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조회 수 2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iIEy6co.jpg


"지낼만 합니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을 던진 내가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라이칼에서만 나는 찻잎을 우려낸 차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풍미와 여유로움이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 하지 않았다.

"생활은 어떻게 하냐? 진짜 신병 때 대가리 박고 그랬냐? 아이스 트롤도 막 나온다면서? 날씨 많이 춥냐?"
"하하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알타바르를 바라보았다. 마치 참아왔던 호기심을 다 분출하려는 모습이었다. 식사를 할때 얼마나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을까? 하는 생각 마저 들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얘기 하죠."

호기심으로 한껏 달아오른 알타바르에게, 나는 훈련소에 입소할 때부터 시작해, 최전방의 소초로 전입하여 고달픈 경계지에서의 이등병에서 일등병이 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나와 눈을 맞춘 채 경청하는 알타바르의 반응은 정말 볼만했다. 힘겹게 신병생활에 적응하던 때에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안타까운 표정을, 선후임이 한데 어우러져 여가시간을 즐기는 부분에선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다.

"혈기왕성한 남녀 여럿이서 타우로스 타기도 하고 군대 참 재밌는 곳이구나."
"뭐, 그런건 실낱같은 낙이죠. 대부분은 훈련이랑 경계, 제설만 하고 지내니까요."
"그런데 안젤리카라는 일등병, 예쁘긴 예쁜가보네? 그 여자 이름 말할 때마다 너 입이 귀에 걸렸어."
"그, 그런가요?"
"그래 임마. 내가 너를 모르겠냐. 어떻게, 꼬셨냐?"

알타바르가 히죽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러왔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뒤로 신병딱지를 뗄 무렵, 고블린들과의 실전이 있었죠. 그때 독에 걸려서 죽을뻔했습니다."
"진짜냐. 햐. 장난 아니게 무시무시했었나 보네."

실전 이야기가 나오자 알타바르가 관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다시 경청했다. 매년 열리는 아르고니아 무술제에서 항상 수위를 다투는 그였지만 아직까지 실전을 치르진 못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근차근 생각을 짚으며 과거를 거슬러내려가며 소초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힘들었지만, 가치 있고 기억에 아롯이 새겨지는 기억들이다.
율라 중사와 만나 이지스교에 입교한 것. 급수장에서 샤린과의 만남. 탈영병 사건이 내 입에서 물 흐르듯이 나왔다. 듣고 있던 알타바르는 마치 할머니 옛날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어린아이처럼 하염없이 내 이야기만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여기야 눈도 잘 안오는 따뜻한 곳이지만, 최전방은 미칠 듯이 춥죠."
"실감이 안나네. 그렇게 춥냐?"
"혹한의 계절이라고, 겨울 중의 겨울이라는 2주 정도의 기간이 있죠. 그땐 깜빡 졸아도 동사한답니다."
"으아..."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지, 알타바르가 몸을 감싸쥐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 또한 그 때의 겨울이 떠올랐다.
손가락과 발가락엔 아무런 감각이 없었지.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근무를 설 때면 빨리 끝나고 라파 상등병이 해준 따끈한 국요리를 먹고 따뜻한 생활관 안에서 모포 덮고 눕고 싶은 마음만 들었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늘어놓던 나는, 어느덧 이등병 생활의 클라이막스나 다름 없는 사건을 말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올해 2월의 일이었죠."

짧게 한 마디한 내가 예티와의 사투를 떠올렸다. 아찔하다는 단어만 떠오를 뿐이었다.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예티가 습격해왔습니다."
"예티? 아니 잠깐만... 아르펜 네가 말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예티 맞냐?"
"네. 그 예티 맞아요. 어린시절 치나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속에서 나와 저랑 형님 둘다 이부자리에 오줌 쌌지 않습니까."
"큭. 그래. 와, 믿기지가 않네. 그 예티라니."

