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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 가서 읽어봐야지. 이게 뭐라고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네 참."
일기장을 품속 깊숙히 집어넣은 메이아 상등병의 표정은 마치, 보물이라도 찾는 모험가와 같았다. 
물론 나도 일기장의 내용이 궁금해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근무지에 도착한 나는 망 잘보고 있으라는 메이아 상등병의 엄숙한 명령(?)에 따라 철저한 사주경계를 실시했다. 
"아, 이제 생각났다. 이 녀석 시간 날때마다 일기장 끄적여댔었지."
초소 안에 앉아 중얼거리던 메이아 상등병의 말에, 나도 어렴풋이 기억속에서 엎드려 연필을 끄적거리던 라만이등병의 모습을 가까스로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리곤 경계를 서면서도 안에 무슨 내용을 적어놨을지 나도 모르게 쓸데없이 추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상생활이 주겠지. 훈련에 대한 것과 경계에 대한 것. 고참들과 적응하는 과정 등등.
그리고...?
"이거 황금마차에서 파는 삼류소설책보다 훨씬 재밌네."
초소안에 앉아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라만 이등병의 일기장을 보던 메미아 상등병이 일어선 것은 근무를 선지 한시간 정도 될 무렵이었다. 초소 밖으로 나온 그녀는 외초경계를 서고 있던 내게 대뜸 물었다.
"너, 보고 싶냐?"
보고 싶다고 단번에 대답하려던 나는 순간 아차 싶어 본심을 버린 가식적인 대답을 해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뭐야. 아까 그렇게 입술을 씰룩씰룩거리더니, 보고싶은 거 아니었어?"
은근히 장난기 어린 말투였다. 나는 순간 내 마음 속에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자아가 분열되어 싸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일단은 부정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무리 내가 분대에서 인정받고 있다곤 해도 일개 이등병이다. 그녀와 나의 짬차이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맨바닥에 정수리부터 갈리는 차이였으니깐 말이다.
막말로 '고참 일기장 함부로 보게 되있냐?'라고 해버리면 할말이 없었다.
"보고 싶다고 말해도 뭐라 안할테니 솔직하게 말해."
마치 악마가 속닥이듯 귓가에 대고 말하는 메이아 상등병. 결국 나는 본심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계속 거짓말을 하기엔, 한시간 동안 그녀가 깔깔거린 횟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 말씀 하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 좋았어. 지금 이시간부터 우린 공범이 된 거야."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메이아 상등병의 모습은 상당히 의욕에 가득차 보였다. 나는 표정관리도 못한 채 그녀에게서 일기장을 받아들고선 냉큼 초소 안으로 들어가 일기장을 폈다.
[705년 6월 11일. 내 생일인데 생일선물 대신 훈련용 무기를 지급받았다. 생일선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사실 답답한 말투가 떠오르는 부분은 라만이등병의 첫날뿐이었고, 그 뒤의 내용은 일목묘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해야 될 일이었지만 말이다. 
일기장을 보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 라만이등병은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맞선임이었지만 일기장에 관해서만큼은 정말 솔직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뭐, 일기장이 그래야 일기장이긴 하겠지만.
[705년 6월 19일. 몰래 화장실에서 자위하다 조교에게 걸려 소대원 전체가 벌을 받았다.]
"끄윽..."
너무 웃겨서 앉은 채로 난리를 치다 벽에 머리를 박았다. 부끄러움에 무심코 위를 올려다봤는데, 메이아 상등병이 이쪽을 스윽 바라보면서 씨익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일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705년 7월 3일. 퇴소식이 끝나고 까마귀사단으로 출발했다. 훈련소장님이 '이건 만번 중 한번 나는 발령실수다. 죽지 마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배웅하셨다. 나도 눈물이 났다.]
메이아 상등병이 한시간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양심의 가책과, 두근거림을 두 가지 감정을 가슴에 한껏 안은 채 페이지를 넘겼다.
[705년 7월 8일. 자대에 전입했다. 무서운 고참들과 함께 있으니 너무 떨려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런 나를 맞선임인 세레나 이등병님이 진정시켜 주셨다. 그 날 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걸 가르쳐주셨는데, 단언컨대 그녀는 현존하는 여신님이 분명하다. 눈이 부셔서 감히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아까 메이아 상등병이 왜 '큭큭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705년 7월 13일. 처음 경계근무를 섰다. 베일 일등병이 내 사수였다. 악마도 이놈보단 잘생겼고 착할 것 같다.]
[705년 7월 27일. 아직도 경계 똑바로 못 선다고 혼났다. 베일한테 근무 끝나고 두시간 동안 입으로 고문당했다.]
[705년 8월 3일. 유리젤 일등병이란 고참을 처음으로 만났다. 안젤리카 일등병과 동기라던데, 베일과는 또 다른 의미로 악마였다.]
[705년 8월 14일. 드디어 막내딱지를 떼었다. 세레나 여신님께서 몰래 따로 불러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내 칠흑같은 군생활의 한줄기 빛이었다. 라마스칸이고 나발이고 내 유일신은 세레나다.]
"아니, 저 정도면 종교 아니냐?"
초소 안으로 얼굴을 슬쩍 내밀어 내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확인한 메이아 상등병이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그, 그런거 같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색을 한번도 하는 것을 못봐서 몰랐는데 세레나 일등병을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당연히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라만이라는 내 맞선임은 속마음을 알기가 참 어려웠는데, 일기장 덕분에 그의 속마음을 상당부분 알게 된 점이 긍정적이라고나 할까? 
