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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다닷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한참을 내려가던 중, 경계로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내 두 눈에 드러난 눈 앞의 광경은 혼잡한 난전의 형국이었다. 베일 상등병 홀로 계단을 사수하며 검을 맞대고 있었고, 세레나 일등병은 멀리서 활시위를 당기고만 있었는데, 혹시나 베일 상등병이 맞을까봐 쉽게 쏘지 못하고 있었다. 발렌은 그 뒤에서 비틀거리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퍼억!

나는 미끄러져 내려오던 가속력을 그대로 착지점에 있는 고블린에게 쏟아부었다. 놈은 종으로 떨어지는 방패에 뒤집어 쓰고 있던 나무투구 채로 골통이 박살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세레나 일등병님! 저 자식 데리고 빠지십시오!"

죽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뒷편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실상 뒤의 두 명은 없는 게 나은 편이었다. 신병 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세레나 일등병은 지금의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몰려오는 고블린만 수십인데, 특출난 능력 없이 활과 단검으로만 무장한 그녀 혼자로선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 알았어."

내 명령에 대답한 세레나 일등병은 곧장 방향을 돌려 발렌의 멱살을 잡아 끌고 뛰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임마! 죽고 싶냐!?"
"사, 살고 싶습니다...!"

놈은 아까 큰 소리 탕탕 치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실전을 치르지 못한 피래미의 한계였다.
내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베일 상등병을 몰아붙이던 고블린들이 내 등장에 꽤나 당황한 듯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왜 내려온 거야? 아직 버틸 만했는데."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요. 저야 위에서 계속 시간을 벌고야 싶었죠."

나의 등장으로 여유를 찾은 베일 상등병의 투덜거림에, 나는 콧방귀를 끼며 이죽거렸다. 내 말은 진심이었다. 은엄폐로에 있는 고블린 놈들을 방치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뻔히 보였으니깐.
좌우의 간격을 가늠하던 내가 쇼트 소드를 검집에 넣고 흑철단검을 꺼내었다. 경계로는 사람 두 명이 서서 싸우기엔 폭이 좁았다. 서로 간섭이 안되려면 내가 단검을 꺼내는 편이 좋았다.

"곧 독침이나 화살이 위에서 날아올 겁니다. 방패로 최대한 방어각 잡을테니깐 칼질 잘하세요."
"네네. 너도 방패질 잘하세요."

장난조의 존대로 맞받아치는 베일 상등병. 하지만 나와 그는 둘 다 미미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동안 투닥거리기도 많이 했지만, 칼라 형님의 전역 후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분대원 몇몇들 중 하나가 바로 베일 상등병이었다.

"하압!"

베일 상등병이 기습적으로 쇼트소드를 찔렀다. 목젖을 노린 검은 아쉽게도 어깨를 찌르는 수확만 거두었다. 악에 받친 고블린 두셋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방패를 든 내가 계단 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허한 쇳소리만 남기며 실패할 뿐이었다. 오히려 방어 후 가볍게 찌른 내 단검에 눈을 찔린 한 놈이 비명성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면서도 청력을 집중해 은엄폐로에 주의를 기울이던 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쏩니다. 숙여요!"

쐐애액!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화살과 독침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아래의 고블린들과 간격을 벌리던 내가 방패를 들이밀며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을 막아내었다.

퍼퍼퍼퍽!

조잡해도 화살은 화살이었다. 팔로 느껴지는 묵직한 중압감에 이를 악문 내가 귀을 기울이자,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미묘하게 들려왔다. 베일 상등병에게 말했다.

"뒤로 빠지시죠. 놈들은 점점 우리 후방으로 빠질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일 상등병이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실전경험도 제법 있고 실력도 수준급인 우리지만, 다수의 고블린에게 뒤까지 잡히면 정말 힘들었다.
베일 상등병이 빠지는걸 확인한 내가 아래의 고블린들을 견제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대여섯 마리 쯤 잡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행여나 화살이나 독침에 맞게 되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키오오옷!

한참을 퇴각할 무렵이었다. 은엄폐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한 놈이 베일 상등병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는 상황이라 어깨에 한침을 맞게 되었다.

"이 개새끼가!"

퍼억! 캬아악

반사적으로 휘두른 내 방패공격에 바닥을 나뒹굴긴 했지만 말이다. 그 뒤 눈에 불꽃이 튄 내 두세차례의 방패찍기에 두개골이 부숴져버린 놈이 절명했다.

"제기랄!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으면 어쩔건데?! 젠장. 좀 따끔하긴 하네."

말로 아닌척은 하고 있지만,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꽤나 깊숙하게 찔린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내 귓전으로 고블린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키아아아아아!

우리가 막고 있던 계단쪽에서 소수, 내가 있었던 은엄폐로에서 다수. 두 군데에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난쟁이 몬스터 놈들의 기세는 제법 위용 있어 보였다. 물론 이런 감상평을 남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멀쩡하다면 모를까, 부상당한 베일 상등병을 지키면서 싸우기엔 여의치 않았다.