특유의 반쯤 감긴 눈매가 눈에 띄게 휘둥그레졌다. 10년 넘게 지내면서도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만큼 놀랐다는 반증이다. 한참 눈을 깜빡이던 알타바르가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다는 눈짓을 보내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티가 2경5로 돌진하던 때에서부터 가까스로 초소를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상황. 놈이 던진 돌의 파편에 투구를 맞은 안젤리카가 실신해 내 눈이 뒤집혔던 때까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라이오 상등병마저 당해버려 그의 방패를 주운 내가 예티와 1:1 사투를 벌이던 부분에 이르자 알타바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진중해졌다.

"...결국 그렇게 해서 예티를 외눈박이로 만들고 가까스로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너도 모르게 오러 테일을 발현했다는 말이지?"
"네. 저조차도 그걸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네요. 거의 제 의지를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맙소사. 흐음..."

상념에 잠긴 채 턱을 짚는 알타바르였다. 그도 불과 19세의 나이에 오러 유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에, 잊혀진 기술이나 다름없는 오러 테일의 언급에 꽤나 놀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짚었다.

"너 정말,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는걸? 이 정도면 소설로 집필해도 대박나겠다 야."
"혹시, 못 믿으시는건 아니시겠죠?"

내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알타바르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야야, 임마. 형이 말했잖아. 나는 누구보다 너를 잘 아는 사람이야. 넌 이런 걸로 절대 거짓말 칠 사람이 아니야. 그럴 재주도 없고."

...마지막 말은 조금 기분이 나빴다.

"오히려 네가 이렇게 변한 이유를 알게 되니 이해가 되서 좋은걸. 사실 그 정도면 아르고니아의 병사들 중 너만큼 기상천외한 경험을 한 놈은 단 한명도 없을 거 아냐."
"그렇죠. 그런데 제 이야기 아직 다 안끝났습니다 형님."
"그러냐? 그렇다곤 해도... 예티 이야기만큼 놀랄만한 이야기가 더 있겠냐? 이젠 아무 감흥이 없을 거야. 돼지고기 맛있게 구워먹고나서 고구마가 들어가디?"

과연 알타바르 다운 비유였다. 
하지만 그는 비유를 잘못했다. 뒤이어 할 이야기는 예티만큼이나 대단한 급의 내용이었으니까.

"언더 프로즌. 아시죠?"
"응, 언더 프로즌? 당연히 알지. 형이랑 너의 10대 때 로망 아니었냐."
"입단 제의 받았습니다."
"..."

알타바르가 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을 은근히 즐겼다. 저 심드렁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남자가 이리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모습은 상당히 아니, 무진장 재밌었다.

"진짜냐?"
"네."
"돼지고기 다음은 소고기였구만 젠장. 자세히 말해 봐."

얼굴까지 들이밀어가며 이야기를 독촉하는 알타바르의 채근에 나는 그 때의 전투에 참전한 언더프로즌들의 요원들이 나와 예티의 사투를 목격했고, 그 뒤 실신한 내가 사단본부에서 치료를 할 때에 단장인 크로서스가 찾아온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됬냐? 승낙했겠지?"
"아뇨. 거절했어요."
"왜? 전역까지 시켜준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알타바르를 바라보던 내가 담담히 말했다.

"예티가 살아남아 우리 소초에 보복할지도 몰라서이기도 하고, 제가 짊어진 의무 때문에 그런 것도 있죠."
"하긴, 분대원들과 그렇게 정붙이며 지냈으면 그럴 법도 하지. 넌 그런 놈이니까."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알타바르였다. 그는 생각에 잠겼는지 다시 턱을 짚고 있었는데, 나 또한 생각할 게 있어 말을 멈추었다. 덕분에 떠들썩하던 방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서였을까, 표정만 보아도 나와 그가 같은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 네가 말하는 짊어진 의무란 게 혹시 영지수호의 의무 말하는 거냐?"
"...네."
"하아, 아르펜. 이 답답한 자식아."

알타바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안타깝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어찌 되었든 너는 우리 가문의 성은을 입어 귀족이 된 입장이니까. 그런데 잘 봐.  귀족양자를 만드는 고아병 제도가 왜 생겨났냐?"
"그거야... 영지의 후계자인 소영주의 입대의무를 대신 하기 위해서가 목적이죠."
"맞아. 넌 이미 입대하는걸로 의무를 진행중이야. 전역하면 의무가 끝나는 거지. 전역을 하고나서도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는..."

