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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말로만 듣던 법정에서의 판결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들의 말은 그저 시험해보기 위한 말뿐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더불어 이토록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너도 이지스교의 집행자로 받아들였으니,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겠다."

말을 마친 체스터 경이 레피아 경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완드를 허공에 가볍게 휘두르며 시동어를 읆조렸다.

"사일런스(Silence)."

그러자 방 밖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자그마한 소음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레피아경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나오는 말들은 밖으로 절대 안 샐 거야. 지나가는 쥐새끼도 들으면 안되거든."
"그렇군요..."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길래 그러는거지?

"그럼 준비도 끝났으니 어디 얘기해 보실까. 카슈타르 반정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
"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인 LD 654년, 남부의 실세이자 왕가의 외척이었던 카슈타르 공작이 폭정을 이유로 기습적인 반역을 일으켜 당시 국왕이었던 네프라 3세를 실각 시키고 새롭게 왕이 된 사건이었다. 왕은 참형을 당했으며, 왕비는 세자와 함께 도망치다 세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왕비는 자살했다고 알려진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이 정도까지였다.

"그 모든 것은 조작된 사실이다. 역사는 원래 승자의 것이거든."
"조작이라구요?"
"그래. 이걸 설명하려면 어디 보자, 이지스교와 라마스칸교의 과거부터 설명해줘야겠군 그래."

말을 마친 체스터 경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천장의 구석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긴 이야기의 서두를 열었다.
토속신앙에서 출발한 라마스칸교는 아르고니아와 페니아를 포함한 아르페니아 반도의 오래된 전통적인 종교였으며, 타 종교의 관여가 불가능할 정도로 뿌리 깊은 믿음을 가진 종교였다. 풍족한 페니아는 그렇다쳐도 건국 이전부터 항상 식량부족에 시달려왔던 아르고니아에서 식량과 수확을 관장하는 신 라마스칸의 입지는 확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아르고니아의 건국 전후 라마스칸교에서 한 종교가 파생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카이안 콴타로부터 시작된 이지스 교였다. 무예를 숭상하며 당시 발호했던 요마족의 척결과 아르페니아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지스 교는 요마족의 일망타진 이후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페니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아르고니아 내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가진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두 개의 종교가 공존하기란 어려운 법. 이파전 양상이 벌어진 시점부터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경쟁하던 두 종교는 각자 지방의 실세인 영주와 중앙귀족등의 유력자들을 귀의시키며 수백년 동안 지면 아래에서 싸워왔다.
요마족과 같은 괴물이나 외세의 침입에서 사람들을 지키자는 카이안 콴타의 순수한 의도가 먹을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라마스칸교의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변질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비등하게 대립하던 두 종교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카슈타르 반정이었던 것이다.

"카슈타르는 동부지방의 대귀족이며 라마스칸교의 수석장로이기도 했지. 또한 왕가의 피와 이어져 왕위계승권 20위안이기도 했지. 반정을 일으킬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그 누구도 상상하진 못했었다."

왜냐면 그가 스스로의 이미지를 귀신같이 잘 속여서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왕위를 노려왔던 그는 마흔이 될 때까지 모자란 사람처럼 굴었다고 한다. 하지만 뒤로는 사람을 풀어 점차 주변의 중요인물들을 포섭해왔고, 결국엔 당시 국왕인 네브라의 즉위 10주년 기념식에 사열식을 위해 데려온 군대를 이용해 반정에 성공했었다고 한다.
참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주도면밀함이었다.

"그 정도 인내심이라면 찬탈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군요."
"그렇지. 드러난 것은 폐위된 네브라 3세의 심각한 실정이라고 하지만 그의 통치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이 굶주리는 건 우리의 지리적 문제상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그렇지요..."

아르고니아는 1kg짜리 황금도 세끼식사와 바꾸는 나라다. 그 정도로 식량자급력이 낮고 그만큼 페니아로의 식량의존율이 높다. 물론 반역의 명분으로 그것만한 것 또한 없었을 것이다. 

"여튼, 문제는 그 사건 이후로 이지스 교가 극도로 배척받기 시작했다는 점이지."

이지스 교도 지금 시점에서는 수백년이나 된 종교였기에 이단취급까진 못받았지만,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이다. 듣고 있던 나는 문득 그게 뭐가 큰 문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누가 지지고 볶든 아르고니아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식량수급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는 라마스칸 교가 주가 되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래. 그게 왜 큰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체스터 경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속마음을 꿰뚫어보듯이 말했다.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트라칸피아를 전부 그리고 있는 세계지도였다. 좌측 상단에 LD 706. 2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5달 전에 완성된 지도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인슬라이프 제국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트라칸피아의 유일제국 다인슬라이프. 현시점에서 이 나라만큼 유명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불과 100년 전, 일개 지방 수준의 군소왕국에서 출발해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키더니, 지금에 와서는 트라칸피아의 4분지 1을 접수하고 있는 초강대국이 되어버렸다.
수없이 많은 별같은 오러 유저들과 강력한 기사단, 우수한 야전사령관과 진보된 전술을 가진 그들은 가는 전장마다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며 수없이 많은 이웃 국가들을 멸망 혹은 복속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더 무서운 점은 아직도 그 과정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현 황제 페르마3세 또한 뛰어난 정치력과 전쟁수행능력을 보이며 통치 중에 벌써 3개의 나라를 무릎 꿇렸지.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슬하에 있는 다섯 명의 황자들이다."

말을 마친 체스터 경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다섯 명의 황자들이 하나같이 다 뛰어나다고 하더군. 본래라면 첫째 황자인 로히렌이 황태자가 되는 게 순리겠지만, 황제는 황태자의 조건을 기어이 걸어버렸다. 보다 더 많은 땅과 국가를 정복하는 황자를 황태자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뒷배와 수완을 가진데다가 서로간의 라이벌 의식이 하늘을 찔렀기에 황제의 자리를 놓고 피튀기는 침공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나는 체스터 경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다인슬라이프는 트라칸피아의 중부에 자리잡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위치한 아르페니아 반도는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상당한 강국들이 있어 당장 우리를 친다는 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아르고니아가 대외적으로 공식외교를 펼치고 있는 나라는 같은 반도의 페니아 뿐이다. 만년설의 산맥이 대륙과 반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식량수급은 페니아와 거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외의 외교를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평화가 천년만년 유지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아니올시다였다. 대륙과 교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다인슬라이프가 언제 북부의 국가들을 정복시켜 아르고니아로 이빨을 들이밀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아르고니아의 밥줄이라고 할 수가 있는 페니아도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이제껏 평화로웠지만 대동양(大東洋 : East Ocean) 아래에 위치한 해상국가인 지판의 침략을 받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아르고니아는 안대를 차고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형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지스교가 예전의 교세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거지. 현 아르고니아 왕은 식량확보에만 급급하지, 그 이상을 도모하려는 계획이 한줌도 없어."
"그렇군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워낙 하늘 위의 구름같은 사람들이었기에,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말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었다.

"이제까지의 상황과 이지스교의 노선는 확실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가 데리고 있는 작은 예티를 통해 철책선 바깥을 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 좋은 질문이다. 그전에 너는 후장식 오러를 타고났다고 들었다. 맞는가?"
"그렇습니다."
"기뻐해라. 우리는 저 작은 예티를 데리고 카이안 콴타의 유산을 찾으러 갈 계획이니깐 말이야."

체스터 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입은 저절로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