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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서스는 창문을 통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운치삼으며,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다양했다. 예티에 관한 보고서부터 시작해 군내부의 비리의혹과 페니아 내정침투에 관한 현안까지. 그것은 왕하 직속 특수부대인 언더 프로즌의 2번대장인 그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얼마나 살펴보고 있었을까. 오랫동안 계속되는 서류읽기에 지쳤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책상에 탁 내팽겨친 그는 살짝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책을 읽던 밀리아가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를 잎이 담긴 쇠잔에 채우더니, 이내 그에게 갖다 주었다.

"고맙다 밀리아."
"별 말씀을."

거의 아버지와 딸에 가까운 나이차를 가진 둘이었는데, 과묵한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 짧은 단답 대화를 끝으로 이곳 사단본부의 작전참모 집무실은 침묵이 맴돌았다.

쾅!

침묵이 깨진 것은 문이 열리고나서부터였다. 이어 들어온 인물은 꼬장꼬장해보이면서도 눈빛이 살아있는 환갑이 넘은 늙은 군인이었는데, 유난히 빛나는 군모의 별 두개가 이곳에서 가지는 그의 신분을 대변했다.
크로서스 또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건네었다.

"허허허. 너무 공손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네. 명색이 언더 프로즌의 대장 아니신가."
"제국에 왔으면 제국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이 부대의 최고 어른이신데 경례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 인사는 드려야지요."
"그렇긴 하네만, 이 늙은이는 그런 것에 연연해 하지 않으니 편하게 있으면 된다네."

사단장, 코갈 레이븐의 태도는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허구헌날 튀김요리의 야채 마냥 들볶이는 다른 간부들이 봤다면 아마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헌데 들어보니 이 집무실이 원래 작전참모의 집무실이었다고 하더군요. 계속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원래는 카논 중령의 집무실이었지. 잠깐 아래 연대로 좌천시켜 놨으니 신경쓰지 말게."

별 것 아니라는듯 대답하던 사단장이 옛기억을 떠올리는 듯, '카논 이 X같은 새끼...'라며 살짝 중얼거렸다. 피식 웃은 크로서스는 굳이 그런 부분까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에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갑자기 문을 여실 정도면 꽤나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말일세..."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심해진다. 순간 사단장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러 이 곳에 온건지를 까먹었는지 조금 당황해했다. 평소 습관대로 문을 연 것이긴 했다. 그러나 자기 부대의 간부들에게야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상관없어도 상대는 아르고니아 왕실에서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심중을 눈치챈 크로서스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생각하고 말씀하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고개를 끄덕인 사단장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제야 머리 위에 마법등이 켜진 듯 가볍게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자네가 건의해 척살병이라는 새로운 보직을 부여하게 만든 병사 있지 않은가? 예티를 일대일로 상대했다고 하는 녀석 말일세."
"아르펜 헤임달. 잘 알지요."

크로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을 비롯한 일부 부대원이 이곳에 있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 사내 때문이기도 했다.

"보고서가 올라왔더군. 삼일 전에 고블린들과 교전을 벌인 모양이야."
"흠, 뭐 고블린 따위 잡는 일이야 별 일 아니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크로서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한 것이 예티도 사냥감으로 여기는 그에게 있어 고블린은 한줌거리도 아니었으니깐.

"한번 읽어보게."

사단장은 품 속에서 꺼내든 보고서를 크로서스에게 내밀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받아든 채 조용히 동공을 좌우로 움직이며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동공이 멈추었다.

"마법?"
"그렇다네. 홉고블린이 마법을 썼다더군. 교전 시에 사용했던 방패를 사단병기창에 놔두었으니 확인해보게."
"그러지요. 철책선 바깥에선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군요. 고블린 따위가 마법이라..."

관리를 안해 조금은 지저분해진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던 크로서스는 이내 보고서를 마저 다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흐뭇한 미소로 마무리했다.

'보직 하나 잘 줬더니 자기 역할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군.'

