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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퇴원한 후 선현은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뉴욕의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복도를 지나와 자신의 방에 돌아오니 심플하고 횅하다 못해 황량하고 간단하기 그지 없는 기숙사 방의 풍경이 나타났다.

분명 2인실에 필요한것만 알뜰하게 갖춰 좁기 그지 없는 기숙사 방이지만 느껴지는 오오라가 황량하니 어쩐지 넓어보인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것 치고는 그의 자리는 깨끗했다.

다만 자리 주인이 오랫동안 부재중이어서 그런지 처음 정리된 상태 그대로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무도 손을 안댄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말끔히 정리된 그의 책상에는 희미하게 먼지가 내려앉아 얇은 막을 형성했다.

깨끗이 닦아야 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강렬하기 일어났지만 그의 몸은 휴식을 더욱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나중에 하지."

 

대신에 한쪽 벽에 마련된 방 내부 환경 탭에서 공기 순환 기능을 선택하고는 강도는 중으로 맞추었다.

그러자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정체되어 있던 방안의 공기가 순환하기 시작하더니 외부에서부터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게다가 기숙사 환기 시설에는 산소 발생기도 설치되어 있어 혼탁했던 정신을 조금씩 씻어내고 있었다.

침대로 다가가 대충 신발을 벗어둔 선현은 옷도 벗지 않은체 몸을 들여눟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줄곧 누워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심신이 피곤하다.

아무튼 현재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

 

"휴우-."

 

침대에 가만히 누워 위쪽 침대의 아랫 면을 본다.

학원에 오자마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것부터 시작해서 엘리베이터에서 1대 30여명의 대난투극이 네트워크상에 동영상으로 유포된 일.

동영상을 유포한 소녀 리키 로 와의 만남과 계약.

그녀의 납치.

도시 전설 속의 여기사와의 사투.

거기서 심각한, 죽을지도 모를 부상을 입어서 깨어나고 보니 병원이었고.

정말인지 모든 게 이 섬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다.

보랏빛의 광기의 폭풍과 아련한 추억을 뒤로 한 체 찾아온 곳이 바로 이곳 대양에 자리 잡은 현실의 에덴동산인데 그가 겪은 것들은 아드레날린 분비를 폭발적으로 촉진시키는 위험하고 험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 섬에 막 머물기 시작한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한 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에 겪은 것들이 그 모양인데, 앞으로는 무슨 일이 나에게 닥쳐올지.

생각에 잠겨있던 도중 문득 문 밖이 좀 시끄럽다고 느꼈다.

노호성과 타격음, 비명의 합중주가 복도에서 울려퍼지고 그 가운데 웬 여자의 기합이 가른다.

소란은 길게 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듯 복도는 다시 조용해 졌다.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에게 별다른 피해가 없으면 그다지 신경쓰는 성격이 아닌 선현은 눈을 감았다.

그랬을 터였다.

좀 조용해졌을듯 싶더니 누군가 기숙사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하는 소리는 잠에 막 빠져들려는 찰나의 선현의 심기를 괴롭혔다.

 

'젠장. 누구지?'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계세요?

 

여자의 목소리 였다.

청아하고 고운 그 소리는 귓가를 미묘하게 간질이는 것이 분명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잠을 방해하는 것이 그 누구든 그에겐 누구나 불청객이다.

 

딩동-.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는 거 다 알아요.

"으음!"

 

신음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는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방문객은 초인종을 더욱더 요란하게 눌러댔다.

덕택에 그는 조금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없는 척 하지 말고 빨리 나오지 그래? 안나오면 처들어 간다?

 

젠장, 무슨 애냐? 철부지 어린애들이나 할법한 짓을 골라하게?

방문객에 엄포와 연신 그의 귓가를 후려치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이 솟구친 선현은 기어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선현은 한소리 해주겠다는 생각을 품고는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다.

 

"대체 무슨 일 인진 모르겠지만…!"

"와! 드디어 문이 열렸다. 당신이 선현?"

"……."

 

문 너머의 손님은 풍성한 백금발이 인상적인 백인 소녀였다.

그런데 그 소녀는 선현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질문을 던졌다.

선현으로썬 기분이 심하게 상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심신이 피곤한 상태로 조금은 휴식이라는 것을 취하고 싶은데 불청객은 미소로 싱글벙글해진 표정으로 선현의 얼굴을 볼뿐이다.