알타바르는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긍정적인 마인드의 그였지만, 지금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버님의 궤변이야. 전역하면 의무를 다 수행한건데 물귀신도 아니고 무슨 소리람 진짜."
"..."

할 말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입장에선 알타바르가 우선순위였으니까. 어릴 적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내가 그의 뒤를 지켜주길 바라셔서 그런 당부를 한 것일 테니까.

"너는 새끼야,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네가 귀족이 되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렇게 고생해서 토너먼트 다 뚫어서 귀족됬잖아. 그리고 전역까지 했는데 '아 너 전역했으니 이제 집 지켜라.'라는 소리 들으면 씨발 억울하지도 않냐?"
"형님..."
"의무는 소영주인 내가 지고 있으니까, 너는 전역하고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임마. 나는 내 동생이 자유롭게 세상을 살길 바란다."

하지만 알타바르의 우선순위는 나였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그는 내 하나뿐인 형이었다.

"뭐,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버님을 한번 설득해봐야겠지. 나도 아직까지 소영주의 신분에 불과하니깐 말이야."

알타바르는 다시 의자에 풀썩 앉으며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목소리 속에서 미안함과 분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잘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보면 네가 언더 프로즌으로 들어가는 게 가문엔 이익일 수 있거든."
"듣고보니 그렇군요."
"아무리 라이칼에서 잘나간다고 해도 아르고니아 전체로 보면 우린 일개 지방영지에 불과하니까."

알타바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르고니아 왕실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 중에는, 언더 프로즌 출신이 꽤나 많다고 한다. 워낙 척박한 탓에 능력위주의 인재를 선별해야만 하는 이 나라 태생의 특성이다.
가능성이야 희박하겠지만 영지에 틀어박혀 있기 보단 중앙의 끈을 만드는 게 훨씬 더 낫다, 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뭐, 아직까지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이 형은 네가 그 고리타분한 의무에 신경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무튼 형은 시간이 시간이라 슬슬 가봐야겠다. 휴가 왔으니 마음 편히 푹 쉬어라."

말을 마친 알타바르가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향했다. 그러다, 짐짓 생각났다는 듯 나를 불렀다.  

"참, 그리고 아까 말했던 안젤리카였나?"
"네."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쯤 사귀고 있겠네?"
"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도 않았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를 보며 폭소를 터뜨린 알타바르가 손을 흔들었다.

"전역하면 얼른 영지로 데려와 짜샤. 제수씨 얼마나 미녀인지 얼굴 좀 보자."
"사투리는 적응 좀 하셔야 될 겁니다."
"얼굴이 예쁜데 그깟 사투리 쯤이야."

그렇게 알타바르는, 나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며 문을 나섰다.



***
 


"그 알타바르라는 분. 이야기만 들어도 함 보고 싶다. 사람 디게 좋네."
"아무렴. 내겐 친형 같은 사람인걸."

말을 마친 내가 알타바르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면, 처음이었다. 그가 나 때문에 그렇게 역정을 내던 모습은. 그리고 내가 귀족이 되기 전부터 동생처럼 생각해왔다는 말 또한 처음 들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그 말이 맞았다. 나보다 두살이 더 많았던 그는 언제부턴가 어머님이 운영하던 고아원를 수시로 들락날락거렸었다.
그리고 코찔찔이던 내 주머니 속에 항상 맛있는걸 찔러주었다.

"너한테 얘기하고 나니, 더 보고 싶은걸. 알타바르 형님이."
"그래. 안 보고 싶겠나. 근데 아르펜아."
"응?"

돌아보는 내 입술에, 까치발로 서서 입술을 맞추는 안젤리카였다.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내 멱살을 잡으며 박력있게 말했다.

"다 치우고 지금은 내만 봐라." 
"아, 지금 질투하신 겁니까아~?"

고참만 아니었으면 양볼을 꼬집어보고 싶었다. 
질투심에 볼을 부풀린 모습조차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