43마리 대 9인 남짓의 싸움. 그 중에 혼자 절반 이상을 죽였고, 결국 홉과 단독으로 싸워 사살했다. 아군의 피해는 중상자 1명에 경상자 2명이 다였다.

"그나저나 이 척살병 녀석 정말 대단하구만. 어찌 혼자서 전우들을 다 구하고 홉고블린 무리들을 격퇴했단 말인가. 허허 참."

좋은 무장을 갖추었다고 치더라도 일개 경계부대의 병사 하나가 거두었다기엔 상상을 초월하는 전과였다.
크로서스 또한 사단장의 그 말에 유일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습니다. 확실히 물건이지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찬란히 빛나는 보물을 발견한 모험가의 눈빛이었다.



****



쏴아아아.

"일동 차렷!"

소초장의 목소리는 엄숙하면서도 비장했다. 판초를 입은 채 제식을 갖추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블린들에 의해 희생된 두 병사의 시신은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부득이한 상황에 의해 매장이 결정되었다. 나는 입을 닫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제식을 따랐다.

"먼저 떠나간 전우를 위해, 경례!"
"단결!"

담담하면서도 큰 경례소리가 쏟아지는 비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비가 와서 더 그랬을까, 그 속에서 흐느끼는 듯한 외침이 섞여 있었다.

"크흑흑... 루빈, 제니아. 다음 생애엔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나라."

죽은 두 병사들의 분대장이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처박은 채 울부짖었다. 그들이 속했던 3분대의 분대원들 역시 따라 절규했다.
나는 두 눈을 부릅 뜬 채 이 사태를 일으킨 고블린들을 향해 분노를 연소시키다, 이내 허탈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한 복수는 내가 통렬하게 이루어냈던 까닭이다.
이 울분을 당최 누구에게 풀 수 있을까.
비가 한참 와서 추워지는 와중에도 그들의 울음은 계속되었다. 결국 몸상태를 염려한 소초장의 명령으로 겨우 돌아서서 소초로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열에 맞춰 걸어가던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제일 뒤처져 있는 3분대원들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걷기도 힘들어 할 정도였다.
아마 내가 속한 2분대원들처럼, 몇년을 가깝게 대화하고 먹고 잠을 자며 지낸 사이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나에게 대입해 보았다.
베일 상등병이 죽었다? 샨티 상등병이 죽었다?
안젤리카가 죽었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선. 사실 고블린들과의 전투에서 그럴 뻔했던 상황이 있었기에 더욱 더 아찔했다.

"..."

조용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를 보던 내 시야에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발렌. 호승심에 하극상에 가까운 소리까지 하며 나섰다가 겁에 질려 도망가던 새끼. 웬만하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던 내 심성 속에 불꽃이 켜졌다.
소초로 복귀해 정리를 끝마치자마자 나는 발렌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갔다. 그리고 구두방 구석에 집어던졌다.

퍼억.

"네가 이번에 저지른 짓이 뭔지 알기는 하냐?"
"크윽... 이, 이등병 발렌입니다."
"내가 어디 관등성명 처 부르랬냐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분노에 가득 찬 내 모습이 그리도 악귀 같았을까, 발렌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종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자신감 좋은 거? 좋아. 이 곳에선 소극적인 녀석보단 적극적인 놈이 좋은 거니깐. 그런데 너 새끼는 그 X같은 호승심 때문에 실전에서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놨어."

내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이유였다. 발렌이 라만 일등병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나는 계속 은엄폐로에서 고블린들을 막으며 상황을 좀 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전 한번 치르지 못한 놈이 겁에 질려 도망가는 바람에 경계로의 전투에 혼란이 생겼고, 내가 은엄폐로를 포기하고 내려가야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깐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씨발놈아 죄송하면 죄송할 짓 하지 마."

아마 군에 와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욕설을 퍼부어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도 30분이 넘도록 발렌을 갈구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초로 들어갔다.

"다음에도 또 이런 짓 한다면, 그땐 내 손으로 골통을 방패를 두들겨 패죽여 버릴테니깐 알아서 해라."

그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