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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친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뒤따라오고 있던 샨티 상등병이 방향을 돌려 부리나케 소초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잠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샨티 상등병이 소초에 보고를 하고 본병력이 이곳까지 오는 시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분 정도일 것이다. 고블린들과 곧 칼부림을 벌여야 할 이 시점에선 무척 긴 시간이다. 반대편 근무지로 갔던 4명의 2분대원들은 10분쯤 후에나 올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를 비롯한 4명의 인원으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내가 소리쳤다.

"곧 고블린들이 몰려올 겁니다. 자리 잡고 사격 준비하세요!"
"알았어!"


키아아아!

전방에서 고블린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온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전방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은엄폐로를 향해 다수, 경계로를 향해 다수로 몰려온다. 발소리의 미묘한 차이로 보아 이쪽이 조금 많은 듯 했다.

"다 박살을 내주지."

혼자서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독기를 악문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고블린과의 교전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첫 교전이자 첫 실전이기도 했던 작년의 전투에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확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냉병기라곤 단검 두자루밖에 없었던 그 때완 달리 방패를 비롯해 최상의 무장을 한 상태였고, 최근 한달에 이르는 시간 동안 언더 프로즌이라는 괴물 같은 인간들과 피 마르는 대련을 치러온 나다.
거기다, 난 이미 예티란 극악무도한 괴물과 일대일로 싸워 한쪽 눈을 터뜨린 최강의 병사였다. 

"하아아압!"

고블린들이 지근거리에서 발견되기가 무섭게 내가 기합을 지르며 뛰었다. 선두에 선 놈은 제법 큰 나무방패를 든 놈이었다. 우습게도 나무방패 외에는 다른 무장이 없었는데, 지능이 낮아 한 가지 무기에만 집중하는 고블린의 특성이라 할 수 있었다.
나무방패는 무척 조잡해 보였다. 부실하게 관리되어 군데군데가 썩어 있었는데, 힘 약한 단궁이나 몇 차례 막을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조소를 지으며 흑철로 만들어진 내 방패에 순간적으로 오러를 씌우며 정면으로 두들겼다.

콰-앙!
키아아아!

방패와 방패가 부딪히며 굉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나무방패가 산산조각이 남과 동시에 고블린은 비명성을 지르며 3m 이상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죽였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다음 타겟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어차피 고블린들 사이에선 방패만 든 놈은 제일 능력이 처지는 놈이다.

차아아!

눈 깜빡할 사이에 측면 허공에서 한놈이 공격해왔다. 날렵한 놈인지 나무 위에서 뛰어든 모양이다.

"이 개새끼!"

내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왔다. 놈이 찔러 들어오는 두 단검에는 이미 피가 흥건했다. 놈은 우리 소초원을 죽였다. 나는 다급히 방패로 막으려는 척을 하다, 놈이 가까워지는 타이밍에 맞춰 상체를 빙그르르 돌며 쇼트 소드로 섬광같이 베었다.

푸확!

단검을 쥔 왼팔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끔찍한 고통에 공허히 떨어지는 놈의 멱살을 잡으며 바닥에 메쳤다. 그리곤 방패를 번쩍들어 사정없이 머리통을 두들겼다. 

퍽퍽퍼퍼퍽!

비명이 잠잠해져 절명한 뒤에도 방패를 두세번은 더 두들겼다.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와 감촉을 몸으로 느꼈다. 원수의 비명성을 귀에 똑똑히 각인시키며 잠시나마 죽은 전우들의 명복을 빌었다.
웃기게도, 분노에 찬 내 행동은 뒤따라오던 고블린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무섭냐, 이 새끼들아."

몸을 일으킨 내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어느새 나를 반원상태로 둘러싼 고블린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생전에 친한 사이였는 듯 분노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내 악귀 같은 모습에 상당히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뒷걸음질을 치는 놈도 있었다.

덥썩.

누군가가 뒷걸음질을 치는 놈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리곤 칼로 등을 한차례 꿰뚫더니 그대로 목을 쳐 날려버렸다. 피분수가 뿜어지며 머리를 잃은 육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캬아악!

야수같은 외침에 겁을 먹었던 고블린들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짓을 한 장본인은 바로 홉이었다. 홉들마다 능력은 천차만별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홉은 작년에 칼라 형님이 죽였던 놈보다 휠씬 강해 보였다. 키도 거의 나와 비슷했으며, 풍기는 기세도 무척이나 사나웠다.
저 정도라면 최전방에서 포착하고 있는 고블린 무리의 홉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놈이리라.

쐐애액- 퍼퍽.
"세레나와 발렌은 20보 뒤로 빠져서 재사격 준비해! 내가 시간을 벌겠다."

아래의 경계로에서 소리가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1차 사격 후 베일 상등병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무척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는 부분대장의 자격이 충분했다. 예티 앞에선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고블린을 상대론 노련했으니 일반 병사들 중에선 출중한 리더였다. 나는 아래쪽은 안심해도 되겠다 판단하면서 고블린들과 대치하며 빈틈을 노렸다. 놈들은 아까보다 전의는 생겨난 상황이었지만, 쉽사리 덤벼들진 못하고 있었다.

크우우우

그 때 나서는 한 놈이 있었다. 제법 근육질이었는데, 평범한 고블린 중에선 제일 체격이 커 보였다. 굵고 긴 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홉을 제외하면 제일 강해 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놈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곧장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까앙! 챙!

퍼붓는 빗소리 사이에서도 쇠붙이들 간의 마찰음에 불꽃이 튀었다. 나는 놈과 수차례 합을 주고 받으며 여유롭게 빈틈을 살폈다. 생긴 것 처럼 힘도 강했고 전투센스도 있어보였지만 고블린의 태생적 한계는 넘지 못한 놈이었다. 더군다나 난 직전에 대련했던 밀리아에 춤사위 같은 검술에 한 차례 깨졌었다. 그녀에 비하면 놈의 칼부림은 애들장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퍽.

방패로 큰 검을 치우며 쇼트 소드의 폼멜을 눈에 쑤셔박았다. 놈이 비명성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베기 적당한 거리였기에 주저 없이 사선으로 베었다. 피분수가 쏟아졌다.  

캬아!

홉의 다급한 외침이 들린 건 그때였다. 아마 놈이 오른팔 정도의 수하인가보다. 뒤에 멀직이 있던 다른 놈들이 뛰어드려고 했다. 나는 그전에 놈의 숨통을 끊기 위해 쇼트 소드로 찔러들어가려고 했다.
한 차례의 비명성이 아래에서 울려퍼진 건 그때였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

발렌의 목소리였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쇼트 소드를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차려 발렌! 죽고 싶은 거냐?"
"도, 독에 당했어! 난 이제 곧 죽을 거야!"
"씨발 진짜!"

단 몇마디만 들어도 아비규환인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앞을 바라보았다. 오른팔 녀석은 뒤로 물러나 상처를 수습하고 있었고, 다른 고블린들이 나에게 달려들려다 다시 대치만 하고 있었다.
지형구조상 내가 여기서 빠지면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인 원거리 공격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혼자 이 곳으로 달려 올라온 것이었고. 하지만 동료를 잃는 것보단 여기를 내주는 것이 나았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욕설을 한 차례 내뱉은 내가 방향을 돌려 경계로로 합류하기 위해 급한 경사의 은엄폐로를 빠르게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