헌데 이 여자의 태도가 굉장히 친근하다.

선현으로선 오늘 처음 보는 여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쪽은 원래 성격이 이렇게 붙임성이 있는 것인지 확실히 실례임에 틀림없음이 분명한데도 이렇게 겁을 상실한듯한 태도로 대담하고 요란하게 초인종을 누르며 선현을 불러냈다.

그는 모든 의심과 의혹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과 흥미를 담아서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실례합니다만 누구신지요?"

 

라고 눈앞의 불청객 소녀에게 말을 건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말은

 

"오! 유투브 스타가 여기 있네?"

"……."

 

선현이 보기에도 이 백인 소녀는 어딘가의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어설픈 한국어 대사를 흘렸다.

억양과 뉘앙스가 능숙한 모습이 제대로된 한국어도 상당히 구사할줄 아는 듯 했다.

이를 증명하듯 선현이 아무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자 뒤이어 튀어온 말은 현지인과 다를바 없는 한국어 였다.

 

"나말이야? 누군지 모르겠어?"

"전혀."

"진짜로?"

"예 정말로 모르겠습니다만?"

 

소녀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특유의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는 갑자기 몸을 날려 선현의 목을 양팔로 휘감아 매달렸다.

금발 소녀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반응에 선현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반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놀라해 하거나 은연중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선현은 그동안 겪어온 일들이 많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흐으응-. 이래도 모르겠어? 우리 함께 뜨겁고 정열적인 밤을 지냈잖아. 응? 지치지도 않고 말이야. 난 피곤해서 쓰러질거 같았는데 놔주지도 않고…. 내사정일랑 신경쓰지 않은체 몇 번이나 날 곤란하게 만든 줄 알아? 응? 힘들었다구. 우웅-."

 

소녀는 무언가에 취한듯한 탁 풀린 표정으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이 경험이 많은 소년은 눈을 껌뻑 거리며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뿐이었다.

보통 동년배의 소년이라면 "오! 이것이 웬떡이냐?" 하며 달려들었겠지만 선현은 불쾌할 뿐이었다.

사실 이것도 그가 인내심을 발휘할대로 발휘한 상태이기도 하다.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예상했던 반응이 없어서 일까?

소녀는 뾰루퉁해진 얼굴로 소년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었다.

 

"쳇, 뭐야? 재미없게. 가지고 노는 보람이 없네?"

"…가식, 입니까?"

"알게 뭐야? 왜? 사실은 속으로 엄청 꼴린거냐? 아니, 그것보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계속 밖에다 새워둘거야?"

"흐음-!"

 

신음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짚은 선현은 몸을 한쪽으로 비켜 세웠다.

그것을 보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소녀는 턱을 치켜 세우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을 깔보는 듯한 그 모습에 선현은 더욱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가 방안에 들어가고 난후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잠깐 복도쪽에 고개를 내밀은 선현은 관성 엘리베이터쪽으로 향해 있는 복도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그가 벌인 엘리베이터 내에서 약 삼십명 가량의 학생들을 병원으로 보내버린 그 사건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선현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 침대에 걸터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슥 하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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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네?"

 

유스티나는 방 주인더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선현에게는 그녀의 아담하다는 감상이 네놈의 방은 좁아 터졌다 라는 의미를 돌려말한 것

그는 의자를 돌려 맞은 편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풍성한 백금발, 하얀 피부, 푸른 눈을 지녔지만 단순히 백인 소녀로 보기엔 이목구비의 선이 다소 부드러웠다.

금발벽안의 서양인이면서 동양인의 특징을 가진 혼혈. 이라고 해야하나?

마치 그녀처럼….

 

"그런데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단 거야?"

"예?"

 

'그녀'에 대해 생각에 잠길려고 하던 차 백인 소녀가 말을 걸어온다.

백금발에 당당함이 역력한 얼굴, 다부진 몸매는 여장부 답다.그가 아는 '그녀'의 청순하고 여린 모습과는 정반대다.

그런데 대체 이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입고 있는 교복도 적어도 이과계통에선 본적이 없는 교복이다.

문과쪽 학생인가?

헌데 어째서인지 눈 앞에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나가다 눈이라도 마주친?"

