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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말을 할 수 있으시군요."

우리측에서 가장 먼저 대답한 이는 일행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체스터 경이었다. 나는 통역마법을 사용했나 싶어 레피아 경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내 내심을 아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 일족에서도 족장인 저와 고위급 장로들만이 인간의 말을 배웠지요. 인간이었던 카이안 콴타님의 유지를 조금이나마 잇기 위해서지요."
"사실 이 예티 친구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전까지 그 분을 추모하고 모시는 것은 우리 이지스교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깐 말입니다."

족장의 시선이 뇽을 향했다. 정말 족장은 족장인지, 자유분방한 성격의 뇽이 고개를 푹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후둑 후두둑

처음 찾아오는 예티 부족과 화기애애한 대화의 싹이 트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줄기씩 내려왔다. 손바닥을 피며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족장은, 우리에게 마을 안으로의 진입을 권했다.

"일족의 거처에 처음으로 방문한 손님인데 이렇게 계속 세워 놓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그쪽의 덩치 큰 친구도 쉴 자리가 있으니 들어오게."

족장은 그렇게 말을 마친 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빅 아울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빅 아울이 이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세가닥 난 발을 성큼성큼 움직이며 우리와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안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 그대로였다. 산을 끼고 있어 전체적으로 약간 경사져 있었지만 지반을 잘 다져 놔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예티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족장이 말했다.

"부족민들이 쳐다보아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천년이 넘는 우리 부족의 역사 동안 인간은 처음일지니..."
"이해합니다. 괘념치 마시길."

손사래를 치는 체스터 경. 개방된 창고에 빅아울을 쉬게 한 우리는 족장을 따라 그의 거처로 들어갔다.
족장의 집은 꽤나 큰 건물이었는데, 제법 큰 원탁과 의자들 이외에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걸 보면 주로 회의하는 용도로 쓴 모양이다.

"다들 이쪽에 앉으시지요."

족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건장한 체구의 예티들이 의자를 빼주며 차를 올려놨었다. 분명 생김새는 이종족임이 분명했는데, 예법 자체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우선 저희의 상황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체스터 경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예티족이 그토록 존경하는 '카이안 콴타의 후계자'임을 여러차례 강조하면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땐 조금 과묵하게만 느껴졌던 그였지만 입을 열기 시작하자 언변이 물 흐르는 듯 하다는 느낌까지 들었으니, 아르고니아 제일검이라는 그 고강한 위상만큼이나 말재주가 뛰어남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력도 뛰어나면서 말발도 저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어쩌란 거지?

"...해서 저희가 조금이라도 왕국의 정권을 잡아 위대한 카이안 콴타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면 그 분의 유산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수백년도 더 된 인물에게 항상 '위대한'이라는 접두사를 일일이 붙여 얘기하는 체스터 경을 보며, 공손히 읍을 한 예티의 족장은 시중을 드는 예티에게 시켜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예티가 두툼한 양피지 두루마리를 한손에 쥐고 들어왔다. 금세 테이블 위로 지도가 펼쳐졌다.
족장이 말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그분이 남기신 유산은 많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단 한개도 없지요. 던젼 형태로 남겨 놓은 이 유산들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큰 위험을 담보로 합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었다. 예티 족장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는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을 빼먹지 않고 말했다.
묵묵히 지켜보던 율라 중사와 레피아 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카이안 콴타라는 전설 속의 인물이 남긴 유산을 어중이떠중이가 운좋게 얻을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꽤나 많군요. 유산이란 것이."

체스터 경이 방금 한 말 대로 카이안 콴타가 숨겨놨고, 그녀의 유산을 정리한 드루이드족 예티들이 모아 놓은 지도의 양은 꽤나 방대했다. 애초에 했던 '유산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어떤 유산을 선택해야 하는가'로 바뀐 상황이었다.

"보자..., 선택해야 할 곳이 꽤나 많군요."
"그렇답니다. 어느 정도 정리는 해놓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파악을 못했기에...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지요."
 
그 끝을 흐리는 족장을 중얼거림을 되뇌이며, 체스터 공을 비롯해 우리 넷은, 예티 시중이 가져온 지도들을 한참 번갈아 보았다. 던젼의 위치와 특징적인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보상에 대한 것은 단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를테면, 무언가 도박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던젼들인데, 어떤 대가가 주어질지는 한치 앞도 알 수 없었으니깐 말이다.

"아...!"

넓게 펴진 지도들을 훓어보던 중, 나는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말한 기억은 아니었다. 사지가 썩어 영혼만 남은 유령이 말한 말이었지.

'비명골...!'

작년 이등병인 시절에 만났던 유령 군인, 아이오너 준위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예티들이 내민 지도들 중 하나엔 '비명골'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비명골로 가시죠."
"뭐?!"
"너, 알고 있는 거야?"

깜짝 놀라는 일행들의 목소리. 나는 어꺠를 으쓱하며 그들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었다.

"그곳엔 카이안 콴타가 남긴 상당한 양의 유산이 깃들어 있다고 누군가가 확실히 얘기해 주더군요."

물론 그 존재가 유령이라는 것은 구태여 얘기하지 않았다. 유령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존재였으니깐.
하지만 내가 비명골 이란 곳을 콕 집어 말해버리니 모두의 시선은 그곳에 집중한 상태였다. 어떤 좋은 보상이 있을지 한치 앞도 파악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확신에 가득 찬 목표 하나만이 중요할 뿐이었으니깐 말이다.
체스터 경이 입을 열었다.

"우선은 이 비명골이란 곳부터 찾아가봐야 겠군요. 나머지 다른 곳은 시간이 난다면 찾아야겠지요."
"그곳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찾기 조차 힘든 지역이었지요."

족장의 말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저 곳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