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주로 도약이 임박한 시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곤한 자들은 앞다투어 '연합'이 준비한 이주계획에 참여하여, 불완전하고 불안한 빈약한 기계장치에 몸을 싣고 우주로 나아가기 시작한 시대. 그건 새로운 대항해시대의 서막이었고, 새로운 서부개척사의 시작이었다. 역사의 반복이자 순환. 그럼에도 아직은 어머니 지구의 중력안에서 안주하는 시대였다. 과도기. 언제 끝날 줄 모를 희망과 불안이 뒤엉킨 과도기.

같은 21c지만 나의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들. 평행우주 이론일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일지, 기억이 잘못되거나, 나의 어린시절에 생생한 상상력이 만든 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나는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

검은 단발머리. 가날프고 눈썹이 고운 아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뒤엉킨 짙은 녹안으로 그것을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지는 키가 작았고 이제 몸에 막 여성 특유의 곡선이 생겨나 어려보였으나, 행동 하나하나가 어른스러웠다. 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큰 옷을 입은 듯했다. 아지는 새하얀 하계용 셔츠와 체크무늬 넥타이. 짧은 체크무늬 교복바지와 검은 멜빵을 한 채로, 검은 오니삭스를 싣고 있었다.그리고 단정한 굽낮은 구두를 신은채로 크로스백 형태의 검은 가방을 어깨에 건 채로, 서있었다. (자칫 남자아이처럼 보일 수 있었으나,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은 확실히 여아였다.)


반중력 열차가 출발하면서 바람을 일으킨다. 아지가 서 있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반중력 모노레일 열차역은 사방으로 뻗어나 도시의 혈관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역은 제법 커서, 온갖 편의시설이 들어와 있었는데, 역사 곳곳에 설치된 값비싼 홀로그램은 TV의 역활을 대신하고 있었다. 홀로그램은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시베리아에 걸설하던 3번째 궤도 엘레베이터가 폭탄테러로 공사를 중단한지 3년만에 공사를 다시 진행한다는 뉴스였다. 리포터와 시베리아의 공사현장이 그대로 현실처럼 보여주고 있는 홀로그램은 아지 말고는 역을 오가는 이들에게는 딱히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일상이 되어버린 기적이라고 할까. 열차가 일으킨 바람에 엉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면서 아지는 중얼거렸다.


역은 도심 지역과 이른바 A구역이라 불리는 학교, 연구소등이 밀집한 특별구역을 잇는 열차 노선 중, 최단노선으로 유동인구가 많았다. 도심과 A구역을 나누는 우거진 열대우림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역 근처의 잘 정비된 커다란 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A구역에서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멀리 도심까지 가지 않고 이 역에서 볼일을 보고는 했다. 아지는 통학을 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이 역을 이용했다.


또다시 열차가 출발한다.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아지는 자기가 타야하는 열차가 이미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타야하는 열차는 10분 간격으로 들어오니, 조금만 기다리면 됐다.


아지는 역세에 배치된 긴 의자에 앉았다. 열차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뉴스를 내보내는 홀로그램을 보면서, 아지는 생각에 빠졌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뉴스는 금발의 여기사가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모습을 시민에 제보한 영상을 편집하여, 공권력의 추락인가? 라는 주제로 대머리 논설위원의 강경한 어조로 공권력을 비판하고 있었다. 아지의 가느다란 오른쪽 검지가 위아래로 톡톡 거린다.

생각에 빠지면 나오는 아지의 습관이었다. 아지는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열차를 3번이나 놓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세상사에서 무감각해진 공허한 두 눈, 약간의 후회와 부질없는 미련으로 앙다문 입술. 그리고 안식과 위안이 절실한 가날프고 눈썹이 고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는 열차의 창밖을 바라보는 아지는 돌아오질 못할 옛 시간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에 빠졌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법칙에 끼인 이물질 같다는 착각. 하늘에 제시간에 찾지 못한 채, 튀어나온 낮달같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문다. 아지의 눈에 창 밖의 하늘을 넘보는 거대한 마천루의 세상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마천루 틈속에서 자신은 무엇을 위해 하루를 또 하루를 보내는 걸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아지는 스스로 대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아지는 입술을 깨물어 본다.