"정말 모르는가 봐?"

 

잠시 머리를 긁적인 그 소녀, 유스티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때 고속도로에서 싸웠던 일 기억나?"

 

잊을 리가 있겠는가?

그때의 그 사투를 말이다.

난생처음 그는 단 한명을 상대로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적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갑옷을 입은 여자가?"

"맞아. 그게 나야."

 

대답을 하고는 그녀는 킥킥 거렸다.

 

"그나저나 넌 대체 정체가 뭐냐? 깡마른 몸으로 보이는데 그런 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다름대로 무술로 단련한거 같은데, 하여간 넌 뭐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갈비 뼈따구야? 벤치프레스는 10kg은 들 수 있냐? 스쿼트는 한 30kg 는 들 수 있고?"

 

대체 이 여자 뭐하러 여기 온거야?

리턴매치라도 신청하러 온건가? 그런거라면 상대해주겠지만 상대는 별다른 적의도 없는 거 같다.

싸우러 온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방까지 찾아와서 귀중한 휴식시간을 갉아먹는 건지.

최대한 화를 참으려 했던 선현이었지만 그는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난데없이 찾아와서 이따위 독설을 해대는 사람은 지구상의 그 누구라도 반가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봐요. 그전에…. 아니 잠깐! 당신 뭐하는 거야!"

 

말을 하려던 차 어느세 유스티나는 선현의 등 뒤로 돌아가 그의 어깨를 만지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의아함과 함께 감탄이 떠올랐다.

 

"호오?"

"대체 지금 뭐하자는!"

"좀 기달려봐. 신기해서 그래. 달리 이상한 마음 없어."

 

말을 마친후 그녀는 선현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깨서부터 시작해서 견갑부위, 등, 가슴, 복부, 팔, 허벅지 등등

다리 사이 예민한 부분 빼고 거의다 만지작 거린다.

부위를 바꿔가며 선현의 몸을 만질때 마다 유스티나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체 접촉이 이정도에 이르르면 성추행이 되는 법.

제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선현이지만 앵간한 사람이 아닌 한 참는 법은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선현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아니, 이 정도까지 와서 참는 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겠지만.

 

"이제 그만 하시길 빕니다."

"아잉. 왜 그래? 자기도 좋으면서. 웃흥~."

 

그렇게 대답하고는 유스티나는 한쪽 손을 선현의 다리 사이 가운데 중요한 부분 쪽으로 천천히 가져갔다.

선현은 눈을 지긋이 감았는데 그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눈에 띌정도로 튀어나왔다.

선현으로선 인내에 인내를 짜내어 최대한 정중하게 말한 것인데 상대방의 반응이 이따위니 더 이상 참아줄수 없었다.

마음속 구석에서 살의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더 이상 참았다간 고혈압으로 쓰러져버릴 것이다.

아니 여기서 참는 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얄밉게도 그가 분노를 폭발할려고 하려던 즈음 강한 살기를 느낀 유스티나는 선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외로 몸이 실하네?"

"당신은 대체!"

"아, 미안. 실례했어.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탐구심이 발동했지 뭐야?"

"당신이 지금 하는 말이 제대로된 핑계였으면 좋겠군요?"

"미안해! 정말로…. 하지만 정말 신기한걸? 가끔가다 나온다는 마른 역사(力士)를 여기서 보게될 줄이야?"

 

보통 사람의 힘은 그 사람이 지닌 근육의 양에 비례하는데 가끔가다 겉으로 볼때나 수치상으로나 분명 마른 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이란과 인도 지역에선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육체 단련법을 익힌 마른 체형의 사람이 양팔에 한명씩 성인 남성 둘을 올려놓고 아무렇지 않게 버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깐 한말 취소!"

"으으윽! 당신은 정말인지."

"왜? 혹시 신체의 특정 부위가 딴딴해진거야?"

"그만!"

"해행! 부정하는 거 보니까 정말인가 보네?"

"알았으니까 이제 정말 그만 하시죠?"

 

그러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몸을 앞으로 수구린 다음에 보란듯이 교복 셔츠를 아래로 살짝 당겼다.

그 사이로 브라에 감싸인 그녀의 가슴의 일부가 보였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보이는 그 육중함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때? 내 가슴 크지? 한번 만져볼래?"