"숙여요!"

퍼퍼퍽!

본능적으로 베일 상등병을 밀어 넘어뜨린 내가 몸을 숙인 채 방패를 들이밀며 다시 한 차례 이어진 원거리 사격을 막아내었다. 방패를 내리며 시야를 확보한 내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놈들이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뛰어들어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곁눈질했다. 베일 상등병이 몸을 일으키며 검을 고쳐잡고 있었지만, 출혈 때문에서인지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욕설을 뱉은 내가 쇼트 소드를 뽑아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도망칠 수도 없다면, 있는 힘껏 싸워야만 한다.
그때였다.

"둘다 고개 숙여!"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일 상등병과 함께 엎드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뒤에서 섬광처럼 날아온 화살이 선봉의 고블린 두세마리를 쓰러뜨렸다.

"연극 하는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잘 오셨네요?"
"그러니까 분대원 아니겠냐."

베일 상등병의 농담에 화답한 프레카 병사장이 롱소드를 꺼내들며 앞에 섰다. 뒤를 돌아보니 반대편 근무지 근무자였던 라이오 상등병과 라만 일등병, 안젤리카가 활을 거두며 근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소초에 보고를 하러 갔던 샨티 상등병도 저 멀리서 뛰어 오고 있었다.
지원군이 와서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아직도 고블린들은 삼십여마리에 이르렀고, 우린 부상자까지 포함해 7명이었으니깐 말이다.

"곧 소초병력이 도착할 테니깐 아르펜과 라이오를 중심으로 대형을 갖추고 차근차근 싸우자구."
"네!"

프레카 병사장은 방패수가 두명인 점을 감안해 기존의 V자진을 응용한 W자로 진형을 잡고 수비를 명령했다. 일개 경계분대로선 당연한 전술이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위화감이 들었다. 몰려드는 고블린들과,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걸어오는 홉.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 보였다.

"메이아가 하필 비번인 게 아쉽네."

들릴 듯 말듯한 프레카 병사장의 한탄은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부월수는 근접전이 취약한 경계분대의 가장 중요한 공격수였다. 더군다나 근육훈련으로 단련된 그녀의 전투력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한탄해봐야 뭣할까, 전투는 시작되었다. 

"하아압!"

나와 라이오 상등병의 외침을 시발점으로 난전이 벌어졌다. 진형의 한가운데 있던 샨티 상등병은 재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단궁으로 화살을 쏘아댔고, 좌측 날개에 자리잡은 프레카 병사장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고블린들을 베어넘겼다. 경계병 보직의 나머지 고참들은 단검을 들고 약간 처진 위치에서 덤벼드는 고블린들과 전투를 벌였다.

키아악!

부족하게나마 진형을 갖추고 있으니 여유는 있었다. 금세 서너마리의 고블린이 쓰러졌다. 하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 점점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바글바글 몰려들어 우리를 반원형으로 포위한 고블린들의 공격은 하나하나는 약했지만 숫자의 힘으로 우리를 밀어붙였다.

"부탁드립니다!"

라이오 상등병의 등을 가볍게 친 내가 분대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뒤로 빠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샨티 상등병이었다. 고블린 두마리의 칼부림을 피하며 단검을 쥐고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닥까지 뒹굴어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부터 살아나야만 했다. 냅다 달려든 내가 쇼트 소드의 폼멜로 턱을 두들겼다.

끄이이엑!

입이 닫혀 기괴한 비명소리를 내지른 놈을 뒤로 둔 채 다른 한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뒤로 물러서며 피하는 놈이었지만, 이미 내가 한수 앞서 몸을 들이미는 상황이었다. 팔꿈치로 얼굴을 찍으며 방패로 두들겨 바닥에 때려눕혔다. 쇼트 소드로 목을 내려 찌르며 마무리를 했다.
마침 샨티 상등병도 다른 한 놈의 목에 칼침을 박고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가볍게 손을 뻗으며 감사표시를 한 그녀를 뒤로 하고 라만 일등병과 안젤리카에게로 달렸다. 무장이 약한 둘이었기에 상당수의 고블린들이 집요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까강 캉!

방패를 들이밀며 힘으로 놈들을 밀어낸 내가 검을 휘두르며 종횡무진 휩쓸었다. 보랏빛 피분수가 뿜어져 비와 뒤섞이며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니, 둘이 희미한 미소를 띄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전체 전황을 보았다. 나의 활약으로 후방이 살아나서였을까, 고블린들은 처음의 기세가 한풀 꺾여 지지부진했고, 우리 분대원들은 쉽게 죽이진 못해도 쉽게 당하지도 않으며 다수를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제일 뒤편에 빠져서 응급붕대를 감은 베일 상등병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점점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놈들을 무난히 상대하며 지원군만 도착하면 끝날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