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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아룸 옴 샤프타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고블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서도 신경을 놓지 않고 있었던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멀직히 뒤의 낮은 언덕에 서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홉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틈이 날 때마다 곁눈질로 계속 보았다. 놈은 탁 트인 시야에서 우리 중 가장 약한 한명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무슨 짓을 벌일 지 몰라 경각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렸다.

"워터 랜스!"

벼락 같은 외침과 동시에 길게 뻗어 있는 홉의 양손에서 굵은 물줄기가 창의 형상을 한 채 우리 진형으로 날아들었다. 표적은 부상을 입은 베일 상등병! 나는 눈을 부릅뜬 채 방패에 오러를 한껏 주입하고 뛰어들었다.

"숙여요!"
퍼어엉!

"크윽!"

내 방패와 물의 창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수압에 몸을 던졌던 내가 허공에 뜬 그대로 밀려나며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덕분에 사방이 어지러웠다.

키킥!

거기에 진형에서 튀어나와버려 고블린들의 표적까지 되어버렸다. 사방에서 고블린들의 조잡한 병장기가 쏟아졌다. 방패를 들이밀고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피격면적을 좁히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르펜!"

분대원들의 발빠른 대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안젤리카와 샨티 상등병의 빠른 원호로 나는 몸을 굴러가며 가까스로 분대원들의 진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맙소사. 마법이라니."

프레카 분대장의 입에서 어처구니 없다는 탄식이 나왔다. 나를 비롯한 분대원들 또한 똑같은 기분이었다. 역대 최전방에서 교전했던 홉들에 대한 자료를 통틀어도 마법을 쓰는 홉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깐.
놈이 마법을 발현시켰고, 우리가 그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 전황이 조금 바뀌었다. 공격적으로 움직이던 분대원들은 점점 수비적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그에 반해 기세를 얻은 고블린들의 공세가 전보다 맹렬해졌다.
마법의 존재감이란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방패를 든 내가 날라갈 정도면 다른 분대원이 직격으로 맞았을 때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했으니깐 말이다.

"워터 블레이드!"

잠시 후, 홉의 다음 마법이 프레카 병사장을 향했다. 롱소드를 들고 있어 분대원들 중 그나마 공격이 가장 활발했기 때문이리라. 라이오 상등병과 내가 다른 쪽을 맡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키에에엑!

"아악."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는 상대하던 고블린의 멱살을 잡아 던지며 날아오는 물의 칼날들의 상당수를 방패삼을 수 있었다. 짬밥이 어디가지는 않는지 뛰어난 전투센스였다. 하지만 체급차이가 있었던 탓에 일부는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프레카 병사장님!"
"난 괜찮아! 다 전투에 집중해!"

전투복 곳곳이 찢어져,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떨어지는 빗물과 함께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분대원들을 독려하는 그녀였다. 물론 고통이 묻은 목소리는 전혀 멀쩡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블린들을 상대하며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내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분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양측 다 비가 오는 이 날씨에선 체력에 부담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숫적인 열세라는 맹점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리했다. 교전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숨소리와 표정만 보아도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게 보였다. 곧 소초의 지원병이 도착할 테지만, 그것보단 우리들 중 한명이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저 마법을 쓰는 홉 고블린 때문에 말이다.

"본대가 올 때까지 수비에 집중해 주십쇼.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틈을 타 프레카 병사장에게 다가간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줄 짐작했기에, 그녀의 음성이 떨려왔다.

"자신 있어?"
"없어도 해야죠. 왜 그러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내 말에 프레카 병사장은 침묵으로 긍정을 뜻했다. 놈이 보낸 두 차례의 수계 마법. 방패를 든 내가 튕겨나갔고 고블린을 방패삼았던 그녀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운이 좋아서 두번은 막아냈지만 세번째까지 막아내란 법은 없었다.

"라이오랑 활로를 열테니 그 틈에 달려."

고개를 끄덕인 내가 움직였다. 프레카 병사장이 라이오 상등병의 옆에 나란히 선 채, 대치하던 고블린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며 순간적으로 구멍을 내었다.

"뛰어!"

프레카 병사장을 외침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튀어나갔다. 좌측에서 날아오는 병장기를 막으며 우측에 있는 놈의 얼굴에 폼멜을 찍으며 고블린들의 무리를 빠져나갔다. 30여미터 바깥의 낮은 언덕에 서있는 홉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놈은 그 와중에도 다음 마법을 영창 중이었다.
순간 생각이 번뜩인 내가 뛰어가는 방향을 정면에서 좌측면으로 바꾸었다. 분대원들을 등지고 있었기에 아예 타겟을 나에게 고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워터 랜스!"

20미터까지 다가갔을 무렵, 물의 창이 날아왔다. 아까의 강력한 수압을 겪어봤기에 나는 방패에 오러를 집중시킨 채, 양팔을 모두 덧대고 한쪽무릎을 땅에 처박았다.

퍼퍼펑!