 

선현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동시에 뱃속이 화끈 거리는게 위에서 위액이 분비되는 모양이었다.

지금 그녀와 나눈 대화가 그의 스트레스 수치를 더욱더 축적시킨듯 했다.

 

'이런 쌍년이!'

 

유스티나는 그런 선현을 보고 뭐가 재미있는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모를 승리감에 고개를 치켜올린 유스티나는 다시 몸을 정리하고는 침대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이 이상 자극했다간 폭발해 버릴라.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

"빨리해"

 

1초라도 빨리 유스티나가 사라지길 원한 선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 잘싸우던걸? 그리고 제법 특이한 능력을 지녔고 말이야. 덕분에 빌어먹을 쪽빠리 야쿠자들이 더러운 음모를 꺽을 수 있었고 납치된 여학생들을 구출해낼수 있었어. 덕분에 학생자치위원회의 윗분들 중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 분들이 있더라? 뭐 너스레가 길었긴 한데, 난 위원회를 대신에 너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려 왔다. 우선 학생자치위원회와 그 하위 기구인 풍기단속반은 이번 일에 대한 답례로 너에게 사례를 주기로 했어."

 

그녀는 등에 매고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툼한 종이봉투 두 개인데 아마도 그 내용물은 돈다발 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 요인 까지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버렸어. 사례금은 반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이 개자식아!"

 

그러고는 봉투 하나를 다시 집어 넣는 유스티나였다.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봉투의 두께로 봐선 그 정도만 해도 액수는 상당할 것이다.

 

"필요 없어."

 

유스티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돈. 있으면 좋잖아?"

"그런게 아니야."

"뭐? 그래? 하지만 정말 필요하지 않아? 주머니 사정이 좀 궁핍하다고 들었는데?"

 

선현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필요 없어."

"정 그렇게 나온다면 좋아. 이렇게 하도록 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무슨 헌신짝처럼 돈이 들은 봉투를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던졌다.

 

"제법 액수는 되지만 나에게도 딱히 필요는 없으니까."

 

돈봉투를 쫏는 선현의 시선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것을 태워먹든 하수구로 흘려버리든 너의 마음이야. 난 필요 없어."

"……."

"그리고 두 번째 제안. 단속반과 계약을 맺지 않을래?"

"계약?"

 

유스티나는 다시 가방에 손을 가져가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뒤적거리고는 서류철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들을 펼쳐보이며 그중 몇장인가를 꺼내어 선현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봐."

 

선현은 그 서류를 받아들였다.

첫 페이지를 속독으로 읽어 들어간 그는 얼마 안있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 서류 상의 내용은 별거 없어. 저 종이쪼가리는 계약의 증명일 뿐이지. 그 종이에다 서명하게 된다면 넌 계약형 풍기단속반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중에서 특수한 상황에 투입되는 강력 단속반 '어벤져'에 소속되어 의뢰가 들어오면 그것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받는 거야. 자랑스러운 로엔의 수호 기사가 되는 거지! 덤으로 검은색 베레모와 휘장, 그리고 멋지구리한 레이피어 검 한 자루를 받아. 뭐 그것 뿐 안이 아니고 이거 외에 학자지원이라던가 기타 학생 복리위생적인 측면에서 많은 혜택을 받을수 있어. 어때 한번 해보지 않을래?"

"거절한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왜? 이유는?"

 

서류더미를 덮은 선현은 유스티나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이유를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듣고 싶은 걸?"

"내가 한말을 제대로 못 들었나?"

"어찌됬든 듣고 싶어. 그 이유란게 무엇인지?"

 

잠시 유스티나의 얼굴을 주시하던 선현은 한숨을 쉰 다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들고 있던 서류들은 책상위에 아무렇게나 대충 던져놓고는 일어나서는 침대로 다가갔다.

깜짝 놀란 유스티나는 침대로 다가오는 그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현은 그녀를 신경을 쓰지 않고 침대에 돌아 누었다.

그런 안하무인 적인 태도에 화가났는지 유스티나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봐. 정말 말 안할꺼야?"

 

선현은 대답을 대신하여 이불을 끌어 당겨 몸을 덮었다.

그녀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그로선 더 이상 할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잠을 청하려 했다.

