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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네."

가방을 멘 채 서있던 내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저 멀리 보이는 낡은 관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9개월만의 귀향이었다. 비록 오고가는데 6일의 시간이나 걸려 실제 휴가기간은 4일에 불과했지만, 그게 어디일까.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낡은 관문이 점점 가까워지자, 점으로만 보이던 경비병들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어릴적부터 부대끼고 지내던 고아병들이었다. 내가 손을 흔들었다.

"어이 어이! 잘들 지냈냐?"
"아르펜... 공자님 오셨습니까...!"

처음엔 환하게 반가운 표정을 보이다, 금세 군기가 바짝 든 모습들이었다. 아르고니아가 아무리 상대적으로 신분의 격차가 낮다곤 하나, 엄연히 신분사회였기 때문이다.
나는 입대하기 며칠 전에 고아병에서 귀족이 되었던 탓에 모두들 나를 대하는 것을 적응하기 참 어려울 것이다. 

"안색이 여전한 걸 보니, 별 탈 없이 잘지냈나 보네?"
"아무렴요. 몬스터의 침입이 없다시피한 곳이다보니 어찌보면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하품 하는 시늉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이는 마른 체형의 고아병. 스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한살 아래의 동생이었다.
말이 많아 재밌지만, 말이 많아 손해 보는 녀석이었지 참.

"스텔 이 새끼야! 또 떠들어 제끼고 있냐?!"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온 건 그때였다. 깜짝 놀란 스텔이 토끼눈을 뜬 채 자세를 고쳐잡았다. 호랑이의 울부짖음을 마주한 토끼의 모습이었다. 나에겐 또다른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고함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거구의 사내와 눈을 마주했다.

"렉토."
"오랜만이군 아르펜. 아니, 이제는 아르펜 공자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큭."

깍뜻했던 다른 고아병들과는 달리 렉토의 태도는 전혀 변함없었다. 물론 나도 그런 것 따위 바라고 있지도 않았다.
녀석과 나는 귀족양자의 자리를 두고 거의 10년 이상을 라이벌로 싸워왔던 사이니깐 말이다. 결국엔 내 승리로 귀결 되었지.

"편하게 불러 임마. 이 자리에 다른 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럴 줄 알았다.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이 덩치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우리는 함께 방향을 돌려 관문 안을 향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최전방에 가 있다면서? 어때, 지낼만 하냐?"
"여기서 경비대장 맡고 있는 게 평화로운 줄 알아라 임마."
"평화는 개뿔. 지루해 죽겠구만."

한숨과 함께 하품을 하는 녀석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렉토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우린 본능적으로 맞수가 될 것을 깨닫고, 경쟁해왔다. 그러면서도 서로 비겁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녀석도 성정 자체는 올곧았기 때문이다.
양자선발 토너먼트 결승에서 내가 녀석을 꺾고 귀족이 되자, 그 직후 놈은 나에게 바로 악수를 청하며 말했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너를 친구로 대할 수 있게 되서.'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거기서 실전은 겪어봤냐? 막 고블린이랑 트롤이 철책선 밖에서 그렇게 날뛴다면서?"

녀석의 관심사는 역시나 실전이었다. 어릴 때부터 몬스터랑 싸우고 싶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놈이었기에, 무척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이지. 하. 내가 걔네들이랑만 싸워봤겠냐...?"
"그건 또 뭔 소리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녀석에게, 내가 귓가로 한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금세 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미친. 진짜냐?"
"그건 나중에 시간나면 말해줄 테니까, 우리 영지 얘기나 좀 해봐라. 나 이제 이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아들 아니냐."
"뭐, 그건 그렇지..."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것이, 아직까지 녀석에게도 적응이 필요한 단계인 것 같았다.

"너 입대하고 나서 딱히 별 일은 없어. 뭐, 있다면 소영주님이 쌍둥이 아들 따님을 얻으신 것 정도?"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냐?"
"그치? 그게 좀 경사스러운 일이었지."
"너 참 별 거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 날 고기 배터지게 먹었을 거 아냐."
"그래. 술도 배터지게 먹었지. 흐흐."

그때를 떠올리는 듯 침을 꼴깍 넘기는 렉토의 모습은 안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성을 향하는 내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언제부턴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안본 사이에 조카가 둘이나 생겼다니!?

"그래도 난 네가 부럽다. 그 군복무만 끝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니깐."
"..."

여운이 감도는 렉토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알타바르를 보좌해 영지를 발전에 힘쓰라는 영주님 아니, 아버님의 당부는 사실 명령이라기보단 부탁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 정도로 양자라도 힘을 가진 귀족가의 귀족이라는 타이틀은 무시못할 위치인 것이다.
물론 도가 지나치면 강등당할 수도 있다는 왕국의 법적인 제재가 있긴 하나 녀석의 말대로 군복무만 마치면 사실상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에 반해, 고아병은 영지와 영주의 소유물에 가까웠다. 아르고니아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통제받는 신분인 셈이다.
고아병. 그들에겐 입대의 의무가 없는 대신,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벌써 다왔군."

렉토의 말 대로였다. 관문에서 성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었음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래. 난 이만 들어가봐야겠어. 복귀하기 전에 들를테니 럼주랑 닭고기 한점 들고 이야기나 나누자고."
"꼭 와라. 진짜... 그 얘기, 듣고 싶으니깐."

나는 피식 웃었다. 아까의 내 귓속말을 들은 녀석은 정말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었으니까. 무뚝뚝한 놈의 표정이 그렇게나 바뀔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렉토와 헤어진 나는 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성의 경비병들이 내 신분을 확인하고 예를 갖추었다. 다시 한번 격세지감의 기분을 느끼며 성 안의 계단을 올라 헤임달 가문의 저택을 향했다.
참. 아니지, 이젠 내 집이었지.  

"아, 어서오시지요, 아르펜 공자님."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마자 얼핏 보아도 60은 넘어보이는 늙수레하지만, 단정한 차림을 한 집사가 고풍스러운 인사와 함께 나를 맞이했다. 타이펜 집사. 그는 전대 영주부터 집사의 업무를 수행해온 라이칼 영지의 터줏대감이었다. 

"반갑습니다. 타이펜 집사님."

나 또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지금이야 내가 귀족의 신분이지만, 고아병 시절의 그는 내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높으신 분이었으니깐. 존대를 하는 게 당연하다.

"마음 같아선 옷차림을 바꿔드리고 싶지만, 영주님의 명이 있어 바로 가보시면 될 듯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 아래위를 훓어보며 탄식하던 타이펜 집사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칼의 영주. 내 양부인 카시오 폰 헤임달은 무뚝뚝한 남자였지만 그만큼 허레허식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군복무 하던 모습 그대로를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리라.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내 시야에 40대의 중년부부와, 각각 아기를 안고 있는 내 또래의 남녀가 들어왔다.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헤임달 가문의 아르펜 헤임달, 이제 막 군에서 1차 휴가를 얻어 영지에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