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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스칸 게이트에서 샤린 타라크만을 만난지 이주일이 지났다.
때는 11월 초. 11월로 넘어오자 이따금씩 오던 눈이 슬슬 수시로 내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잠자고 밥먹는 시간 빼면 여지없이 제설작업에 투입되었다.
최전방의 겨울은 경계와 눈 딱 두 가지 뿐이라고 귀에 딱지 앉게 말하던 고참들의 말이 이제야 피부에 와닿게 되었다.
겨울에 대한 내 인식도 차츰 바뀌었다. 이건 그야말로 하얀 지옥이었다. 
"야 아르펜!"
"이등병 아르펜입니다!"
오후주간 근무주기였다. 간밤에 폭설이 내려 자다말고 깨어 눈만 쓸기 바빴는데, 근무전 잠깐 쪽잠을 자다 무장검사시간에 그만 늦어버렸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뛰어가 고참들의 호통을 들어야만 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부소초장님이랑 고참들이 니 새끼 다 기다려야 돼?"
"죄송합니다!"
호통의 주인공은 메이아 상등병이었다.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일등병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네는 눈 녹았다고 정신상태도 같이 녹아내렸냐, 뭐하는 짓이야 이게?"
"죄송합니다."
죄없는 고참들이 나 때문에 시선을 내리는 모습을 보니 순간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바탕 소란이 인 직후, 나는 죄 지은 범법자처럼 힘없이 사수인 메이아 상등병의 뒤를 따랐다.
모처럼 긴장감이 정점에 이르러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의 뒤를 바짝 붙었다. 그동안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막내라는 자각을 금세 하게 되었고, 또 무슨 호통이 날아올까 싶어 초소에 가서도 목석처럼 선 채 두말할 필요없이 외초경계를 섰다.
"아르펜."
메이아 상등병이 나를 불렀다. 무심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등병 아르펜입니다."
"뭐야, 아직도 그러고 있었냐."
누구때문에 그러고 있겠습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 하지 마. 나도 이러기 싫었는데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머리를 살짝 헝클어뜯던 메이아 상등병이 부연설명을 했다.
"분대장님은 비번이었고, 무장검사담당은 하필 얀 중사. 그 상황에선 두줄짜리들 중 하나라도 나서서 억지로라도 너한테 뭐라고 했어야 하는 게 맞아. 그런데 다 입닥치고 있길래 화난 것도 있었어."
"아, 네..."
"거기서 나까지 가만히 있었으면 분대장님이나 프레카 상등병한테 털렸어. 이 짬 먹고 욕먹을 바에야 철책선 때려부수고 나가서 트롤이랑 한판 뜨는 게 낫지."
과연 육체파 고참(?)이라 그런걸까, 메이아 상등병은 신랄하면서도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원래 상등병 6개월차인 내가 이등병 4개월차인 너한테 이런 변명같은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어. 니가 라만이다? 세워놓고 그냥 퍼질러 잤다."
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라는 뜻. 은연중에 인정받는 것 같아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메이아 상등병은 화제를 돌렸다.
"요즘 눈 쓴다고 잠도 못자고 힘들지? 나도 운동할 시간도 없어서 짜증나 죽겠다 야."
"그러고보니 메이아 상등병님은 운동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셨지요."
"그래. 나는 운동이지만 분대원들 저마다 자기만의 해소법이 있지."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이건 분대장님."
"맞습니다."
"프레카 상등병님은 특이하게도 남을 안마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시고 말이지."
그 말에 바로 이미지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주로 칼라 병사장이 대상이었는데, 아프다는 말이 나올때까지 사정없이 팔꿈치와 무릎을 찍어대어 농담조로 분대장고문관(?)이라는 별명까지 있던 터였다.
"라이오 녀석은 나랑 똑같고, 우리 꼬마는 오로지 먹는거. 베일은 블랙앤화이트였지 아마?"
"네."