열차 안은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아지만이 느끼는 혀 끝에 묻어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고독의 쓴맛을 애써 담담히 삼킨다.


─이번역은…

안내방송이 흐르고, 아지는 열차에서 내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열차는 곧 역에 도착하고, 수많은 인파속으로 아지는 걸어간다. 열차는 곧 출발했다. 불어오는 안내방송 만이 희미하게 사라진다.

아지는 역을 빠져나와 혼잡한 거리로 찬찬히 걸어갔다. 오늘 우연히 교무실 근처를 지나가다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아지는 아이같지 않아요. 반의 친하지 않는 아이의 이야기. 다 큰 어른이 어린이 탈을 쓴것 같아. 나이차가 많이 나는, 바쁘다고 보기도 힘든 오빠의 냉정한 이야기. 가끔 섬뜩할 때가 있어요. 아지를 담당하는 선생의 이야기. 아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거대한 마천루가 밀집한 도심의 중심부는 아니였지만 키 큰 건물들이 자리잡은 도심의 외곽.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키가 작은 아지는 그 인파 속에 파묻힌다.


집안의 늦둥이이자 애물단지인 아지는 속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이유없이 치열한 삶을 살고있는, 성공을 위해 달려야만 하는 같이 지내는 시간보다 따로 떨어져 사는 당신들과 나는 달라. 아지의 얼굴에는 어느새 단호한 결의와 거기서 생긴 여유가 묻어났다. 피곤함과 여유가 뒤엉킨 아지의 표정을 보면, 화가들이 기뻐하겠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아지는 문득 길을 멈췄다.


─안녕, 디에고

아지의 목소리는 약간 낮은 톤이었지만 맑았다. 그 목소리에 곱슬거리는 검은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 장난기가 가득한 눈매. 남미의 정열적인 사람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건강한 구리빛 피부. 열정이 가득한 얼굴에 휜칠한 사내. 디에고는 약간 누래보이는 치아를 훤히 들어내며 한껏 신나게 연주하던 통기타를 내려놓았다.

─괜찮지? 아지

─응

허름한 셔츠에 누더기에 가까운 청바지. 낡은 샌달을 질질 끄는 디에고는 보행자 도로의 한 가운데 심어진 커다란 가로수와 가로수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지는 디에고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두고 자리를 툴툴 털더니, 이제는 지정석이 되버린 자리에 앉았다.

─디에고

─잠깐. 잠깐 기다려봐

디에고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통기타를 튕겼다. 가벼운 템포. 아지는 알 수 없는 코드에, 온갖 기교가 경쾌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 때의 디에고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굉장히 신나, 연주에 몰두한다. 그 모습에 아지는 이 사람은 애 같아.라고 생각이 들었다. 음악보다 몰입해 신난 디에고의 모습에 아지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음악은 아지만을 위해 들려지고, 아지는 자신을 짓누르던 것들을 잊고 또 잊어버린다.


─어때? 아지. 이번엔 정말 괜찮지?

─…… 좋아

아지는 연주를 끝내고 묻는 디에고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디에고는 자리에서 폴짝 뛰며 즐거워한다. 정말 아이 같았다.

─ 좋아!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한다!

디에고는 환호성이 뒤섞인 과격한 몸짓을 선보였고, 행인들을 디에고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디에고와 아지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아지는 의자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봤다. 건물의 틈 사이로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그래, 아무렴 어때. 아지는 자신을 짓누른 것들을 묻어버렸다. 아지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디에고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음악이 뒤엉켜 들려온다.


