해석하기엔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분의 뜻은 너무 난해했다.
다만 칼라 병사장은 물끄러미 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샤린 본인이라기보단 그가 물고 있는 파이프담배였지만. 피식 웃은 그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자루에서 붉은 잎을 내밀었다. 
"류나의 키스라네. 한대 할텐가?"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분대장이라는 위치 때문에서인지 평소에 은근히 감정표현이 절제되있는 칼라 병사장이었는데, 그 잎을 보자마자 상당한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칼라 병사장은 입대전부터 지독한 애연가라고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 자네 몸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를 말일세."
"꾼은 꾼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꾼이라, 애연가가 가장 흡연을 갈구할 때가 두 가지 있지. 언제인가?"
샤린에게 받은 담뱃잎을 점화한 뒤 연기를 마셨다 내뱉은 칼라 병사장이 담담히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뒷간에서 큰일 볼때와 샤워한 직후지요."
"껄껄껄. 흐르는 피는 다르지만 마시는 공기는 똑같구만."
"하하하하. 명언이십니다."
호탕하게 웃는 두 남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는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담배라는 공감대 하나만으로 나이를 초월할 줄이야.
"제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샤린님처럼 위대한 업적을 쌓은 분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궁금해집니다."
듣고 있던 나는 흠칫했다. 얼핏 들으면 이상할 게 없는 말이었지만 과거가 궁금하다는 뜻이 분명히 담겨있었다.
사실상 터부시되던 샤린 타라크만의 과거. 나름대로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듣는 입장에 따라선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소리다.
"자네, 담배만 잘 피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보니 여우였구먼 그래."
"죄송합니다. 워낙 그런 소릴 많이 들어서요."
탁탁
다 핀 잎의 재를 털어낸 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할 것은 없지. 이 노구도 살 날이 많이 안남았으니깐 말일세. 다만 이야기가 길어질테니, 우리에게 주어진 일부터 먼저 해결하는 게 어떻겠는가?"
"...감사합니다."
칼라 병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말씀 들었지? 어서 보급작전을 실시한다."
"실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정에도 없던 스케줄이 추가되어 사실상 언제 소초에 도착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버렸다.
하지만 샤린 타라크만이라는 전설의 과거사는 어디가서 억만금을 주고도 못 들을 이야기. 일을 빨리 끝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SKEN 2020.02.24 23:28
    전설적인 위인의 소탈함과 칼라 분대장의 윗사람 대하는 능숙함이 돋보이네요.
    중간에 이벤트 CG가 필요할것 같은 장면도 있었는데 소설이라 아쉽네요..ㅜ
    아 그리고 중간에

    [아니, 뜬금없이 저는 왜 쳐다보십니까?!
    "왜 그래 갑자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선 다시 시선을 돌리는 그녀였다.]
    이 부분이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왜 그래 갑자기?"가 아르펜의 대사라면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이고,
    다른 누군가가 한말이라면 상황상 누가 한 이야기인지 알기엔 정보가 누락된것 같습니다!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 불꽃휴먼 2020.02.27 20:42
    그거 문피아에선 수정했는데 여긴 깜빡했네요 ㅎㅎ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