블랙앤화이트는 두명이서 흰돌과 검은돌을 상하종횡으로 선이 그려져 있는 판에 순차적으로 두어 남는 돌이 많은 쪽이 이기는 아르고티아의 고전 놀이였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해서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인기 있는 놀이기도 했다. 
"안젤리카는 우리 귀지가 모이기만 기다리고 있는 변태같은 녀석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푸하하. 아, 죄송합니다."
"그러고보면 세레나가 제일 여성적이네. 뜨개질이라니. 뭐, 덕분에 목은 따뜻해서 좋네."
메이아 상등병이 목도리를 내보이며 자랑했다. 나는 부러워하면서도 희망을 품었다. 내것도 떠준다고 했는데, 사실 은근히 기대되었다. 근무서다보면 목이 추울 때가 은근히 많았으니깐.
"그리고 라만은..."
"네, 라만 이등병은..."
나와 메이아 상등병이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아..."
잠시동안의 침음성이 흐른 뒤, 메이아 상등병이 물었다.
"걔 뭐였냐?"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였을까? 나와 그녀는 턱을 짚고 생각해봐도 바로 떠오르는 취미생활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음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공기같은 녀석이네 참."
"그러게 말입니다. 유일하게 라만 이등병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네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머리아프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무렵이었다. 근무지변경을 위해 베일 일등병과 라만 이등병이 우리 초소에 왔다.
"수고 많으십니다."
"그래 베일아, 돌은 요새 잘 두고 있냐?"
메이아 상등병의 말에 베일 일등병이 두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간이 나야 말이지요. 눈 쓰느라고 돌 두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얼씨구, 훈수두는 소리 하고 있네. 눈 쓸면서 어디 두고 어디 둔다고 중얼거리는 소리 다 들려 자식아."
"헤헤. 그 모기만한 소리까지 애써 들으려 하시다니, 후임 사랑이 너무 돈독하시군요."
"말 하나는 이쁘게 하네 고놈 참." 
베일 일등병과 만담을 나누던 메이아 상등병의 시선이, 어느새 천천히 라만 이등병을 향했다.
"라만아."
"이, 이등병 라만...입니다."
"넌 요새 무슨 낙으로 사냐?"
라만이등병은 메이아 상등병이 말한 저의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메, 메이아상등병님과... 고참분들과 근무 서는 나, 낙으로... 삽니...다."
"그건 고마운데, 진부한 설탕 처바른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우리한테 털리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뭔가가 있을 거 아냐."
"스, 스트레스... 안받습...니다. 너무 잘...해주셔서."
"에이, 관두자. 고생해~."
김샛다는 표정을 지은 메이아 상등병이 사다리를 내려가자,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가슴을 팡팡치며 내게 말했다.
"나는 아주 쟤 말하는 거 듣다보면 겨울 참 잘 버틸 것 같아. 속에서 열불이 나서."
이하동문입니다. 나는 메이아 상등병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근무지를 향해 그렇게 걸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음? 저게 뭐지?"
눈을 동그랗게 뜬 메이아 상등병이 허리를 굽혀 누군가가 계단 위에 흘려놓은 물건 하나를 주웠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그녀는 누구꺼냐고 중얼거리며 일기장을 폈는데, 읽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첫페이지 좀 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내가 일기장을 건네받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풉."
[705년 6월 7일. 이, 입대했다.....]
굳이 날짜도 볼 필요 없었다. 이름도 없는 그 일기장의 주인공은, 글자만 봐도 라만이등병이었다.   

  • SKEN 2020.06.19 20:59
    초반부를 보면 그동안 훈훈하고 말랑말랑해서 잊고 있었지만 이래야 군대지! 라는 생각부터 들었네요. 라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마지막에 발견되는 일기! 흥미를 일으키는 에피소드 소재와 첫편만 봐도 느낌이 오는 제목, 첫편의 흐름까지! 그 스무스함에 이번에도 감탄합니다!