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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느냐 아르펜."

무미건조하면서도 엄숙한 대답이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고개를 든 내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아버님인, 라이칼의 영주 카시오 폰 헤임달.
입대 전 흑철 단검을 내게 건네주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한 것 없이 여전히 과묵하지만 진중한 분이셨다.

"안 본 사이에 많이 늠름해졌구나."

곱게 나이가 드셨다고 해야 할까? 단아한 모습을 한 중년의 여인이 애정 어린 어조로 뒤이어 말했다. 
마리안느 폰 헤임달. 라이칼 영지의 안주인이다. 손수 고아원을 운영하며 나를 비롯한 고아병들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신 장본인이다. 인자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영지 내에서도 인기가 높으신 분이었다.
내 친엄마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나에게 있어 엄마같은 존재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나는 쑥쓰러움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나에게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대로야. 너 왜이렇게 몰라보게 바꼈냐? 1년도 안된 사이에 완전히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병사가 다 됬는걸?"
"그렇습니까, 형님?"
"그래. 마치 뭉툭하던 칼날이 살포시 그어도 두동강 낼 예리한 칼날로 바뀐 느낌이야."

내 유일한 형이자 라이칼의 소영주, 알타바르는 대견함과 신기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아버님을 닮아서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확실히 군에서의 10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르고니아의 그 어떤 병사도 겪지 못했을... 무시무시한 경험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 너랑은 초면이지. 인사해 아르펜. 네 형수님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수님."
"제시카 폰 헤임달입니다."

함께 인사를 나눈 나는 앞으로 형수님으로 모셔야 제시카 폰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녀는 키도 제법 컸고 옷태로 들어나는 몸매도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다. 도저히 갓 아기를 낳은 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없던 형수가 생기고, 없던 조카가 둘이나 생기니까 좀 혼란스럽겠구나."
"조금 그렇긴 합니다."

어머님의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알타바르가 보낸 편지 덕분에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과 9개월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적응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아기, 안아보실래요?"

형수님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아기를 안은 팔을 나에게 내밀어 보였다.

"아, 아기를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나는 조심스럽게 양팔을 뻗으며 아기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이제 머리 위에 솜털이 나기 시작한 아기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새록새록 쏟아져 나왔다.
귀, 엽, 다...

"어이구. 누가 보면 무슨 국왕 하사품인줄 알겠네."

알타바르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수에게서 아기를 완전히 안아든 나는 두근거림과 조마조마함을 함께 느끼며 
혹여나 힘조절이 안되서 큰일을 낼까 하는 엉뚱한 걱정이 될 정도로, 아기는 자그마했다.

"태어난지 얼마나 됬습니까?"
"음, 이제 3주 정도?"
"정말 얼마 안됬네요."
"그래 임마. 너 딱 좋을 때 휴가 나온거야."
"아기들 성별은 어떻게 되죠? 이름은요?" 
"네가 지금 안고 있는 녀석이 여자애야. 세나지. 내가 안고 있는 녀석이 남자애, 레이다."
"레이라, 그 녀석 참 큰일 낼 인물이 되겠군요."

나는 피식 웃으며 알타바르가 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3주밖에 안된 아기치곤 무척 커보였다.
레이라는 이름은 헤임달 가문의 역사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르고니아의 영토개척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삼성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본신의 능력 또한 정상급의 오러 유저였기에 가문의 영광을 논할 때 반드시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으아아앙!"

그때였다. 내가 안고 있던 아기, 세나가 갑자기 표정을 찌푸리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어쩔줄을 몰라하자, 제시카 형수가 안은 아기를 위아래로 흔드는 시늉을 하였다. 따라서 아기를 안고 천천히 흔들어 보았다.

"꺄륵."

이렇게나 표정이 바뀔 수가 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던 세나는 금세 웃음꽃을 피며 즐거워했다. 
나도 모르게 입이 귓가에 걸렸다. 이런 순수한 웃음꽃을 내가 당최 언제 봤을까? 생전 없었다.

"녀석, 안고 있는 게 지 삼촌인건 아나 보네."

아버님과 어머님도 흐뭇한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도 금세 아기에게 푹 빠진 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참, 도련님도 블리저드 가드라면서요?"
"네."

나를 지켜보던 제시카 형수가 넌지시 한마디 하자, 내가 화색이 돌아 즉각 대답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당연히 공감대가 있을 수 없었다. 먼저 화제를 꺼내 주는 배려가 고마웠다.

"실례지만 몇사단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전역한지 1년 정도밖에 안됬거든요."
"까마귀 사단입니다."
"와, 저도 까마귀 사단인데..."

뜻밖의 우연에 얼굴에 반가움이 잔뜩 깔린 제시카 형수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선 내 귓가에 대고 한마디했다.

"그 까마귀 할배 아직도 팔팔하던가요?"
"...여전하십니다."
"역시. 나이가 칠순이 넘었는데 은퇴할 생각을 안하네."  
"진짭니까?"

그렇게 보이진 않았기에, 놀란 내가 물었다. 제시카 형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로 자신의 군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나게 대화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식사시간이야. 아르펜도 배고플텐데?"

우리의 대화를 끊은 것은 알타바르였다. 숨도 안쉬고 대화를 나누던 나와 제시카 형수는 서로 뻥찐 표정을 짓다 금세 웃었다.

"호호. 처음 보자마자 저렇게 친해지는 건 대체 누구 사교성이 좋아서려나."
"둘 다 그렇지 뭐."

우리를 지켜보던 두 분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식당을 향하셨다. 나와 알타바르 부부 또한 따라서 식당을 향했다.
변경이라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식탁 위에서 나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내 앞으로 놓여진 돼지고기 스튜를 스푼에 떠먹은 나는 약간의 감탄사를 흘리며 맛을 음미했다.
라파 상등병의 짬밥도 맛있는 편이었지만, 고향의 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난 이 맛에 어릴 때부터 길들여졌다.

"스튜 맛을 보니, 로이샤 주방장님은 여전히 건강하신가 보군요."
"잘 아는구나."
"기억이 날 때부터 이걸 먹고 자랐으니까요."

로이샤 주방장은 가문의 전속 요리사이기도 했지만, 어머님이 고아병을 운영했기에 그쪽의 음식도 담당했었다. 덕분에 나와 고아병 아이들은 고된 하루를 먹는 낙으로 보냈었지.
식사를 하시던 아버님이 수저를 놓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기 전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경청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아르펜. 그간 힘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여독을 풀고 가거라."
"네."
"양자든 뭐든 너도 내 자식이다. 편하게 푹 쉬다 가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말수는 적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알타바르와의 티타임이 있었다. 제시카 형수는 '전 아기를 봐야하니, 두 분만의 시간 보내세요.'라며 조용히 빠져주었다.
보면 볼수록 좋은 분이었다.
작은 테이블을 두고 의자에 앉은 나와 알타바르. 따뜻한 차에 목을 축인 그가 대뜸 한 마디했다.

"지낼만 하냐?"

역시 첫 마디는 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