그렇게 잠시 선현을 내려다보던 유스티나는 한숨을 쉬더니,

 

"하아. 뭐 좋아. 너 대로 이유가 있겠지."

 

그녀는 침대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양 무릅 위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으로 볼을 받쳐 턱을 괸다.

그런 자세에서 잠자는 선현을 주시하던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위쪽 방향으로 쓰다듬어 올린 다음 머리칼을 등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녀는 팔짱을 낀 자세를 취했다.

 

"좋아. 그럼 내 정체 말해주겠어. 내 힘의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유스티나는 자세를 풀었다.

한쪽 손은 무릎을 잡고 다른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그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어번 툭툭 건드리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유스티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백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발키리다."

 

그 한마디를 내뱉은 후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뭔가를 손쉽게 풀어내어 말하는 재주가 없는 모양인듯 했다.

 

"에, 저…. 그니까 발키리가 뭔지는 알지? 안다고 생각하고 말할게. 앞서 말했듯이 나는 발키리야. 아스가르드의 주인, 신중의 신이자 영적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오딘의 이름으로 천상의 힘을 받아 신을 위해 싸우는 게 목적이지. 발키리로 간택되면 발키리로서의 힘과 이름을 부여 받아. 내가 받은 발키리로서의 이름은 브룬힐데. 부여받은 힘은 천상의 광휘 라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그 힘을 난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어. 뭐 그거 외에 여러 가지 기능과 신들의 축복이 있어서 지금까지 잘도 버텨온 것이긴 하지만. 그때 네가 본 나의 모습은 발키리로서 그 힘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갑주를 착용했을 때의 모습이야. 그게 완전체의 모습이지."

 

잠시 말을 끊고는 숨을 한번 내쉬고 들이쉰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힘을 처음 받았을때 나는 무척이나 혼란 스러웠어. 대체 왜 나에게 이런 힘이 주어졌을까? 왜 한 소녀에게 이런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힘을 쥐어졌을지에 대해 말이야. 하지만 말이지. 난 그때 그것을 봤어. 힘없는 약자가 무력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힘있는 자에게 짓밟히는 것을 말이야. 난 그때 TV에서 한 여성을 겁탈한 어떤 정치인이 권력과 돈의 힘으로 법망을 벗어나 여전히 활동하는 것을 봤어. 알고보니 그 자는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바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하의 개 썅놈이더라? 자본과 결탁하고 폭력조직을 끌여들여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거칠게 부수고 치고 올라가는 그런 놈이었어. 때문에 난 참을 수 없었지. 내가 발키리로서 그 힘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난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검을 휘둘렀어. 내게 있어서 그것은 첫 살인이였어."

 

선현은 아무래도 반응이 없었다.

진짜로 자는 모양이었다.

유스티나는 왠지 굉장히 어색하다고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전신엔 죽은자의 피로 흥건했어. 땅바닥에는 피의 강이 흘렀지. 그 가운데에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한 늙은 남자의 시신이 널 부러져 있었어. 마치 거짓말 처럼 말이야.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 아마 B급 좀비 영화가 더 리얼 했을 껄? 첫 살인의 혼란 속에서 난 그 자리를 떳고, 그 후 그 정치가의 철권에 눌려 있던 검찰, 경찰, 기업체, 폭력조직들이 들고 일어나 그 나라의 정계와 재계는 한때 혼돈에 휩싸였어. 수많은 사람들이 교도소로 들어갔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을 매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투신 자살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오명을 뒤집어 썻던 사람들은 사면되거나 그 숙원을 풀 수 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당시의 한국 정치계가 좀 더 투명해지는 개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어. 폭군의 죽음으로 그 나라는 좀더 밝은 희망찬 내일로 나아갈수 있게 되었어."

 

계속해서 선현의 눈치를 보는 유스티나.

하지만 그는 진짜 쥐 죽은 듯이 잘 뿐이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건 약과야. 그 나라에서의 일은 애교에 불과해. 다른 곳에선 그곳과 비교할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지금도 전 세계에선 비극이 계속되고 있어. 소말리아나 시에라리온을 비롯해 아프리카 곳곳에선 지금도 수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타의에 의해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해. 중남미에선 FARC 같은 군벌들이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목으로 마약 카르텔과 결탁해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어. 강대국들과 대기업들은 여기에 편승하거나 이를 조장해서 더욱더 이득을 올리고 있고 말이야. 그 밖에 중동,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선 악이 활개치고 선량한 사람들은 오늘도 그 굴레에 깔려 신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해서 말이야. 누군가는 이 딜레마를, 끝없이 이어지는 이 검은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야해. 사람들이 밝은 내일을 볼 수 있도록!"