자리에 앉은 디에고는 다시 통기타를 쳤다. 아지는 그 옆에서 조용히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책 제목은 「흘러가거나, 사라지거나, 놓쳐버리거나」. 둘은 별 말이 없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고 그제서야 둘은 헤어졌다.

짧은 인사말. 괜찮지? 응. 내일도 볼래?. 그럴 수 있다면. 그 말을 끝으로 아지는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디에고와 헤어진지 10분 정도. 아지는 빅토리아 풍의 외관을 가진 40층짜리 건물에 들어갔다. 경비원은 없고, 최첨단 전자도어로 굳게 출입구를 막은 건물은 제법 잘사는 중산층들이 몰려사는 곳으로 알려진 거창한 이름을 가진 건물이었지만, 다들 그냥 V-125번지라고 불렀다. 아지가 1층 로비의 입구에 서자, 문은 열렸다. 아지는 로비로 들어가 아무 엘레베이터나 잡아 타고는 25층에 위치한 자기 집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철문. 2507호. 아지는 지문과 시신경 확인을 하는 잠금장치를 해체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인기적 없는 조용함. 어둠에 잠겨있던 집은 아지가 들어가자 불이 켜진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약간 어울리지 않는 엔티크 가구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아지는 무심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루. 이틀. ……일주일. 변함 없이 반복되는 일상.

누군가는 그토록 바라던 하루지만,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일상.

어느 날, 사소한 것부터 변화는 찾아왔다.


그닥 흥미를 주지 못하던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디에고는 없었다. 아지는 늘 있었던 디에고가 없다는 사실에 바닥에 떨어진 찌그러진 깡통을 발로 툭 찼다. 항상 디에고가 통기타를 치던 자리의 옆자리. 아지의 지정석. 아지는 그 곳에 앉아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봤다. 우거진 나무의 그늘 사이로 난 작은 틈에 하늘이 보일듯 말듯하다. 디에고는 뭘하고 사는 걸까. 아지는 1년 가까이 디에고를 보았지만, 디에고가 통기타를 좋아하는 바보라는 사실과 이름만 알고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디에고도 자신이 학생이고 이름밖에 모르지 않았을까.


아지는 자신의 가방에서, 오래전 기억조차 희미해진 친구가 선물해준 낡은 책을 꺼냈다. 「흘러가거나, 사라지거나, 놓쳐버리거나」 참 쓸쓸한 제목이야. 친구는 아지에게 선물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낡고 낡아 손 때가 가득묻은 책. 아지는 한참이나 책을 펼치지 못하고 쓰다듬기만 했다.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디에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디에고에게 무슨일이 생겼나? 아지는 책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괜찮아? 아지. 디에고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일 여기서 기타를 치고 웃고 있을꺼야. 아지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지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붉어진 하늘. 시간은 많이 지나있었다. 아지는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집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을을 옮기려 했다.


─ 아지? 아지 맞지?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아지를 불렀다.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 낯설지만 그리운 목소리. 아지는 고개를 돌려본다. 희미한 기억속에서 튀어나온 그 애. 어릴 때 모습은 사라지고 훌쩍 커버린 그 애는 놀란 눈으로 아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반가움에 웃음을 터뜨린다.


─ 성……성현?


아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애는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매일 만난 것 처럼. 히죽 웃고는 아지의 이마를 꾹 눌렸다. 아지는 어안이 벙벙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떨었다.


─ 여전히 맹하네


그 애는 하얗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


아지와 그 녀석의 이야기─ 우연. 사소함. 재회 完



  • 발뭉 2012.01.12 21:54

    전반적으로 깔끔하지만 '생각'에서 말하는 부분이 '생각'과 섞여서 구분이 안가는 점이 아쉽네.


    그리고 설마하니 아지는 강아지의 아지인가..

  • 홍차매니아 2012.01.13 06:14

    노병장. 병장이 되니까 소설을 다 쓰는 구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