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조회 수 2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응?"

달려들려다 멈춘 나는 가까스로 체내의 오러를 바로잡으며, 멍청한 표정으로 문제의 예티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안젤리카도 어느덧 황당한 얼굴이었다.
녀석의 얼굴은 내가 겨울에 싸웠었던 그 흉악한 놈의 눈빛이 아니었다. 얼굴은 평온했고 눈망울은 순수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작은 예티를 주시하면서 물었다. 예티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손을 들며 말했다.

"안뇽."
"그, 그래. 이름이 뭐야?"

인사구나.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예티에게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다시 한 마디했다.

"안뇽?"
"아니, 이름."
"웅... 안뇽."
"..."

이제야 깨달았다. 녀석이 할 줄 아는 말은 그 단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 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안젤리카를 뒤돌아 보니, 어느새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푸하하하. 긴장한 우리가 디게 바보 된 거 같다 아니가?"
"그래도 안젤리카. 예티잖아. 조심해야지."
"아르펜 니 저 눈빛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나는 안젤리카가 가르키는 검지 끝을 따라, 예티의 두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잡티 하나 없이 동그란 눈망울. 그것은 정말 진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티 없이 맑은 눈빛이었다. 그걸 본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목숨을 위협했던 그 괴물 때문에 모든 예티들이 그러할 것이라는 내 고정관념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풉... 자꾸 그렇게 서로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거가?"

얼 빠진 내 표정과 백치같은 꼬마예티의 모습을 번갈아보던 안젤리카는 한참 전에 긴장을 놓은 모습이었다. 더 이상 위협하니까 다가가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

안젤리카가 자신의 한손을 검지로 짚으며 말했다. 

"손."

따라 말하는 예티. 그 말을 들은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 말할줄 아는구나. 안젤리카는 계속해서 소통을 시도했다.

"발."
"발."
"머리."
"머리."
"안젤리카."

이번에는 자신 전체를 가리키며 이름을 유도하는 안젤리카였다. 그녀는 그 손짓 그대로를 예티에게 향하며 물었다.

"니는...?"
"웅...안젤리카?"
"푸핫. 그냥 뇽이라고 해야겠다 니는."
"뇽?"

계속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따라 말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꽤나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니 이름은 오늘부터 뇽이다. 알았재?"
"응. 이름, 뇽."

뇽이라고 칭한 이 문제의 예티 녀석은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개뿔도 모르면서 이해하는 느낌이었다.
감정이 표정에 확연히 드러난다는 특징은 큰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았다.

생각해보면 이 예티라는 녀석들에게 이름이란 게 존재하긴 하나 싶은 의문도 들었다.

"아이고 잘했다, 잘했어!"

하지만 그 모습이 안젤리카에겐 너무나 귀여워보였나보다. 환하게 웃으며 뇽을 격하게 껴안는 그녀였다. 지켜보던 나는 놈의 표정을 보고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체격의 위치 차이로 인해 녀석의 얼굴이 안젤리카의 가슴에 파묻힌 형국이었는데, 똘망하던 눈은 가늘어졌고, 입이 아주 귀에 걸려 있었다. 이거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위험하니까 그러진 말아, 안젤리카."

보다 못한 내가 안젤리카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해서라고 말은 했다만, 사실은 그녀의 연인인 내가 더럽게 못마땅해서였다.

"아따, 있어 봐라. 요놈 요거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똘망하네잉. 사람 말 금방 배우겠다."

말을 마친 안젤리카가 뇽이라 이름 지은 예티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계속해서 말을 붙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던 내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근무중이잖아.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서 가시죠, 사.수.님."
"옴마야. 그렇네. 헤헤."

그제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내려가려는 안젤리카였다. 이 귀여운 놈에게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보다.

"그나저나 얘는 우짜노?"
"그러게."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턱에 짚었다. 물그러미 우리를 쳐다보며 따라오고 있는 뇽.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체구가 작고 전혀 다르다고 하지만 예티라는 존재가 주는 공포심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깐 말이다. 특히나 실제로 출현했던 우리 소초의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일단 근무지로 가서 메이아 상등병이랑 얘기해보자. 저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일단은 침입자(?)니까."
"그래. 그러자."

하는 수없이 나와 안젤리카는 한 마리의 불청객을 붙인 채 경계로를 따라 걸으며 다음 근무지에 도착했다.

"너네들 왜 이래 늦었..."

짜증이 난 어조로 쏘아붙이려던 메이아 상등병은, 우리 뒤에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바라보고 있는 미지의 생명체를 보고선 순간 얼어붙었다.

"그건 뭐냐?"
"아. 애완동물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그녀의 채근에, 나는 아마도 녀석이 왔을 경계로 바깥을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마도 경계로 바깥일 겁니다."
"아마도?"
"근무지 이동 중에 만났거든요."

따지고보면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내 말에 메이아 상등병은 꽤나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황에 방점을 찍었다.

"뭐 말하자면, 침입자죠."
"꼭 어디서 짬멧돼지 새끼 주운 것 같은 말툰데?"

메이아 상등병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새끼인 건 맞지 않을까?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우리 입장과 지금 분대 근무자들을 총괄해야 하는 메이아 상등병의 입장은 천양지차라는 것을. 내가 아무리 유능한 병사라지만 까부는 것은 여기까지가 적당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렇게 되서 아무리 봐도 적의도 없어 보이는 녀석이 따라오는 상황이라, 메이아 상등병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일단 한번 보자, 그 예티라는 놈."

어느새 메이아 상등병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지난 겨울의 전투 당시 그녀는 비번이었기 때문에 예티를 직접적으로 볼 일은 없었다.
나는 초소 아래를 바라보았다. 우리 뒤에 있었던 뇽은 어느새 사다리에서 초소의 기둥 사이 사이를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무척 날렵했다. 안젤리카가 녀석을 불렀다.

"뇽!"
"우웅?"

그러자 고개를 돌려 안젤리카를 바라보는 뇽이었다.

"참 나. 그새 이름까지 지었냐?"

어처구니 없어하는 메이아 상등병을 뒤로 한 채 나는 뇽에게 손짓하며 이리로 유도했다. 녀석은 다시 사다리로 옮겨타고선 성큼성큼 올라왔는데, 너무 말을 잘 듣는 것 같아 보는 우리가 황당할 정도였다.

"인사해라."

안젤리카가 메이아 상등병을 가리키며 손을 흔드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녀석은 안젤리카와, 메이아 상등병 둘 사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뇽?"
"..."

우리 둘은 내심 조마조마함을 느끼며 메이아 상등병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거의 남자같은 성격의 그녀가 당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의 그런 고민은 금세 기우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뭐야. 미친...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어느새 메이아 상등병의 표정은 뇽을 처음 본 안젤리카와 닮아 있었다. 몸을 파르르 떨면서 뇽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녀석을 확 껴안았다.

"도저히 못 참겠네. 꼭 우리 늦둥이 막내 동생 같잖냐."
"그, 그렇습니까."
"진짜 확 깨물어버리고 싶다."

시원시원하면서도 깐깐한 성격의 메이아 상등병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와 안젤리카는 서로를 마주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낯선 한 인간에게 숨이 막힐 기세로 껴안긴 뇽이 신음하듯 꺼내든 한 마디에, 초소에서 아주 쓰러질 뻔했다.

"시부럴."

아까 안젤리카는, 뇽에게 이런저런 말을 가르치면서 욕도 가르쳐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