온몸의 뒤틀림이 느껴졌고, 양팔이 얼얼했다. 그래도 자세 때문에서인지 아까처럼 튕겨나가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다시 일어난 내가 다가가는 사이 놈은 다시 마법을 영창중이었는데, 이번에는 한쪽 손에서 검 모양의 물줄기가 생성되고 있었다.

카앙!

내 쇼트 소드와 놈의 마법검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마법의 힘 때문이었을까? 말도 안되는 반탄력에 내가 뒤로 밀려났다. 이를 악물며 검에 오러를 씌웠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 완성도는 낮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챙채앵!

그 뒤로 나와 홉이 수십차례의 합을 나누었다. 원래 전사출신인듯 탄탄한 몸에 투구와 경장을 입은 홉은 검술도 꽤나 수준급이라 쉽사리 승기가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미세한 열세였다. 뒷짐 지며 지휘만 했던 놈과 달리 장장 한시간이 넘도록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사투를 벌인 나는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놈의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 나를 심리적으로 더더욱 압박하고 있었다.
웃기게도, 극도로 지친 이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초조할 법도 했지만 머리는 오히려 더 맑고, 냉철해져갔다. 움직임과 검압은 조금씩 둔해져 갔지만,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않았다. 홉과 리듬을 함께 타며 검을 주고받고 방패로 막기를 반복했다.

"크으으... 인간."

쉽사리 싸움이 끝나지 않자, 놈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말이 나왔다. 아주 짜증이 섞인 어조다. 마침 말을 건 틈을 타 나는 뒤로 물러서 대치하며 숨을 골랐다. 지친 와중에서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왜 이 새끼야?"
"죽...여버리겠다!"

처음의 여유로운 모습은 어디갔는지, 놈은 점점 흥분한 채 나를 몰아붙이려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멀리서 소초의 지원군이 거의 다 다다랐기 때문이다. 7명에 지나지 않는 우리 분대를 상대로도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40여명에 이르는 소초병 전원이 상대라면 답이 나와 있었으니깐.

"그래, 잘 생각했어."

어느새 홉에게서 여유를 빼앗아 온 내가 흥미롭다는 어조로 말했다. 내 입장에선 이렇게 멘탈이 나가 덤비는 것이 속편했다.
동료를 죽인 새끼를 곱게 도망치게 놔둘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니깐 말이다. 나는.

차앙! 퍼퍼퍽!

하지만 심리적으론 우세하게 변했어도 지친 내가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홉은 나를 더더욱 맹렬히 공격했고, 나는 반격할 기회도 좀처럼 잡지 못하며 막기에 급급했다.
육체는 지쳐있었고, 오러도 고갈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평온했다. 할로이나 밀리아 같은 언더프로즌의 괴물들과 대련할 때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힘든 축에도 들지 못한다.

"지쳤냐?"

인간의 말을 할줄 안다는 점은 놈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수세에 몰렸으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내가 실실 웃으며 한 마디 던지자, 놈의 얼굴이 대번에 붉그락푸르락해졌다.
지쳤냐는 내 물음은 사실이었다. 방금 전에도 잠시 대치를 했는데, 그 틈에 초반부터 나를 몰아붙이던 마법검을 사그라뜨리고 허리춤의 검을 꺼내어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오러안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몸놀림이 둔해졌고 헛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체력을 아끼며 거북이처럼 웅크리며 방어에만 몰두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역전의 한방을 먹일 차례였다.

휘익-

횡으로 깊숙하게 그어가는 놈의 공격을 순간적으로 몸을 숙여 피했다. 수십합 동안 막기만 반복해서였는지 당연히 막을 거라 생각한 놈의 허를 찌른 노임수였다. 자세가 무너진 놈의 머리를 향해 방패를 날렸다.

퍼억!

둔중한 쇳소리와 함께 투구가 날아갔다. 흉측한 놈의 붉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쇼트 소드를 버린 내가 눈동자마저도 붉어 요마를 연상케하는 놈의 눈을 두 손가락으로 찔렀다. 물컹한 둥그런 것이 터지는 느낌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키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발로 밟아 칼을 멀리 날려버리고 몸뚱이 위에 올라타 쇼타임을 시작했다. 눈알까지 터져 전의를 잃은 몰골에 왼팔에 쥔 방패로 세번, 오른 주먹으로 두번씩 번갈아가며 두들겼다. 
그 행위를 한 사이클로 온 몸의 체력이 다 하는 그 시간까지 분노의 두들김을 반복했다. 

퍽퍽퍽 퍼퍽. 퍽퍽퍽 퍼퍽.

"왼쪽의 세방은 니가 쏜 마법횟수고, 오른쪽의 두방은 너희가 죽인 우리 전우 몫이다, 이 개새끼야."

그것이 내가 리듬에 맞춰 놈의 얼굴을 두들겨 패는 이유였다. 물론 놈은 어느새 축 늘어진 시신이 되어 듣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