 

그녀는 그녀 스스로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불어넣었다.

그 힘에 의해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우리 주변을 봐. 적어도 로엔 만은 말이지. 초창기 학문의 상아탑으로 칭송 받고 지상의 강림한 유일한 유토피아로 찬양받던 로엔은 이제 태평양 한 가운데 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범죄조직이 거쳐가며 테러조직들의 목표가 되었어. 할렘구역은 범법자들과 사회 낙오자, 매춘부들이 몰려든 지옥 그 자체야. 이것뿐만이 아니라 다국적 채권단을 구성한 기업들과 경제적 선진국들은 여기서 조금이라도 이권을 얻어내기 위해서 암암리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어. 그 와중에 사람이 죽어가. 로엔은 이미 베트맨에 나오는 고담 시가 된지 오래야. 난 신이 내려준 이 힘을 이용해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 힘의 목적을 세상의 악을 없애는데 사용할 것을 결의했어. 로엔을 시작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뿌리 뽑을 것이야. 그러면 세상은 다시 평화롭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질수 있어! 인간의 손으로 유토피아를 만드는거야."

 

부스럭 거리며 선현의 몸이 꿈틀 거렸다.

단순한 잠버릇 이겠지.

말을 이어가며 스스로가 던진 말에 도취된 유스티나는 그 순간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얼굴에 자조의 웃음을 띄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천상의 힘이라고는 해도 나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 내게 주워진건 성스럽고 위대한 것이지만 일개 개인이 가진 힘에 불과해. 거대한 흐름을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특히나 요즘엔 그것을 너무나 절실히 느껴. 때문에 난 내 스스로에 대해 지금까지 지켜왔던 나의 정의에 대해서 슬슬 회의가 들고 있어. 처음 이곳에서 검을 빼들었을때와 달리 내 의기는 점차 시들어 가고 있는거 같아. 이따금 조용히 평범한 학생으로서 지내고 싶기도 해. 아마도 지친 것이겠지만."

 

유스티나는 고개를 다시 돌려 침대에 누은 선현을 보았다.

 

"세상은 강한 자의 힘을 조금이라도 필요로 하고 있어. 넌 강하잖아? 안그래? 나를 도와다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을... 무모하지만. 이 세계에, 적어도 로엔 만큼은 악에 물들지 않게 해다오."

 

한숨 정도 잠깐 말을 멈추더니 그녀는 이어서 호소하듯 외쳤다.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씨끄러, 그만해!"

 

선현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을 젖히며 몸을 일으킨 선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뭐야? 잠들어 버린 거 아니었어?"

 

선현은 유스티나의 두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네가 어떤 판단을 해왔을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나로썬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봤을때 너는 너의 힘으로 네가 맨 처음 죽인 정치가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 건진 몰라도, 설령 네가 한 말이 옳다고 해도 나는 유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일은 아마 없을거야. 그럼 난 이만 실례를."

 

할말을 다하고 선현은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렇게 까지 나오니 더 이상 할말이 무색해진 유스티나는 어깨를 으슥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스티나는 잠자리에 든 선현을 내려다 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너는 우리와 함께 일할 마음은 없나보구나. 뭐, 좋아. 계약 서류는 두고 가지."

 

그렇게 말하고는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무언가 짤막하게 적은 유스티나는 그것을 책상위에 두었다.

 

"연락처도 남기고 갈게. 왠지 그럴일은 없을거 같지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전화해줘. 그럼 난 간다.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백금발의 소녀는 방에서 사라졌다.

저주받은 섬, 죄인들의 도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없에 지상에 평화를 안겨주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투신한 검을 쥔 아름다운 소녀.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이곳은 그에 못지 않은 심한 나락인거 같다.

과연 여기서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닥쳐올것인지.

거기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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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중에 수정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뒷부분은.

 

하여간 릴레이 첫 이벤트는 이렇게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