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장편
2020.06.05 22:04

농부와 소녀 - 1화

조회 수 232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평범한 오후였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황금빛 들판은 더할 나위 없었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물어가는 곡식들이 바람에 맞춰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솟아올랐다.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장치에 손을 가져갔다. 네모난 버튼 세 개가 투박하게 붙어있었고 손바닥만한 장치다. 흙이 잔득 묻은 투박한 손가락이 가운데 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장치에서 손을 떼고 땅에 떨어진 가죽배낭을 들어올렸다. 그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서 동그란 화면이 전면을 뒤덮은 장치를 꺼냈다. 손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리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응시했다. 그가 잡고 있던 화면에서 세 가지 메세지가 출력되었다. 그는 고개를 내리고 메세지를 확인했다.

 

"흐음."

 

그가 배낭을 등에 걸치고 조금 전 응시했던 지평선을 다시 쳐다봤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 들판의 지평선 끝에 구불구불한 물체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규칙하게 흐물흐물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 때문에 기묘하게 보이던 그 물체가 점점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변하며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남자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있던 장치를 잡고 있었다. 그것의 빨간 버튼 위에 엄지가 누를 듯 말듯하게 걸쳐있다. 녹색 눈은 계속 지평선에서 다가오는 은빛 물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물체 뒤로는 그것보다 훨씬 큰 먼지바람이 일고 있었다.

 

순간 딸각하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 은빛 물체, 아니 순식간에 수십 미터 앞까지 날아오고 있던 은빛 드론의 옆구리로 무엇인가 날아와 관통해버렸다.

 

균형을 잃은 드론이 들판에 처박히면서 곡식들이 뽑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멈추자 남자는 드론이 추락한 위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자라난 곡식들을 헤치며 걷다보니 드론이 추락하며 남긴 흔적이 선명히 드러났다. 남자는 뽑혀버린 곡식들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마침내 발견한 은빛 드론은 구멍 뚫린 부분이 검게 그을린 채 처박혀있었다. 크기는 곰과 비슷한 크기였다.

 

"."

 

남자는 잠깐 동안 드론을 쳐다보며 서있었다. 그러다가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다시 드론을 쳐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잠깐 동안 찌푸려졌다. 그 후 가방 속에서 그가 꺼낸 물건은 이 평화로운 들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저 드론도 이 들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긴 하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ESF라는 이니셜이 적힌 군용 절단기였다. 단순한 레이저 절단기가 아니라 군대에서 야전용으로 만들어진 고출력 플라즈마 절단기이다. 남자는 권총 손잡이처럼 생긴 부분을 손에 쥐고 드론으로 다가갔다. 손잡이 위에 손바닥만하고 네모난 금속이 진압봉과 비슷한 길이로 늘어났다. 그리고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네모난 금속 주변으로 붉은 빛의 플라즈마가 날처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때 드론의 머리 부분이 들썩이더니 빨간 빛이 들어왔다. 머리 부분은 곤충의 머리처럼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드론의 시선은 군용 절단기로 고정되었다.

 

남자는 드론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드론은 남자와 절단기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기 시작했다. 흡사 짐승이 도살당하기 직전에 공포에 질린 것처럼 말이다.

 

그 드론 도살자, 아니 남자가 드론 앞에 섰다. 그리고 드론은 여전히 머리를 움직이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가 절단기를 내려치고 드론의 머리 부품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남자는 절단기를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발 앞에 떨어져 있는 드론 머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시끄럽네."

 

남자는 약 한 시간동안 절단기로 드론을 토막 내면서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드론의 코어 부분을 찾아내어 분해하기 시작했다. 손톱만한 칩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방 속에 있던 동그란 장치를 다시 꺼냈다. 그 장치의 뒷부분은 드론 코어칩과 딱 맞는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그는 코어칩을 장치에 집어넣었다.

 

몇 분 뒤, 화면에서 몇 가지 정보가 표시되었다. 그가 분주하게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여러 가지 정보와 숫자들이 나열되었고,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코어칩을 분리하고 드론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절단기의 플라즈마로 코어칩과 머리를 두동강 내었다.

 

하늘은 서서히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두개의 태양이 지고 있다. 남자는 허리춤에 있던 장치에 손을 가져갔다. 녹색 버튼을 누르고 난 후,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로.

 

"하필 수확 철에 난리야."

 

어느새 그의 등 뒤로 작은 호버바이크가 다가와 멈췄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호버바이크에 올라탔다. 들판 위로 낮게 날며 도착한 곳은 여전히 들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금속 기둥이 하나 서있었다. 그는 호버바이크에 탄 채 기둥 앞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기둥이 뒤로 누우면서 아래에 있던 금속 바닥이 열렸다. 제법 큰 입구 속에 경사진 통로가 드러났다. 지하로 통하는 곳이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그러나 기둥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 지하 통로는 다음날 해가 뜨고 한참 지나서야 다시 열렸다. 남자가 이번에는 걸어서 나왔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지만 표정은 한층 더 심각해져 있었다.

 

푸른 하늘 위에는 대기권 너머로 수많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보이는 폭발과 작은 빛이 푸른 하늘 속에서 이질적으로 보인다. 이런 외딴 행성의 궤도에서 함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온 우주가 식량이 부족해져서 이런 곳의 작물까지 가져갈 상황이 아니면 말이다.

 

심란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던 남자의 눈이 어느 샌가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하늘에 생겨난 하얀 궤적이었다. 작은 함선 한척이 대기권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문제는 남자가 있는 이곳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