[705년 8월 17일. 막내뗐다고 베일 이 새끼는 날 바깥에 세워놓고 혼자 처잔다. 요마도 이를 갈 놈이다.]
덕분에 그의 마음속 절대선과 절대악이 누군지도 잘 알게 되었고 말이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던 나는 머지않아 내가 자대에 전입온 날짜에 도달했다. 
[705년 9월 14일. 드디어 분대에 내 밑의 막내가 들어왔다. 분대장님이 막내 뗐으니 똑바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긴장되었다. 여신님이 내게 많은 걸 알려주셨던 것처럼, 막내를 따로 불러 여러가지를 가르쳐줬는데 모르겠다... 고쳐지지도 않는 이 말버릇으로 제대로 설명한건지는.]
"..."
나는 잠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겼다.
[705년 9월 15일. 훈련날이다. 막내가 놀라운 방패술로 분대장님을 대련에서 이겼다. 또 베일한테 갈굼당했지만 이젠 그러려니 한다. 변변찮은 내 밑에 든든한 막내가 와서 다행이다.]
[705년 9월 21일. 막내의 첫 경계날이었다. 사수는 나때와 같이 베일.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안젤리카 일등병이 나보다 더 챙겨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705년 9월 27일. 막내, 아니 아르펜이 드디어 시험을 통과했다. 내가 한달이 넘게 걸리던 걸 일주일만에 떼다니, 너무 대단해서 질투할 생각도 안든다.]
이거 점점 일기장을 읽기가 죄책감이 들어, 그만 덮어버렸다.
"다 읽었냐?"
"아뇨. 더 보기가 라만 이등병에게 죄송스러워서요."
"하긴 네 입장에선 그럴 만 하지. 세레나에 대한거는 어떻게 생각해?"
"따로 불러 축하해준 부분이요?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거기까지 안봤구나. 그럼 둘에 관한거도... 아냐, 몰라도 돼. 복귀할 준비나 해." 
손을 휘휘 저은 메이아 상등병이 턱짓을 했다. 돌아보자 야간 근무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복귀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일기장을 조심스레 건네었다.
"니가 옆자리니까 주는건데, 이거 라만 몰래 관물함에 넣어놔야 된다. 걔 우리가 일기장 본 거 알면 큰일 나. 아니, 차라리 나는 괜찮은데 니가 봤다는 거 알면 걔 완전 돌아버릴껄?"
"그 정도입니까?"
"그래. 그 정도야. 라만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니 그러네."
"후, 명심하겠습니다."
문득 왠지 봐서는 안될 것을 봐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찜찜한 기분을 한 채 우린 다같이 합류해 무장검사를 위해 소초 앞에 섰다.
"라만, 어디 아프냐?"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정신사납게 굴어? 어디 안 좋냐?"
베일 일등병이 라만 이등병에게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불안한 목소리와 행동.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메이아 상등병이 입을 떼었다. 
"꼭 뭐 떨군 거 같이 구는데, 너 기억력 안좋지 않냐? 관물함에 박아넣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아아... 그런 것 같습니다."
바람잡기가 먹혔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메이아 상등병이 라만 이등병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끝나고 잠깐 얘기좀 하자, 라만."
"!? 어, 어떠언... 얘기신지..."
"그건 잇다 들으면 알게 되는 거고 이등병이 말끝 흐리게 되있냐?"
살짝 인상 쓰면서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 금세 기가 죽은 라만 이등병이었다.
보고 있던 베일 일등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근무전에 나 때매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 긴장할 법도 했다.
"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아니 별거 아냐. 개인적인 거니깐. 소초장님 온다."
손을 휘휘 젓는 메이아 상등병이었다. 베일 일등병은 의아해하면서도 수긍하면서 무장검사를 준비했다.
무장검사가 끝나고 난 후, 그녀는 라만 이등병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키가 비슷해 무척 자연스러웠다.
"혼내는 거 아니니까 어깨 펴 임마."
"아, 아...알겠습니다..."
메이아 상등병은 라만 이등병을 소초의 외진 곳으로 데려가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턱짓을 했다.
턱짓의 의미는 당연히 일기장을 잽싸게 집어넣어놓으라는 소리겠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생활관을 향했다.
"생활관에 꿀이라도 발렸냐? 왜 그렇게 빨리 가."
샨티 일등병의 질문에 잠시 가슴이 철렁했지만, 금세 머리를 긁으며 얼버무렸다.
"하하. 버릇이 되었나봅니다."
생활관에 도착해 무기를 정리한 나는 커튼을 치고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베일 일등병쪽을 슬쩍 곁눈질하다가, 조용히 자연스럽게 라만 이등병의 관물함에 일기장에 집어넣었다.
이거야말로 완전범죄다. 절대 모를 거라 확신했다.
"잘 생각해봐 임마. 시간 날 때는 운동이 최고야."
"아, 알겠습니...다."
마침 메이아 상등병과 라만 이등병이 들어왔다. 무기를 정리한 그들은 각자 자리로 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는 관물함을 정리하는 척하며 옆을 곁눈질하며 관찰했다. 
"휴우."
한참을 뒤적거리다 일기장을 찾은 라만 이등병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게 왜.... 모포가 아니라 옷 뒤에 있지..."
옆의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던 내가 움찔했다. 아 거기였어?
꼴깍.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열심히 관물함을 정리하는 척에 열중했다.
마른 침이 저절로 삼켜져 내려갔다. 괜스레 식은땀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